1. 놀라지 마라

사별의 시간

by 초록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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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97년 5월 19일,

여섯 살 딸아이와 함께 중국에

유학하던 중이던 제가,

한밤중 갑작스러운 남편의 부고

전화를 받고

황망히 한국으로 돌아오던,

그날,

그와의 모든 사랑이 멈춰버린

시간들을 기록한 글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선택이 아닌,

내게 닥친 사별을 그저

받아들이고 감내해야만 했던

시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별


1. 놀라지 마라


인천에서 배를 타고 26시간 만에 천진 탕구항에 도착했습니다.

리아와 제가 배를 선택한 이유는 두 시간 남짓의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 한 달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늦은 오후 천진 집에 도착한 뒤, 그는 밤 12시가 되기를 기다려 전화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엔 밤 12시가 넘으면 국제전화 요금이 50% 할인되었기에, 우리는 늘 자정을 넘겨야 통화를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배를 타고 와서인지 너무 피곤했던 저는 그만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몇 시인지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밤, 전화가 울렸습니다. ‘그 사람이 전화를 했구나’ 하고 비몽사몽 수화기를 들었는데, 큰오빠였습니다. 이 시간에? 왜 큰오빠가? 순간, 칠순이 넘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은 너무도 뜻밖이었습니다.

“너, 날 밝는대로 다시 한국 와야겠다.”

“무슨 일이에요, 오빠?”

“리아 아빠가 많이 다쳐서 병원에 있다.”

“네? 왜요? 어디가요? 많이 다쳤어요?”


그가 다쳤는데 왜 그의 형이나 누나가 아닌 오빠가 전화를 했을까. 의문이 들려던 찰나,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오빠가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리아 아빠 지금 영안실에 있어.”


그 순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동이 트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창밖은 불 하나 켜진 집 없이 칠흑같은 어둠뿐이었습니다.


자고 있는 딸 리아를 바라보며 저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저 가슴을 부여잡고 조용히, 그리고 미친 듯이 울었습니다.


‘영안실이라고? 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리아와 저를 인천항까지 배웅해 준 그 사람이, 다음 달에 보자며 손을 흔들던 그가, 지금 영안실에 있다니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 밤이 지나기만을 바랐습니다.


동이 트자마자 후배 호철 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호철씨, 미안해요. 저 한국에 좀 가야 해요. 리아 아빠가… 영안실에 있대요. 저보고 오라고 해요. 비행기 표도 잘 모르겠고… 거류증도 필요하고요. 제발… 도와주세요. 어제 도착해서 돈도 없어요. 은행도 아직 못 갔고요. 제발 부탁해요.”


호철 씨는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제 여권과 거류증만 들고 바로 공안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시절엔 비자가 여권에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별도의 ‘거류증’이 따로 있었고, 출국하려면 반드시 여권과 거류증을 가지고 출입국관리소에서 출국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얼마 후, 호철 씨늘 거류증과 비행기 표를 주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얼른 가보세요”라고만 말했습니다. 그가 돌아오기까지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제 막 도착했던 천진에서 짐도 채 풀지 못한 가방을 끌고 하루 만에 다시 한국으로, 남편이 있다는 서울 병원 영안실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천진 집에서부터 공항까지, 어떤 정신으로 움직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가슴과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출발했습니다. 1년 후배이자 동갑 친구였던 세실리아가 전화를 받고 공항까지 함께 와서 저를 부축해주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리아가 물었습니다.

“엄마, 우리 왜 다시 한국 가? 왜 또 가?”

“…리아야, 아빠가… 돌아가셨대. 아니, 죽었대…”

여섯 살 리아가 죽음이라는 걸 알까?

“리아야, 우리 이제 아빠 못 봐. 아빠가 이 세상에 없어…”


리아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이제 누가 나 데리고 놀이공원 가? 아빠가 다음에 가면 놀이공원 데리고 간다고 했는데… 누구랑 가…”


그 순간, 저는 또다시 리아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리아가 말했습니다.

“엄마 울지 마. 아빠 없으면 놀이공원 안 갈게. 아빠 보고 싶으면 사진 보면 되잖아. 그러니까 엄마 울지 마…”


비행기 안에서 저는 입을 틀어막고 꺽꺽 소리를 죽이며 울어야 했습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오빠와 동생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퇴근시간, 사람들로 가득한 5호선 전철은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오빠는 말했습니다.

“ 리아아빠가 호수에서 실족했다고 한다 .”


"호수라고요? 실족이라고요?

그 사람, 물 싫어했어요.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제 마음은 전철과 함께 덜컹덜컹 흔들렸습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그의 어머니와 누나들, 형들이 와 있었습니다. 영정 사진 속 그는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내가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현실 같지 않았습니다. 아무 감각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시신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영안실로 들어갔습니다. 냉장 안치실 문이 열리자, 그가 반듯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그저 평온하게 잠든 모습 같았습니다.


“일어나… 일어나 봐. 나 왔어. 일어나 보라고…”

그의 뺨을 어루만졌습니다.

얼음처럼 차가웠습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셔야 합니다. 나가셔야 합니다.”

직원이 조심스럽게 저를 떼어놓으려 했습니다.


“리아 아빠… 리아 아빠… 나 어떡하라고요…

리아 나혼자 어떻게 키우라고요…

리아 아빠… 리아 잘 키울게요.

리아 잘 키울게요.

걱정 말고… 편히 가요… 리아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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