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봄이라는 닉네임으로....

by 초록 향기

2-18 봄이라는 닉네임으로....

그렇게 추운 겨울에 몸과 마음을 모두 앓고 난 후,

겨울은 가고 드디어 봄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봄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잠못이루던 어느날 밤 뒤척이다가 컴퓨터를 켰습니다.


‘봄’이라는 닉네임으로 처음 대화방이라는 곳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글자가 살아 숨 쉬듯 오가고,

이 깊은 밤에도 누군가 깨어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고물고물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지금 이 시간 나 혼자 깨어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깨어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곳에서 한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천이 집인, 나와 동갑인 한 남자였습니다.

저녁 시간에 우연히 대화방에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두 아이의 가장이었던 그는

승진을 앞두고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 이야기,

아이를 키우며 겪는 소소한 일상들,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 댁에 가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제게는 이미 잃어버린 시간처럼 아프게 느껴지는

그 평범한 가족의 시간이 못내 부러웠습니다.


그 시절엔 메신저 기능이 없어

대화방에 들어가야만 접속 중인 닉네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세 번 대화를 나눈 뒤 메일 주소를 주고받았습니다.


화이트데이 즈음,

장미꽃이 가득 담긴 예쁜 그림카드가 도착했습니다.


“화이트데이까지 챙겨서 카드까지 보내는 친구, 괘씸하지 않으세요?”


귀여운 농담과 함께였습니다.

저는 처음 받아보는 인터넷 그림카드였습니다.


비록 그림카드였지만

종이카드를 받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오전 공부를 마치고 컴퓨터를 켜면

어김없이 그의 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오늘 점심 메뉴는 뭘 드셨나요?”

“형님 댁에 갔다가 아이가 집그네에서 떨어졌어요.”

“병원에 데려갔더니 너무 늦게 왔다고 의사선생님에게 혼났어요.”

“아들이 저를 닮아서 미술학원에서 인기가 좋대요.”


그는 매일그렇게 소박한 일상을 전해주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하루 이야기였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느껴지는 ‘아빠의 모습’이 좋았고,

어느새 나는 매일 그의 메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 있는 아내도

조금은 부러웠습니다.


“중국에서 황사가 온대요.

그런데 그 황사 너머 어딘가에 ‘향기’라는 친구가 있어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다가 나 혼자 웃어요.”


그렇게 시작된 메일은 어느새 기다림이 되었습니다.


오전 공부를 끝내고 나면 그의 메일을 기다리게 되었고,

점심에 읽는 그의 메일은 하루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출장으로 메일이 오지 않는 날이면

텅 빈 메일함이 마치 텅 빈 내 가슴처럼 허전했습니다.


그러다가도 늦은 밤이 되면


“미안해요. 오늘 하루 종일 너무 바빠서

향기님께 소식을 못 전했네요.”


그런 메일이 도착했고,

그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졌습니다.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그의 메일을 기다리는 나,

메일이 없으면 허전해하는 나,

그리고 내 소식을 궁금해하는 그 사람.


이 감정은 무엇일까?


서로의 얼굴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


정이 든 걸까요?

아니면 내가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그리웠던 걸까요?


그러던 어느 날 밤,

대화창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화면이 조용해졌습니다.


잠시 기다렸다가 왜 그러냐고 묻자

아내가 잠을 자지 않고 뭐 하느냐며

컴퓨터 방으로 건너왔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대화창을 볼까 봐

순간적으로 창을 내려놓았다고 했습니다.


“저 이제 자러 가야겠네요.”


그 말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습니다.


“지금 건너가면, 나 다신 못 볼 줄 알아요.”


순간 그렇게 앙탈스럽게 말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지만

이미 글은 올라가 있었고

삭제할 수도 취소할 수도 없었습니다.


조금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향기님을 두고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요.”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찡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누군가에게 내 감정과 마음이

공감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뒤 내가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저는 괜찮으니

얼른 가서 마나님 꼭 껴안고 잘 자요.”


그는 되물었습니다.


“정말 가도 되나요?”


그리고는 이내


“안 되겠어요. 오늘은 그냥 이 방에서 자야겠어요.”


그가 순간의 진심이었는지,

그저 농담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시 뒤 그는 자러 간다며 대화방을 나갔습니다.


며칠 뒤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아내와 마트에 다녀왔다며

집에 들어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말했습니다.


“향기님 반가워요.”


“부인은 지금 뭐 해요?”


“주방에서 식사 준비 중이에요.”


순간 나는 아찔했습니다.


아내는 부엌에서 남편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쁜데

남편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얼굴도 모르는 향기에게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의 아내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내가 지금 연애를 하고 있는 걸까?

정신적인 연애를?


그 후 며칠 동안

그에게 메일도 보낼수가 없었고

대화방에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 뒤 그의 메일이 왔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왜 연락이 없냐고,

걱정이 된다고요.


우리의 이런 관계는 무엇일까?

이 마음은 또 무엇일까?


더 이상 빠져들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혹시 우리가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 스쳐 지나갈 수도 있겠지요.

비록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요.”


그도 답했습니다.


“혹시 공부하는 향기님께 마음으로 부담이 되었을까 봐 미안해요.

그동안 나눈 대화, 좋은 시간이었고 정말 고마웠어요.”


그렇게 새천년의 봄,

나는 한 달 동안 함께 주고 받은 그의 메일 계정을 삭제했고

그와의 사이버 그리움도

그렇게 안녕을 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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