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업무의 폭풍으로부터 벗어나 일주일간 일을 하지 않을 자유를 획득했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이 가득한 책이 배송되어 컬러풀한 그림을 펼쳐놓으니 마음에 생기가 돈다. 쇼팽 왈츠 10번은 무한반복 연습해도 가슴이 저려온다. 연휴의 책을 고르기 위해 간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 펼쳤다.
<철학자의 공책_최진석)의 첫 페이지의 글이다. 첫 페이지부터 심쿵이다.
<저자의 말>
공책(空冊)에 쓰기
글을 기다리는 종이는
온몸을 펴놓은 피부다.
쓰기는 피부가 된 자신을 긁는 일이다.
자신에게 고랑을 내는 일이다.
고랑을 내야 땅도 비로소 자기가 땅으로 사는지 알듯이
피부를 긁어야 자기에게로 가는 초인종이 울린다.
자기가 어떻게 있는지
자기가 하늘을 향해 언제 팔을 벌려야 하는지
피부를 긁어 고랑을 내야 하는 것이다.
쓰기만큼 깊은 일이 또 있을까?
자신을 궁금해하는 일,
우주의 수평선에 손을 뻗어 보는 일,
행성의 궤도를 어루만지는 일,
그녀가 서 있는 버스 정류장의 냄새를 혼자 맡아보는 일,
머리의 무게를 그대로 다 받아서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긁는 일.
2024년 10월 31일 함평 호접몽가의 밤, 미문(未文)에서
최진석
책 읽기를 좋아하는 분과 <읽기>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알게 된 브런치스토리에서 함께 <쓰기>를 시작했다. 가까스로, 꾸역꾸역 쓴다. 어렵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나로부터 쓸게 있을까 좌절한다. 그런데, 첫 문장을 쓰고 나면 뭐라도 쓰게 되고, 나도 모르는 나의 생각에 놀라기도 한다. 나를 알게 된다. 쓴다는 것은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이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나는 새로운 예술적 자극을 받을 때 행복하다.
그래서 이렇게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긴 연휴의 일을 하지 않는 자유의 시간은 예술 또는 예술과 관계된 것들을 찾는다. 피아니스트 윱 베빙(Joep Beving)의 피아노 앨범 <Hermetistm>이 조용히 흐르는 bgm이 되어 어쩌다가 눈 오는 날의 홈카페가 되었다. 읽기에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최진석 교수님의 <철학자의 공책>은 첫 페이지부터 나에게 글쓰기를 재촉하는 <저자의 말>로 시작하여 무거운 300개의 문장으로 채워져, 깊게 생각하며 필사할 수 있는 공책(空冊)이다. 김주환 교수님의 <회복탄력성>은 최근에 인상 깊게 읽었던 <내면소통> 이전의 책으로 인간 내면 심리의 과정을 어렵지 않게 풀어줘 이제야 읽어보는 기대되는 책이다. 유발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넥서스 Nexus> 역시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다. <넥서스>의 처음을 읽으면서 아, 글이란 이렇게 써야 하는 거구나 생각했다. 요즘은 읽으면서 쓰기에 대해서 염두하는 뇌 기능이 추가되었다.ㅎ 내용이 꽉 차 있어서 읽으면서 내 뇌를 풀가동하게 만든다. 책을 읽으면서 해석하고 놀라고를 반복하면서 힘겹게 꾹꾹 눌러 읽는, 무거운 보물 같은 책이다. 연휴를 함께 할 예술이다.
최근 새로 산 피아노도 큰 즐거움이다. 쇼팽 왈츠 10번의 무한반복이 묘한 쾌감을 일으키고 부지불식간에 완성되어 간다. 피아노는 감정을 일으킨다.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 들지 않는 감정을 일으킨다. 쇼팽의 선율은 미쳤다. 요즈음 피아노를 득템하고 더 피아노에 빠지게 되었고 살짝 무아지경?을 맛본다. 피아노의 무아지경은 행복이다.
그리고 새로 시작한 운동, 일상에 즐거움이 이리도 많은데 그 힘든 운동을 왜 해야 하는가, 늘 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운동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비록 목디스크증상이 있고 건강검진에 경고등이 켜져 시작한 헬스 PT지만 온몸에 자극이 가해져 운동 후, 집에 오면 떡실신하게 만드는 근력운동이라는 신세계를 접하고 몸을 움직이는 단순한 이 행위도 예술이 아닌가 생각된다. 운동 도파민이 주는 얻기 힘든 희열인가 보다. 크게 격렬하지 않은 동작을 하는데도 쉽게 땀이 흐르고, 일상에 경쾌함을 주는 운동에 눈을 떴다. 러닝이라는 미지의 세계도 내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희열이 있을 듯하다. 아, 미지의 세계는 끝이 없다. 해 봐야 알 수 있는데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
하루하루 힘겨운 나날에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피아노연습을 하고 운동을 하는 시간은 숨통을 트이게 한다. 행복을 맛보게 한다. 우리 모두는 행복할 의무가 있다.
힘겨움에 매몰되지 않게 선물 같은 연휴의 시간 동안 새로운 예술적 자극에 파묻혀야겠다. 내게 행복을 주는 일. 새로운 예술적 자극을 받는 일. 피부를 긁어 고랑을 내는 일. 내면의 실타래를 끌어올려 문장을 만들어보는 일. 힘겨움으로부터 멀어지는 일. 무언가를 시도해 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