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꽤 오래전에 상당히 재미있게 읽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박물관>의 문장이다. 오르한 파묵은 책 속 화자인 케말이 퓌순을 만나고 사랑하는 과정을 두꺼운 두 권의 책에 담았는데, 그 감정의 디테일에 놀라워하며 읽었다. 아래 묘사는 식탁 주변에 앉는 위치가 잘 파악되지 않아 그려가면서 읽은 부분이다. 퓌순이 맞은편에 보이도록 앉게 되면 마음이 힘들어진다는 표현이다.ㅎ
식탁에서의 내 자리는 타륵 씨와 퓌순 사이에, 텔레비전이 보이는 긴 식탁 가장자리에, 네시베 고모 맞은편에 있었다. 페리둔이 집에 있으면 내 옆에 앉았고, 집에 없으면 아주 가끔 오는 손님이 그 자리에 앉았다. 네시베 고모는 식사 초반에는 부엌이 가깝도록 텔레비전을 등지고 앉았다. 식사 중간쯤에는 부엌일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일어나 내 왼쪽에, 퓌순과 나 사이에 앉아 편히 텔레비전을 보았다. 나는 팔 년 동안 네시베 고모와 팔꿈치를 부딪치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네시베 고모가 내 옆에 앉으면 긴 식탁의 반대쪽은 비게 되었다. 가끔 저녁때 집에 돌아온 페리둔이 이 빈자리에 앉기도 했다. 그러면 퓌순도 남편 곁으로 자리를 옮기고, 네시베 고모가 퓌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되면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힘들었지만, 어차피 그 시간에는 방송도 끝나서 텔레비전이 꺼져 있었다.(오르한파묵, 순수박물관)
순수박물관 1,2 두 권의 책 대부분의 내용이 온통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과 그에 따르는 상황 혹은 그녀와 관계된 것들, 아니면 억지로라도 연결 지어 생각하려는 마음이다. 내가 사랑할 때 내 정신이 이상했던 게 아니었다.ㅎ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소설 83장에 걸쳐 나오는 물건들을 전시하려고 그녀에 관한 일상사 박물관을 이스탄불 한 구석에 2014년에 실제로 개관했다고 한다. 소설책 끝부분에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박물관 무료 입장권이 나온다. 소설 안에 입장권이 출현한 거다.ㅎㅎ
작가가 굳이 인터뷰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에 가깝다고 말하지 않았더라고 그렇지 않고는 쓰지 못했을 이야기가 펼쳐진다.
허구인 듯 허구 아닌 이야기로 실제 박물관을 만든 이 사람, 도대체 뭐지?
<바늘로 우물파기>라는 집필철학을 가진 그의 상상력과 그것을 현실로 만든 실행력이 정말 놀랍다.
그 끝없는 그녀의 관심에 관한 정밀묘사는 말할 것도 없고 뭔가 제각각인 것 같고 조합하면 안 될 것 같은 터키어도 재밌다. 영어는 익숙해있지만 일본, 러시아, 프랑스등의 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의 이름과 지명들이 아주 길기도 하고 생소해서 누가 누군지 아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 부분이 흥미롭다. 그런데 터키어는 러브 스토리라서 그런가, 사랑스럽다.
이스틱랄, 지한기르, 베쉭타쉬, 쾨프테, 뵈파, 아타튀르크, 웩섹칼드름....여주인공 '퓌순'의 이름이 제일 예쁘다.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는 러시아어의 긴 이름들이 생소했고(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 카레닌,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 스테판 아르카지치 오블론스키, 다리아 알렉산드로브, 콘스탄틴 드마트리치...),
요시카와 에이지의 일본 역사소설 <대망>을 읽을 때도 일본인들의 긴 이름에 누가 누군지 구분하는데 한참 걸렸다.(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아들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아케치 미츠히데, 오쿠보 나가야스, 오꾸보 게끼, 핫도리 마사시게, 사나다 노부유끼....)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역시 라틴어로 된 황제 이름들을 적으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아우구스트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시파스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콤모두스,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파란만장한 역대 황제들 중 사후에까지 로마시민들의 깊은 애도를 받았다는 최고 어진 덕장 중의 덕장인 자비로운 황제는 안토니우스 피우스다.
새로운 단어들에 뇌가 반응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만화 <캔디>의 안토니 브라운, 월리엄 알버트 아드레이, 아리스테아 콘웰, 아치볼트 콘웰 중 테리우스 그라함 그란체스터의 어감은 늘 좋다.
읽을 때 강렬했던 퓌순을 사랑했던 케말의 이야기를 다시 펼쳐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