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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양 Nov 17. 2021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7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감독 : 요아킴 트리에(Joachim Trier)

배우 : 르나트 라인제브(Renate Reinsve), 앤더스 다니엘슨 라이(Anders Danielsen Lie), 헤르베르트 노르룸(Herbert Nordrum) 등

2021년, 노르웨이 영화


제 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작품을 찾아보니 '델마', '라우더댄밤즈' 등등 유명하진 않지만 이름을 들어본 작품이 몇몇 있었다. 제 74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길래 기대를 가지고 봤다. 오슬로를 배경으로 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노르웨이 원제는 'Verdens Verste Menneske'. 영어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이다. 로맨틱 코미디인데다 제목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라니. 대충 내용이 짐작가지만 제목의 진부함과 달리 실제 스크린을 통해 얻는 영화 경험은 또 색다를 때가 있다.


<줄거리>

Prologue

오슬로에 사는 의대생 율리에는 어느 날 이 길이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하지만 또 다시 어느 날 사진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 한번 전공을 바꾼다. 대학교 4학년이 된 율리에는 어느 파티에 참석했다가 만난 그래픽 노블 작가 악셀과 대화를 나누다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40대인 그와 교제를 시작한다.

Ch 1. 타인들 (The others)

 악셀의 친구네 집에서 주말을 보내던 율리에와 악셀은 아이를 낳을지 말지 이야기 하다 크게 다툰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악셀과 취업도 하지 못한 율리에가 바라보는 미래는 다르다. 어느 날 악셀이 조카들과 놀아주는 장면을 목격한 율리에는 마음이 심란해진다.

Ch 2. 바람 (Cheating)

 악셀의 출판 기념 파티에서 겉돌던 율리에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찍 빠져나간다. 노을 지는 거리를 걷다가 누군가의 피로연이 벌어지고 있는 한 가정집을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만난 에이빈드라는 낯선 남자와 하룻밤 동안 스킨십 없는 연애감정만 나누고 다음 날 새벽 헤어진다.

율리에와 에이빈드의 첫 만남

Ch 3. #미투 시대의 구강성교(Oral Sex in the age of #MeToo)

 악셀의 집에서 노트북 앞에 앉은 율리에는 '미투 시대의 구강 성교'에 관한 에세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온라인에 포스팅하자 꽤 좋은 반응이 돌아온다.

Ch 4. 우리만의 가족(Our own family)

 30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율리에의 어머니, 할머니, 악셀이 전부 모였다. 이후, 율리에는 악셀과 함께 아버가 사는 집을 방문해 왜 자신의 생일 축하 자리에 오지 않았는지 묻는다. 그러자 허리가 아파서 가지 못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미 마음이 상한 율리에는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이번엔 블로그에 포스팅 한 글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관심한 태도로 케이블 선이 고장나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었다는 둥의 변명을 한다. 율리에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악셀은 당신만의 가족을 만들면 된다고 위로해준다.

Ch 5. 나쁜 타이밍(Bad timing)

 율리에가 일하는 서점에 에이빈드가 우연히 손님으로 온다. 반색하며 에이빈드에게 아는 척을 하는데 그의 옆으로 여자 한 명이 나타난다. 에이빈드의 부인인 순니바였다. 하지만 에이빈드는 율리에에게 몰래 자신이 일하는 빵집 주소와 개인 정보를 남긴다.

 한편, 그 날 저녁, 악셀은 저녁 식사자리에서 본인의 그래픽 노블 작품인 '밥캣'의 영화화에 대해 친구들과 열띤 토론을 나눈다. 율리에는 그런 악셀을 멍하니 바라본다. 다음 날 아침, 율리에는 아침 커피를 내리는 악셀에게 헤어짐을 선고한다.

헤어지는 중인 율리에와 악셀

Ch 6. 핀마르크 산악지대(Finnmark highlands)

 에이빈드의 부인 순니바은 지구온난화, 요가, 채식, 정신 수양 명상에 관심이 많은 여자다. 에이빈드가 관심있는 주제와는 동 떨어져 있지만 관성처럼 순니바가 하는 일을 같이 한다.

Ch 7. 새로운 장(A new chapter)

 율리에와 에이빈드가 함께 살기 시작한다. 에이빈드는 순니바와 헤어졌다.

Ch 8. 율리에의 나르시시스트적 서커스(Julie's narcissistic circus)

 에이빈드의 친구 한 명이 조촐한 저녁 식사 자리에 마약 버섯을 가져온다. 마약 버섯을 복용한 율리에는 온갖 과거, 욕망, 전남친, 아기, 나체, 피의 이미지가 한데 뒤섞인 정신착란의 밤을 보낸다.

Ch 9. 밥캣이 성탄절을 망치다(Bobcat wreks Xmas)

 눈이 내리는 12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던 율리에는 커다란 티비에서 악셀을 본다. '밥캣'이라는 작품이 얼마나 성차별적인지를 두고 한 인터뷰어가 악셀을 비난한다. 악셀은 자신의 작품을 옹호하며 왠지 필사적인 모습을 보이고 율리에에게 그 장면은 인상적으로 남는다.

Ch 10. 일인칭 단수(First person singular)

 율리에가 일하는 서점에서 악셀의 동생이 우연히 방문한다. 악셀에 대한 소식을 주고받던 중, 그가 췌장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율리에는 충격을 받고 괜히 에이빈드에게 화풀이를 한다.

Ch11. 양성반응(Positive)

 율리에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지만 에이빈드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악셀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간다. 악셀은 죽음을 앞두고 느끼는 수많은 감정에 대해 털어놓는다. 율리에는 자신이 임신했다고 이야기한다. 악셀은 율리에가 좋은 엄마가 될거라고 이야기하지만 율리에는 아이를 낳을지 마을지 결정하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와 에이빈드에게 임신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아이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두 사람은 헤어진다.

악셀을 찾아간 율리에

Ch12.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Everything comes to an end)

 악셀은 작품을 만드는 영감을 얻었던 장소로 율리에를 데려간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살지 못할거라고 이야기하면서 계속 살고 싶다고 말한다. 얼마 뒤, 율리에는 악셀의 동생에게서 그의 병환이 악화되어 결국 밤을 넘기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밤새 거리를 걷다 집으로 돌아온 율리에는 샤워를 하는 도중 유산한다.

Epilogue

 시간이 흘러, 율리에는 영화 현장에서 스틸컷을 찍는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에이빈드를 본 율리에는 현재 작업하는 영화 속의 여자 배우가 에이빈드의 아내이며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끝>



<감상평>


- 구성, 연출, 연기, 음악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총 14장으로 구성된 이야기다. 프롤로그, 에필로그 그리고 12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챕터로 넘어갈 때마다 화면에 각 장의 제목이 뜬다. 관객은 화면을 보고 있지만 마치 책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영화는 도입부가 상당히 인상적인데 리드미컬한 음악과 함께 삽입된 나레이션이 영화속으로 확 몰입하게 되는 효과를 준다.


 한편, 챕터 방식의 이야기 전개와 나레이션 등의 연출을 보자마자 생각나는 감독이 한 명 있었는데 바로 '웨스 앤더슨' 감독이다. 트리에 감독이 앤더슨 감독 영화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앤더슨 감독의 영화가 독특하고 정형화된 패턴(고정된 화면 비율, 동화같은 색감, 챕터로 나눈 내러티브, 연극같은 연출, 나레이션, 섬세하게 고안된 소품)이 있기 때문에 비슷한 연출이나 미장센이 보이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챕터 방식을 쓰는 웨스 앤더슨 영화: '로열 테넌바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그리고 올해 개봉한 '프랜치 디스패치' 등등.


 진짜 요아킴 트리에가 앤더슨 영화에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요아킴 트리에만의 연출이 돋보이는 순간도 몇 부분 있었다. 율리에가 악셀에게 헤어짐을 고하면서 동시에 머릿 속으로 에이빈드에게 달려가는 환상을 그리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이 장면에서 율리에가 오슬로의 거리를 걷는 동안 보이는 모든 사람과 자동차의 움직임이 멈춰있고 율리에와 에이빈드만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연출이 된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움직임은 멈춰있는, 즉 로맨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출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퀀스가 요아킴 트리에의 연출 능력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에이빈드에게 달려나가는, 율리에의 머릿 속 환상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2020년의 여름에 54일 동안 찍은 영화다. 특히 오슬로라는 도시의 매력을 잘 보여줄 수 있도록 35mm 필름으로 찍었다고 한다. 트리에 감독의 말에 따르면 영화를 굉장히 음악적으로 찍으려고 노력했으며 시퀀스 속에서 배우가 진짜로 춤추고 노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보이도록 연출을 했다고 한다. 영화를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악셀과 사는 아파트에서 뛰어나온 율리에가 오슬로의 거리를 지나 세인트 한샤우겐(St. hanshaugen) 공원에서 에이빈드와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까지 모든 부분이 물처럼 흐르면서 하나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래서 트리에 감독이 '음악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간다.


 게다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관람하면서 개인적으로 좋았던 점은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잘 다루지 않는 나라의 도시 풍경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외국 영화를 보면 보통 파리, 뉴욕이나 런던 같은 전세계 유명 대도시가 배경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노르웨이 영화인 만큼 다른 대도시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오슬로(노르웨이의 수도)의 모습을 담아냈다. 잘 정돈되었지만 차갑고 서늘한 오슬로의 풍경이 북유럽의 이미지와 들어맞으면서 서정적이었다. 요즘 같이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시대에 화면 속 잘 담겨진 도시 풍경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사실 외국 영화를 볼 때는 언어가 낯설기 때문에 발연기를 하는건지 명연기를 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특히 이번 영화는 나름 익숙한 영어가 아닌 노르웨이어라 더 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표정, 제스처, 목소리와 대사를 치는 리듬 등등에서 잡아낼 수 있는 단서들이 존재한다. 그냥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영화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르나트 라인제브(율리에 역)도 제 옷을 입은 것처럼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나는 그보다 앤더스 다니엘슨 라이(악셀 역)가 더 인상적이었다. 만약 악셀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영화 속에서 묘사된 것 그대로일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연기가 아니라 저런 성격과 저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그냥 출연한 것 같았다는 뜻이다. 연기적인 측면은 전반적으로 다 괜찮았다. 비중이 적은 조연들까지도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연기를 보여준 것 같다.


 추가적으로 이 영화에 대해 또 언급하고 싶은 사실 하나는 음악 사용이 굉장히 좋았다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사용되는 음악에도 집중하는 편인데 음악이 장면과 얼마나 어울리는지 또는 제대로 된 타이밍에 음악이 흘러나오는지 등등을 살핀다. 음악 역시 영화 감상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 흘러나오는 아트 가펑클의 'Waters of March'를 이야기 하고 싶은데 기타 소리에 맞춰 단어를 나열해나가는 가사가 기억에 남는다. 감정과 여운을 증폭시킬 수 있도록 알맞는 음악을 쓰는 건 관객의 영화 경험에서도 중요한 일이다. 슬픈 영화를 본 뒤, 갑자기 경쾌한 음악이 나오면 김이 팍 새듯 적절한 장면에서의 적절한 음악 사용은 그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결정하는 데 꽤나 큰 요소로 작용한다.


(가사 중에서)


It's the wind blowing free, it's the end of the slope

그건 자유롭게 부는 바람이야, 그건 비탈의 끝이지.
It's a beam, it's a void, it's a hunch, it's a hope

그건 미소, 그건 공허, 그건 예감, 그건 희망이야.
And the river bank talks of the waters of March

그리고 강기슭이 미지의 3월에 대해 이야기 하지.
It's the end of the strain, it's the joy in your heart

그건 긴장의 끝, 그건 당신 심장의 기쁨이야.


The foot, the ground, the flesh and the bone

그 발, 그 땅, 그 살과 뼈
The beat of the road, a slingshot's stone

길의 비트, 새총의 돌
A fish, a flash, a silvery glow

물고기, 섬광, 은빛 불빛
A fight, a bet, the flange of a bow

싸움, 내기, 그 활의 테두리
The bed of the well, the end of the line

우물의 침대, 선의 끝
The dismay in the face, it's a loss, it's a find

얼굴 위의 실망, 그건 상실이고, 그건 발견이지


https://youtu.be/3A3W5v1dNNI

 


- 영화/배우 트리비아(trivia)


 '악셀'역을 맡은 배우 앤더스 다니엘슨 라이(이하 앤더스로 통칭)는 요아킴 감독의 전작들인 'Reprise'와 'Oslo, August 31st'의 주연배우로 출연한 전적이 있다. 2006년 영화인 'Reprise'와 2021년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사이의 기간을 생각해보면 꽤 오랜 시간 동안 감독과 알아온 것이다. 'Reprise'에서는 야망있는 젊은이를, 'Oslo, August 31st'에서는 30대에서 우울하고 상실한 남자를, 이번 영화에서는 40대의 나이에 젊은 여자와 단단한 삶과 가족을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남자 역할을 맡았다. 요아킴은 이번 영화에서 앤더스의 연기를 보고 지금까지의 최고의 연기를 보였다고 인터뷰했다.

 앤더스는 한 인터뷰에서 본인의 캐릭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데 이는 그가 '악셀'이라는 인물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원문) There's an old-fashioned masculinity to (my character). He feels that he belonged to a time that has passed and he is alienated by the fragmentation of culture in the digital world.

내 캐릭터는 구시대적인 남성중심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는 본인이 이미 지나간 시간(과거)에 속해있으며 디지털 세상의 문화에서 소외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이번 영화에서 율리에 역을 맡은 르나트 라인제브(이하 르나트로 통칭)는 10년 전, 감독의 전작 'Oslo, August 31st'에서 작은 배역을 맡은 적 있다. 그 후 10년 동안 르나트는 많은 역할을 맡아 연기활동을 계속했지만 정작 주연 역할은 한번도 맡지 못했다고 한다. 요아킴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르나트를 많이 떠올렸으며 실제 르나트가 율리에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개인의 내면에 숨겨진 결점이나 공허함을 표현하는데 서스럼없는 훌륭한 배우였다고 언급했다.

 

 에이빈드 역할을 많은 헤르베르트는 주로 코미디로 많이 알려진 배우인데 노르웨이의 영화나 티비쇼에 많이 출연했다. 또 그는 연극 배우이기도 하며 최근에는 햄릿 연극에도 참여했다. 영화 속 '악셀'의 캐릭터가 지적이고 나잇대가 있는 특징을 가졌다면 헤르베르트가 연기한 '에이빈드'는 젊고 자유로우며, 약간의 가벼운 코미디적 요소도 가지고 있다.


 에이빈드와 율리에의 첫만남이 이루어지는 파티 씬은 장면의 구조를 미리 짜놓긴 했으나 대부분은 현장에서 배우들의 즉흥적인 연기로 만들어졌다. 에이빈드 배우와 율리에 배우는 같은 연극학교를 다녀서 서로 이미 아는 사이였고, 요아킴 감독은 이 장면을 약간의 재즈 같은 느낌으로 연출하고 싶다고 말해두었다. 두 사람은 상당한 자유 속에서 즉흥적으로 연기를 하면서 그 장면을 완성했다.


- 여성 주연 영화 속 카메라의 시선


 IMDB를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어서 적어본다. "챕터 5. 나쁜 타이밍"에서 악셀과 율리에는 헤어지는 도중에 섹스를 하는데 이 장면에서 악셀 역을 맡은 배우 앤더스 다니엘슨 라이는 전면 누드로 성기 노출을 한다. 이에 대해 요아킴 트리에는 여성의 시선에서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포함시킨 장면이라고 말했다. 또한, 요아킴 트리에는 헤어지는 장면 도중 발생한 현실적이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두고 '이런 진실된 상황에서도 때로 당신은 벗고 있을 수 있다'며 솔직한 상황을 그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언급했다.


(원문) It was important to show because we are making a film about a young woman and her gaze. Sex scenes are often filmed from a male point of view. Not many male directors are aware of that. I think girls should be allowed to have some eye candy too.

우리는 젊은 여성과 그녀의 시선에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걸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어요. 섹스 씬은 보통 남성의 관점에서 촬영됩니다. 많은 남성 감독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죠. 저는 여자들을 위한 눈요기용 장면들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인데, 가끔 보면 여성 주연 영화에서도 여성의 몸을 훑지 못해 안달난 카메라 워크를 많이 찾을 수 있다. 여성의 가슴이나 굴곡을 확대해서 찍는 경우는 비일비재하지만 남성의 몸을 대상화하거나 성적인 시선으로 훑는 카메라 워크는 거의 없다. 있더라도 그 남성은 진짜 대상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성성을 더 강화시키고 사회에서는 더 숭배받는 경우가 많다. 영화나 드라마 업계에 만연한 이런 성차별적인 카메라 워크는 시각 매체가 확산되는 무렵부터 시작해서 발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티비나 스크린에 나오는 여성 배우가 대상화되지 않는 경우가 있던가. 트리에 감독이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나름대로 자신만의 장면을 만들어낸 것은 어느 정도 달가운 사실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노력들이 업계 전반에 퍼져나가면 더 좋을 것 같다.


- 사랑이 매개채인 관계에 대하여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감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의 내용은 매우 뻔하고 익숙해보인다. 인생의 의미를 찾으며 막 30대가 된 젊은 주인공이 사랑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이 영화의 전체 내용이다. 율리에는 영화의 시작에서 벌써 진로를 두번이나 틀었다. 의학 공부를 하다가 심리학 공부를 하고 마침내 정착한 것은 사진 공부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느라 이미 20대의 전부가 흘러갔다. 게다가 새로 시작한 사랑은 40대의 나이에 그래픽 노블 작가로 안정적인 커리어를 걷고 있는 남자다. 그의 주변 인물은 전부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고, 남자 역시 아이와 가족을 원한다.


율리에

 율리에는 직업도 없고, 악셀과 미래를 그릴 상황도 아니다. 심지어 율리에는 자신이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는지 아닌지 모른다. '그냥 나중에 가지고 싶어하지 않을까?'정도의 생각이나 할 뿐이다. 명확한 인생의 방향이 없는 율리에는 자신이 마치 실패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이 정말 최악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율리에는 악셀의 죽음, 에이빈드와의 이별, 임신과 유산을 겪으며 스스로를 정립해나간다. 마침내 직업도 얻고 안정적인 상황이 된 율리에 앞에 나타난 에이빈드와 그의 작은 가족의 등장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볼거리를 단져준다.


 젊은 시절의 풋사랑이 지나가고 몇번의 반복되는 사랑을 경험하다보면 결국 연인 관계라는 것도 하나의 인간관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육체적 관계가 포함된다는 측면에서 여타 관계와는 다른 특별한 관계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 관계는 인간 관계일 뿐이다. 감정을 공유하고 미래를 이야기하고 서로 살아온 발자취를 살펴보다보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결국은 타인이며 서로의 조건이 맞지 않다면 그 인연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율리에는 악셀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했지만 그와 사귀는 동안 아이를 만들고 가족이 되는 것을 원치는 않았다. 에이빈드라는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을 때 율리에는 가족이나 아이를 만드는 것에 대한 생각은 떨쳐버릴 수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임신을 한다. 에이빈드는 율리에와 가족이 되기를 원했지만 율리에는 에이빈드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인생의 시간대마다 각자 원하는 것들이 시시각각 변해가면서 서로의 인생이 맞물렸다 멀어졌다 반복한다. 악셀이 아이를 원할 때 율리에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에이빈드와 사귈 땐 의도치 않게 아이가 생기고, 율리에가 안정을 이루었을 땐 에이빈드는 이미 다른 사람과 가족을 꾸린 뒤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의미는 어쩌면 사랑하는 상대에게 내가 원하는 조건을 들이미는 상황, 즉 내가 꿈꾸는 사랑의 미래가 우선시 된 나머지 상대가 꿈꾸는 사랑의 미래가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니 때때로 사랑은 타인을 향한 강요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총 평점 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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