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의 보속
목발이란 걸 겨드랑에 끼고 집을 나서며 여러가지 생각이 스쳤다. 우선 손자와의 놀이가 너무 과격했다는 반성부터 들었다.
둘이 기다란 소파에 마주 보고 누워 발차기를 했다. 처음엔 그저 놀이 삼아 살살 상대해 주었다. 재미있어 깔깔대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점점 발차기가 세졌다. 마침내 손자로부터 날아온 결정적인 한 방이 내 왼쪽 발을 때리면서 사달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다섯 살 사내아이의 뼈와 칠십 할머니의 뼈가 부딪혀 누가 손해를 볼 것 같은가. 그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다치더라도 손자가 다칠 줄 알았지, 결과는 정반대였다. 딱딱한 뼈와 새로운 조직이 연하고 치밀한 뼈 대결의 결과 오래된 뼈의 판정패였다. 손자와 무슨 승부차기를 한 것도 아닌데, 아이가 다쳤으면 어쩔 뻔했나 아찔했다.
왼쪽 두 번째 발가락이 빨개지더니 차츰 보랏빛으로 변해갔다. 그래도 걷는데 큰 불편이 없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색이 더 짙어지는 것 같아 사진을 찍어 딸에게 보냈다. 병원에 가보라는 딸의 성화에 집 근처 정형외과를 찾았다. 통증도 붓기도 없던 터라, 뼈에 금이 갔는지 확인해 보려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X-ray를 성한 발까지 합해 열 장이나 찍었다. 2주간 깁스를 하라는 의사의 말에 나는 과잉 진료라며 속단했다. 다음 날 다시 오라는 말도 무시했다. 이틀치 약을 먹고 연고를 바르자 나아지는 듯했다.
나는 의사의 말을 다 믿어서는 안 된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과잉 진료에 관해 열변을 토했다. 살면서 의사 말을 안 듣고도 더 좋았던 경험이 몇 번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실증 사례처럼 꺼내 들었다. 남편은 내 말을 수긍하는 듯 들었다. 의사 말이라면 의심없이 따르는 태도를 비꼬듯 말했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여수에 함께 갈 수 있다는 사실만 기뻐하는 눈치였다.
나는 여수에 가서도 깁스를 했더라면 어찌 왔겠느냐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내가 온다고 하여 바쁜 와중에도 참석했다는 지인의 성의가 고마웠다. 전세 버스로 이동하긴 했지만, 걷는 일은 점점 힘들어졌다. 향일암 해맞이는 남편만 다녀왔고, 화엄사를 한 바퀴 돌아 나올 때는 걷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동대구역에 내릴 즈음에는 남편의 걸음을 따라가지 못해 뒤에서 절룩거리며 걸어야 했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 더 큰 병원에서 왼발 사진을 네 장 찍었다. 두 번째 발가락이 골절과 어긋남이 분명했다. 두 주면 될 일을 한 달 깁스를 해야 했다. 무거운 석고 대신 테이프로 굳히는 방식이었다. 일주일 뒤 액이 나와 뼈가 붙지 않으면 철심을 박아야 할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늘 의사의 말에 내 생각을 보태 자가 처방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처음 병원에서 보이지 않던 실금이 있었을 것이다. 그 상태로 무리한 일정이 이어지며 어긋났을 가능성이 컸다. 사진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붓기와 멍을 보고 깁스를 권했을 의사의 판단을 이제는 이해한다.
몇 번의 개인적 경험으로 의료를 단정하던 태도에 이번 경험이 덧붙여졌다. 진심으로 의사에게 미안했고, 병을 키운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번 일은 나의 교만에 대한 보속이라 생각하고, 얌전히 근신하면 접착제가 뼈를 붙여줄까 조심스레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