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가입니다

by 배니할

나는 화가입니다.
지금껏 28,215장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무슨 화가요? 그렇게 많이요? 그 많은 화판은 누가 주시나요?
종종 이렇게 묻는 이들이 있지요.


나에겐 특별한 분이 계십니다.
밑그림과 재료는 그분이 주십니다. 그분은 날마다 제게 화판을 내어주시고, 그 위에 기본 밑 색을 칠해 주십니다. 계절마다 네 번씩 밑 색이 바뀌지요. 봄의 연초록, 여름의 짙은 녹음, 가을의 황금빛, 겨울의 무채색, 그 속에서 나는 나만의 색으로 그림을 덧칠해 갑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나는 하루치 화판 위에 나만의 붓질을 시작합니다. 어떤 날은 그분이 화사한 밑그림을 주셨건만, 나의 손길이 어그러져 엉망이 되어버린 날도 있고, 어떤 날은 무채색으로 가득 찬 화판 위에 뜻밖의 따스한 색감을 얹게 되기도 합니다. 날마다 주어지는 밑그림은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위에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나에게 달렸지요.


그동안 그린 그림 중 가장 마음에 남는 장면이 무엇이냐고요?


참 많습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지요. 그중에는 부모님의 초상화도 있습니다. 사진을 보며 유화로 정성껏 그린 그림인데, 그분들의 사랑과 품이 물감처럼 녹아들어 있습니다. 처녀 시절, 야외로 나가 산과 들을 그렸던 그림도 떠오르네요. 바람 냄새와 햇살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합니다.


그것 말고 진짜 그림말이에요.


아, 예~
물론 진짜 ‘그림’이 아닌, 인생의 장면들 말이지요.


약혼식 날, 결혼식 날의 그림도 어제 그린 것 같이 또렷이 생각납니다.


첫아들을 낳던 날의 그림은 더 또렷 합니다. 특히 아들을 낳던 날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지요. 하혈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날, 병상 위에서 창백한 얼굴로 피 주사를 맞고 있는 모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 그때 그림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는데…. 살아남은 것도, 그리고 지금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지요.


반대로 가슴 벅찬 그림도 있습니다. 우물 안을 벗어나 세상을 향해 날아올랐던 날들입니다. 그동안 살던 삶의 테두리를 넘어서, 처음 마주한 넓은 세상, 구름 아래 펼쳐진 산과 바다와 사막,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드넓은 땅.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그 위를 날았습니다. 그 그림을 꺼내보면, 지금도 마음이 환해지고 커집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그림이었지요.


항상 기쁘고 감사하기만 했느냐고요?
그럴 수만은 없었지요.


어떤 그림은 몹시 무겁고 칙칙했습니다. 한없이 힘겹고 슬픈 날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림이 있었기에 내 삶은 더 깊어졌고, 나는 비로소, ‘철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날들 덕분에 내 그림의 완성도가 높아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 돌아보면, 내 삶의 그림 중 어느 한 장면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어느 하나 허투루 그린 적도, 쓸모없는 그림도 없었거든요. 모두가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내 인생의 귀한 작품입니다.


나는 오늘도 새로운 화판 앞에 섭니다.
그분이 주시는 밑그림 위에 또 하루의 붓질을 추가합니다.
내일의 그림이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나는 오늘도 현역 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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