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텐스와 그림자
몇 해 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남송리를 본진으로 하는 진도 5.4 규모의 지진이 있었습니다. 이는 1978년 본격적인 지진 관측 이래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지진이었고, 총 70회의 여진이 한 달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포항 시내에 아파트가 기울어졌고, 대학교 건물의 외벽이 파손되었으며, 도로에는 파손된 차량이 즐비하게 되었습니다. 진앙지인 포항을 비롯하여 경상도, 대구, 울산, 부산 등이 피해를 입었으며 부상 등의 인명피해와 3천억 원이 넘는 재산피해를 남겼고, 학교 건물에서도 피해가 접수되어 때마침 진행될 예정이었던 전국 고3들의 대학수학능력시험 날짜가 일주일 가량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났었습니다.
저에게 부산은 생경한 도시였습니다. 부산 토박이 남자랑 결혼하는 바람에 생전 처음 남쪽 지방에 내려와 살게 된 저는 모든 것이 생경했습니다. 40년을 가족 친구들과 같이 살았던 고향을 두고 온다는 것이 이렇게 생경한 일인 줄 모르고 그저 철없이 마냥 신이 난 새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달랐던 이곳에서 바로 그 지진을 경험했습니다. 아파트 건물이 휘청거리고 땅이 요동치는 그 느낌을 작은 생명체인 내 아이를 손에 움켜쥐고 생생히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집안 물건이 떨어지거나 아파트에 어떤 문제가 생긴 부분은 없었지만, 지진과 한 달간 지속된 여진은 흡사 재난 영화의 장면들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었고, ‘만약에 집이 무너졌는데 아이들이 내 손에 닿지 않는다면?’ 등의 불안한 상상이 때때로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둘째 출산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에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은 이곳에서의 이러한 경험들은 제 안의 다양한 불안감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몇 해 전 베트남 여행 때 경험했던 월남전 때 만들어진 좁은 지하 땅굴 체험이었습니다. 그저 짧은 땅굴을 한번 통과하는 것뿐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많아서 몸을 구부려 땅속에서 토끼뜀 자세로 걸어가는 시간이 꽤 지체되어서 옴짝달싹하지 못했던 그 순간의 공포감이 떠올랐습니다. 지진과 더불어 떠오른 이러한 일련의 기억으로 인해 저는 그 시절 꽤 밤잠을 뒤척였고 여진의 공포, 재난 문자로 인한 스트레스를 한동안 꽤 겪었습니다.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없는 어린 생명들에 대한 책임감과 안타까움도 더하여.
사실 이러한 불안과 공포의 경험은 유년기 알코올 중독이었던 아빠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평상시 착하고 순한 아빠, 겨울이면 나와 남동생을 위해 따뜻한 호떡을 식지 않게 가슴에서 꺼내어주셨던 따뜻한 아빠는 술만 드시면 동네가 떠나가게 소리를 지르기도 하시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길에서 쓰러지시기도 하셨습니다. 남동생이 청소년기에 들어서는 아빠를 오히려 부축하고 집으로 데려와 달랬고, 점점 횟수가 줄더니 남동생이 성인이 되자 아빠는 집에서 아들과 반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으로 바뀌셨습니다. 예뻐하는 딸이라서 제게는 뭐라 하지도 않으시고 험하게 대하지도 않으셨지만 어린 저의 눈과 마음에는 모든 장면이 고스란히 기록되었고, 그 순간의 불안과 긴장이 온몸에 저장되었습니다.
인생은 예측하지 못한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서로 얽히고설켜 언제, 어떤 감정과 잔향을 남길 것인지는 본인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아빠로부터 경험된 불안감, 불안정 애착 유형인 엄마로부터 경험된 정서적 융합과 단절의 시간을 스스로 공부하며 자가 치유해온 긴 시간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인정 많고 따스한 남편과 내 생명보다 귀한 아이들이 주는 사랑과 안정감은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삶의 예기치 않은 순간에 마음 깊숙이 남아있던 불안감은 고개를 들고 다시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꼬마 소녀 호텐스의 그림자가 그랬던 것처럼.
호텐스는 상처 난 늑대의 다리를 싸매어 줄 만큼 따뜻하고 용감했지만, 어디를 가도 무슨 일을 해도 따라오는 자신의 그림자는 싫어하는 아이였습니다. 어느 날 호텐스는 도망갈수록, 감출수록 고약해지는 그림자를 잘라내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림자를 보고 안도합니다. 그러나 도적 떼가 집으로 찾아와 호텐스를 위협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도적 떼는 집 위쪽의 검고 낯선 형체를 보고는 허둥지둥 도망을 갔고 그것이 자신의 그림자임을 알게 됩니다. 호텐스는 이제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고 수용하며 ‘너와 나는 하나야. 그러니 제발 돌아와 줘!’라고 외치며 손을 내민다. 그리고 함께 화해의 춤을 춥니다.
그림자는 싫어할수록, 감출수록 고약해지지만, 손을 잡으면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다정한 친구이자 안내자, 더 나아가 보호자가 될 수 있습니다. 원가족이 만들어 준 불안, 일련의 사건들이 고리가 되어 떠올려진 불안, 그리고 현재 코로나 상황이 건드리고 있는 내 마음 안의 검은 그림자는 언제라도 수면 위로 올라와 다시 나를 불편하게 하고, 삶의 안정감을 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다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내게 그러한 검은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며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그때의 아빠와 엄마 또한 여전히 성장하는 과정이었고, 그들의 상처를 달랠 수 있는 그들만의 유일한 몸부림이었음을 이제는 여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이 내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가볍게 넘겨버리지 않고, 상처받은 나의 감정과 불안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마주하며 있는 그대로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때의 나를 가만히 안아줍니다. 진정되지 못했던 그 아이의 마음을 이제 내가 다가가 따뜻하게 오랫동안 보듬어 안아 줍니다. 그 어린아이가 완전히 진정될 때까지. 그 어린아이와 손을 맞잡고 춤출 수 있을 때까지.
언젠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또 그림자가 길에 드리워지는 날이 오겠지만, 오늘 내 안에 차오르는 따스한 빛을 충만히 경험했던 이 경험을 다시 떠올리며 빙긋이 미소 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무겁고 단단한 삶의 굴레를 따뜻함과 유쾌함으로 뛰어넘어 그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안아주고, 그 마음 한가운데서 또 다른 나를 만나 손잡아 줄 것입니다. 함께 하여 더 힘 있고 자유로운 나와 그림자, 우리가 되겠지요. 난 나의 영원한 친구이자 동반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