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패터슨, 김경연 역, 현암주니어
아이를 키우면서 화가 나는 순간은 무척이나 많습니다. 아직 제 몸 하나 가누기 어렵고,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서 부모는 눈치껏 아이를 살피며 허둥지둥하게 됩니다. 인간이 이리도 연약한가, 왜 인간은 이러한 철저한 무능함으로 태어나는가? 등등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됩니다. 아이의 태생적 무능함에 대한 화로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말을 알아 듣는 것 같은데도 행동이 여전하고 오히려 문제행동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볼 때면 정말 엄마들의 머리 위에는 번개가 여러 개 뜹니다.
인간에 대해, 심리에 대해, 육아에 대해 공부해 왔지만 저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노산으로 회복이 더디니 긍정적으로 반응해 줄 일도 에너지 고갈로 따뜻하게 반응하지 못하는게 일상이었습니다. ‘아.. 이게 아닌데.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어린 것은 얼마나 힘들꼬.’ 생각하면서도 때때로 스스로를 조절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난감 방에서 아이가 놀던 뒷 자리를 정리하던 저는 그만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어 던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행히 그 방에 아이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거실에서 놀고 있던 아이는 소리에 놀라 슬금슬금 장난감 방 앞으로 와 눈을 똥그랗게 뜨며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겁에 질려 저에게 오지도 못하고 서있었는데 그 눈이 너무나도 무섭고 슬픈 얼굴이었고, 저도 모르게 그냥 아이에게 달려가 둘이 부둥켜 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소리지른 엄마도 이상하고, 울고 있는 엄마도 이상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고, 저는 저 자신에게 놀라고,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물론 아이 때문에 힘이들고 언제까지 이렇게 뒤치닥거리를 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소리를 질렀지만, 사실 그 소리는 보통의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내 안에 무시무시한 괴물 한 마리가 들어있는 듯한 어마어마한 소리였습니다. 이건 아이에게 화난 것이 시발점이 되기는 했지만 내 안의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신음과 상처의 소리였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적절히 돌봄받지 못했던 내 안의 어린아이가 오랫동안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는 소리였습니다.
레베카 패터슨의 그림책 속 벨라는 아침부터 잠들기까지 불평과 짜증, 싫어, 안해! 라는 말들을 하루 종일 반복합니다.
“나 그거 못 먹어!
신발 안 신을래!
발레 싫어!
너무 뜨거워!
너무 차가워!”
부모가 들으면 너무 힘든 소리들을 하루 종일 반복합니다. 불편한 몸과 마음을 짜증과 불평의 단어들로 늘어 놓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 때문에 싫은지, 그래서 지금 감정이 어떤지, 그래서 부모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는지는 이야기 하지 못합니다. 아직 그것들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느껴지는 불편한 감정을 자세하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적절한 단어와 적절한 해결방법을 아이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전혀 알지 못해서 단지 “화가 나서 그랬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편함의 원인, 이유를 말할 능력이 없는 아이는 그냥 짜증스러움, 화라고 생각하고 표현할 뿐입니다. 그저 이 불편한 상태에 있는 나를 좀 봐주세요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불편한 상태가 저는 싫어요. 나를 다시 편안하게 만들어 주세요라는 아이의 울부짖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생존을 위한 이 울부짖음이 어떤 부모들에게는 부모를 힘들게 하려는 아이들의 고집스러움으로 읽히거나, 어떤 부모들에게는 그 울부짖음이 언젠가는 그치고 스스로 원래의 상태로 해결되리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두 가지 모두 크게 잘못된 생각들입니다.
아이는 부모를 힘들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힘듬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절한 언어, 적절한 방법이 아이에게는 아직 없으므로 짜증, 불편함, 화로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표현의 방법이 세련될 수 없어서 거칠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불편함과 짜증의 표현이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그건 아무 문제 없던 상태로의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미해결된 상태로 부정적 정서가 몸과 마음에 축척되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양육을 하면서 아이가 보인 실수보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우는 아마도 이 미해결된 상태의 부정적 정서가 아이의 문제와 함께 올라오는 경우일 것입니다. 저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대가족 살림에 바쁜 엄마로 인해 적절하게 돌봄을 받지 못했던 그때의 제가 지니게 된 해결되지 못한 부정적인 정서가 아이에 대한 분노와 함께 폭발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아이와 저는는 약간 서먹해진 관계가 되였고, 저 또한 이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실수보다 내가 과하게 표현했던 것에 대해서. 그리고는 아이에게 이 미안한 마음을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이와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저는 아이의 맑은 눈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애틋한 눈으로 보고 있는 제 아이의 사랑스러운 얼굴 앞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안하다고.. 엄마가 소리지른 것 미안하다고. 엄마를 용서해 달라고. 아이는 엄마의 이상한 행동에 어색해하는 것도 잠시, 내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그 특유의 햇빛 같은 미소로 “괜찮아요 엄마.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며 저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한 인간과 한 인간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해가고 동시에 서로를 알아가는 이 부모 자녀의 관계는 참으로 억만 겹의 인연이며 축복입니다. 부모를 통해 이해받지 못하고 다독임 받지 못했던 그 지점을 내 아이가 만져주다니 생각해보지도 못한 시간이었습니다. 고작 만 두살이 된 아이로부터 이러한 어마어마한 경험을 해보리라고는 상처 많은 저로서는 꿈도 꾸지 못했었지요. 저의 고백을 온전히 받아준 내 아이, 인격과 영혼을 지닌, 어쩜 나보다 더 영험하고, 더 순수한 저의 아이로부터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화가 나서 그랬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저의 아이를 품에 안음으로 화가 나서 그랬어!라고 아직도 말하고 있는 내 안의 아이 또한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