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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리 Oct 30. 2024

세이노는 누구인가?

리뷰




결혼 후에는 거의 십여 년 이상 쉬는 날 없이 밤늦도록 일과 공부에 몰두하면서 의류업/정보처리/컴퓨터/음향기기/유통업/무역업 등으로 자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셨다. 의류업, 정보처리, 컴퓨터, 음향기기, 유통업, 무역업 좁은 문일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분야다. 음향기기 같은 경우엔 노래 듣는 걸 좋아하는 나였지만 sky 슬라이드 핸드폰이 나왔을 때도, 블루투스 스피커가 보편화되었을 때도, 지금은 내가 갖고 있는 음향기기는 마샬 스피커가 제일 나은 스피커인데 그 이상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백화점을 돌다가 항상 전자기기나 그런 제품들은 거의 의류층보다 위층에 있던 데 음향기기 매장은 한 번도 먼저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마샬 스피커는 지금 충전 단자가 고장 나서 쓰지 못하고 있다. LG그램 노트북, 그리고 지금 모닝 중고차, 아이폰으로 노래를 듣는 게 전부다. 몇 달 전 거제도에 놀러 갔다가. 베토벤이라는 카페에 갔었다.


 거기 카페를 알고 간 건 아니었다. 외관만 보고 반해서 가자고 했고, 머물렀던 숙소랑 멀지 않아서 가자고 했다. 들어갔을 때 사장님의 취향이 확고해 보이셨다. 가격이나 브랜드는 모르지만 꽤나 예술의 전당까지는 아니었어도, 사장님만에 음향기기 전당 같았다. 거제도 놀러 가시는 분들은 한 번 가보셔도 좋을 듯하다. 요즈음 대형카페, 대형 빵집이 유명하다고 하던데 이건 나중에 상속 문제 관련해서 그렇게 키운다고도 하더라. 근데 제치고, 베토벤 카페에서 봤던 그 음향기기와 사장님의 취향, 그리고 카페에 덕지덕지 붙여진 손그림과 취향들도 좋았다. 내년 여름에도 다시 가고 싶다. 그때는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버지가 전 재산을 사기로 모두 날린 후 사망하면서 친부모를 모두 여의고 고교시절부터 생활고에 크게 시달렸다.



(* 미성년자 때부터 부모님이 안 계셨던 걸까? 사람은 누구나 작별을 한다. 해가 지면 달이 뜨는 것처럼,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것처럼, 내가 최근 방황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건. 내가 20대 2년 반 연애, 4년 반 연애를 종결 치면서 뼈저리게 느낀 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첫 연애를 하고 헤어져서 그다음 연애도 결혼할 상대가 아니면 안 만나야지. 만나면 꼭 결혼까지 가야지. 이런 생각이 있었지만 점점 연애의 종착지가 결혼이 아니구나를 느끼면서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는 아버지의 말이 무슨 말인지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까지 가진 못했는데 이제는 머리와 마음이 다 아는 지점이 왔다. 



 결혼이 아니더래도, 내가 꼭 무언가를 달성하지 않았다 하더래도 그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이나 슬픔이나 분노나 즐거움이 전부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지금은 매일같이 입금되는 24시간의 시간이 아까울 때도 있고, 모자를 때도 있다. 그래서 하루를 매일같이 의미 있게 거창하게 보내기는 어려워도 즐길 줄 알아버려서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다.



 나는 태어나서 가장 힘든 시기가 언제였냐고 묻는 다면 0.1초 망설임도 없이 2012년도라고 말했다. 그땐, 내가 대학교 첫 자퇴를 했을 때였다. 사춘기 없이, 큰 일탈 없이 지냈던 내가 첫 일탈이 뭐냐고 묻는다면 대학교 자퇴였다. 그래서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 스무 살에 당연히 대학교 1학년 새내기를 해야 하는 그 시절에 나는 엄마가 유방암에 세상을 떠나는 줄 알았고, 그때 그 대학교에서는 똥군기에 스펙트럼이 넓은 친구들을 다 소화해 내기가 나는 힘들었다. 물론, 한 학기 다니면서도 재밌게 지냈다 개그동아리에 가입을 하고, 대학 친구들과 앞니가 빠질 정도로 술을 먹고, 10학번 얼굴 좀 이쁘다는 언니들한테 새벽에 갑분 불려 나가서 기합도 받고,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렇게 신입환영회 때 술을 재밌게 마셔놓고도 왜 갑자기 뭐에 삔또가 상했는지 잘 자고 있는 애들을 집합시켜서 관등성명을 대게 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때 나는 갈색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나와 비슷한 코트를 입은 여학우가 10학번 언니의 심기를 건드렸나? 뭐 술자리에서 왜 그랬냐고, 그게 기분이 나빠서 새벽 2-3시에 남자애든 여자애들이고 싹 다 불러서 무릎을 꿇친다.


 거기는 안성인데 막차도 끊겨서 20살이면 다들 성인이어도 부모님들이 걱정한다. 그래서 벌벌 떨던 애들도 있었고, 목소리도 아기 같은 애들이었는데 또 목소리 가지고 트집 잡는 샹년 같은 선배들도 있었다. 병신 같은 년. 하여간 여자들의 적은 여자라는 게 나도 여자지만 진짜 여자들아 정신 좀 차리자. 여간 고추들보다 피곤한 게 아. 지금 글을 쓰면서도 PTSD 왔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 선배는 뭐 옷가게를 페이스북에 홍보를 하고 그랬는데 얼굴이 이쁘장 하니 옷가게를 하든 뭐를 하든 그 05학번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서 춥파춥스를 쪽쪽 빨면서 "너네 오늘 앰뷸런스 타볼래?" 나는 이 말에 되게 꽂혔는데 그 대학교 장기자랑 무대인가? 그날 비도 가랑비처럼 부슬부슬 우산 쓰기도 뭐 하고 안 쓰기도 뭐 한 그런 날씨였다.



 그런 날씨에서 90도로 인사를 왜 안 하냐며, 얼차려를 주던.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그때 기안 84 복학왕? 만화가 연재되던 시절인가 어차피 인서울권 아니면 모든 대학교가 다 이 지랄이겠구나. 대학교 학비가 한 두 푼도 아닌데 이 지랄하려고 부모님 고생하는 돈이 다 꼬라박히나 싶었다. 그래서 자퇴를 해야 할 것 같았고, 근데 뭐 지도교수라는 새끼는 그냥 전형적인 교수스타일, 부교수님이 진정한 교수님이셨다. 아직도 내 카톡 목록에 있고, 그 기억에는 중간고사 시험 때도 개개인 집에 친히 우편 편지를 부쳐주셨다. 그 내용엔 처음 시작하는 대학생활 잘 다닐 수 있도록 부모님들의 격려와 응원, 그리고 학업에 잘 집중할 수 있도록 뭐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천안 봉명초를 나왔는데 으레 담임선생님들은 방학이 되면 학급 반 친구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주던 선생님이 기억이 난다. 제주도가 고향이셨던 김현주 선생님이시다. 6학년 때 담임이셨고, 의외로 내가 악력이 좋아서 안마를 자주 해드리곤 했는데 그 담임 선생님도 여름방학, 겨울방학에 일일이 반 친구들에게 곰돌이 푸, 이쁜 편지지를 사서 정성 어리게 편지를 써주셨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도 추억박스 보관함이 있었는데 그게 사라졌다. 거기에 있었는데, 거기엔 내가 초등학교 때까지는 모태신앙이라 성당도 꼬박꼬박 하면서 전례부 단장도 했었다. 그때 나를 지도해 주시던 여자 선생님도 곰돌이 인형과 쪽지를 써주셨는데 그 쪽지도 보관함에 있었는데. 그 내용엔 고학년 전례부에서 나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고, 항상 잘해줘서 고맙다고. 원래 선물 안 하는 성격인데 몰래 선물한다고 주셨던 쪽지와 인형이 있었다.



 근데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처럼 내 나름에 보관을 한다고 침대 밑에 항상 꼭꼭 숨겼는데 이사를 하도 다녀셔 인지 사라졌다. 그래서 겨우 건진 것들은 여전히 내 방 이케아 3단 서랍에 보관되어 있다. 누구는 별생각 없이 적은 쪽지나 편지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잊히더라도 이렇게 보관해 두고 가끔씩 읽어보면 그때의 그 기억이 나면서 실제 만나는 횟수는 없더라도 마음속엔 다 간직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시절인연이라고 하지만 나한테는 마음에 인연들이다. 모두를 다 끌어안고 갈 수가 없다. 그런 삶을 살고 싶지도 않다.)

   



그 자산을 외환투자 부동산 경매 주식 등으로 증대시켰고 학연, 혈연, 지연, 정치적 배경 없이 홀로 현재의 자산을 이룩했다.



(* 세이노 선생님의 시드머니 기반은 의류업/정보처리/컴퓨터/음향기기/유통업/무역업으로 쌓은 다음에 외환투자, 부동산, 경매, 주식으로 증대를 시켰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과정에서 학연, 혈연, 지연, 정치적 배경 없이라는 것에 밑줄 별표 1000억 개를 드리고 싶다.



 나는 정신건강사회복지사로 시드머니를 만들어왔다. 그래봤자 겨우 5천 언저리 안 되는 금액이다. 나이도 이제 30 초반을 넘기고 중반이 되어간다. 그런 와중에 나는 또 휴식기, 꼴에 안식년이라고 쉬고 있다. 2025년 3월부터 복귀를 할 예정인데 그 분야로 복귀를 할지 다른 일로 빠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모른다. 그 상황에 가서 내가 생각했을 때 가장 나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소개받았던 남성 중에 그런 질문을 던진 남자가 있었다.  부모님한테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는 성격이냐고, 워딩은 이렇게는 아니었어도 묻는 질문의 의도는 딱 저거였다. 부모님한테 일일이 다 물어보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다. 나이가 몇 갠데 다 물어보냐, 그리고 물어본다 한들 결정은 내가 한다. 조언은 구하지만 결국 내 성격상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개썅 마이웨이와 한다고 하면 하는 성격(?) 이라고들 하던데, 그러니 내 친구가 너는 난년이다. 아무리 말해줘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거 왜 물어보냐고 그랬다. 나는 난년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타인들이 보는 내 모습과,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이렇게나 다르다. 근데 웃긴 게 타인의 모습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과 그냥 내가 생각하는 그 모습에 살아가는 사람을 놓고 보면 누가 더 행복할까 누가 더 본인이 원하는 삶을 살아서 가는 걸까? 정답은 없겠지만 또 균형이 중요하다고 하겠지만 나는 이럴 땐 우유부단한 대답이 아니라 명확하게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대로 사는 게 더 낫다고 말한다.



 아무튼 나는 다시 말하지만 부자에 대한 동경은 없고, 바보를 면하기 위해 세이노 책을 읽고 리뷰를 쓰고, 그리고 리뷰 쓰고 끝이 아니라, 책에 나오는 내용들을 내 인생에 대입해서 살아가고 있다. 근데 확실히 어제보다, 1달 전보다는 내 삶은 달라지고 있다. 아무리 이 책이 발간된 지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세이노 미니미들이 1000명 이상 안 나오거나, 발굴이 안되거나 하는 이유들은 책만 읽고 끝. 적용을 안 해서 그렇지. 근데 또 웃긴 게 내가 이 책을 접하게 된 이유는 유튜브 영상 댓글에 이 책을 읽고 삶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냥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무료배포 다운로드하여서 읽어 내려간 게 시작이었다.



 첫 지문부터 군더더기 없는 그리고 솔직한 거 그리고 학문적이지도 않고 전혀 살아가면서 듣도 보도 못한 내용들이 무료로 읽을 수 있다는 게 내 입문 계기였다.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 이 책도 좋아했던 게 군더더기 없이 필터링 없는 문체가 내 성격하고 비슷해서 좋아했다. 시간이 지나서 화장실에 책을 들고 가서 읽었을 땐 다르게 와닿았지만.)



 (* 아, 그래서 시드 머니 -> 자산증대 이 루트 중에 학연, 지연, 혈연, 정치적 배경 없이 1000억을 만든 사람은 세이노 선생님뿐일까? 싶기도 한데 유일할 것 같기도 하다. 원래부터 부자 자녀들 제외하고는 말이다.)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의 아시아 지역 부사장직도 겸임하였고 사업상 70여 개국을 여행했다. 국내에서 경영하였던 회사들은 수출탑과 산업훈장을 받았으며, 인재경영대상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 이런 과정을 밟기까지 얼마나 혼을 갈아 넣으셨을까? 나중 가면 그 경지에 오르면 어떤 눈을 갖고 계시는 걸까? 책 내용 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부자들 앞에서 기웃거리지 말라고, 근데 웃긴 게 누가 부자인지 거지인지에 대한 구분조차 어려운 사람은 기웃거리기 싫어도 그걸 어떻게 감별할까? 싶기도 하다. 부자들이 따로 모이는 곳, 안 가는 곳 지독하게 나눠져 있기도 할까? 아, 물론 비싼 호텔 비싼 음식점 이런 데는 부자만 가니까? 근데 부자 아닌 사람들도 분위기 좀 낸다고 가기도 한다. 그래서 기웃거리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또 반대로 부자들은 거지들을 구분하는 눈이 있나? 거지. 거지의 뜻이 명확히 뭘까 싶어서 검색을 해보니 "남에게 빌어 먹고사는 사람"이라고 되어있다.



 생각보다 그 의미 또한 되게 재수 업게 적어놨다. 남에게 빌어 먹고사는 사람. 노동은 하지 않고 빌어 먹고사는 사람은 기생충?? 명사 뜻이 두 개가 있다. 첫 번째 뜻으로는 다른 동물체에 붙어서 영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벌레, 두 번째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덧붙여서 살아가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내가 함께 일했던 동료 중에 나에게 기생해서 지내는 것 같아요.라고 말해준 동료직원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일을 할 때 내 것을 아낌없이 나눠준다. 여기서 나눠주는 건 지식을 말한다. 내가 가진 지식들을 자료들을 요청하면 나는 기꺼이 내어준다. 나는 그게 동료라고 생각했고, 자료를 나눠주는 것에 있어서 위아래가 없다. 위에서 달라고 하면 주고, 아래에서 알려달라고 하면 알려주고, 왜? 자본주의 세상에 내 거를 다 뒤집어 까면 그렇게 위아래서 내 거를 다 가져가면 너는 어떡해?라는 말들을 한다. 근데 그건 내 거지 그들께 아니다. 아무리 베끼기 고수들이 있다 해도. 결국엔 그 본연에 뼈대는 내가 만든 거라면 내 거지 뭐 그리고 나도 배워오면서 선배들이 본인 거를 내어주시기도 했고, 꾸짖음과 눈칫밥, 뭐 센스 이런 걸로 하나하나 모아 온 자료이긴 했어도 나보다는 덜 수고로웠으면 하는 마음에 기꺼이 내어주곤 한다. 다만, 내어줬다고 해서 그걸 쓰기만 하고 머리에 직접 집어넣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분노한다. 인스턴트처럼 처먹기만 하고, 그걸 머리에 집어넣지 않는다면 내가 준 의미가 없다. 내가 좋아했던 팀장님 중엔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하나를 하더라도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샌가 몸에 체득된다고 강조해 주셨다.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선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때 처음 들었다. 사람을 때리는 방망이만 알았지 무엇을 하기 위해서 방망이를 깎는 노인이 있는지도, 나는 살아가면서 사회생활하면서 수많은 선배들을 봤다곤 할 수 없지만 적지 않은 선배들을 만나 오면서 많은 걸 듣고 보고 배웠다.



 선배들이 툭툭 던지는 농담에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말씀인지 그 순간에 다 캐치하려고 곤두세운건 아니지만 집에 돌아와선 떠오르는 말들이 있다. 왜 그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 순간엔 흘려듣지만 자려고 누우면 그게 왜 어떤 의미일까? 사람은 그냥 허투루 내뱉는 말들이 없다.



 무의식 속에 나오는 말들이 있다고 우리 전문 분야에서는 말들을 하지만 사람이 24시간 무의식을 파헤치고 살지는 않으니까. 근데 시간이 지나다 보면 웃긴 게 퍼즐처럼 "아, 그래서 그 말을 하셨구나." 이해하는 지점이나 순간들이 온다. 바로바로 알아들으면 참 좋겠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는 거. 그래서 나도 후배들에게 좋은 말을 아무리 해줘도 후배가 알아듣지 못해도. 이해하는 아량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닌지라 아쉬울 때도 있다. 왜 내 마음을 몰라줄까. 근데 어쩔 수 없다. 나도 그랬다. 그러니 선배들이 아쉬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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