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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노 깜짝 편지

생각은 감추고 마음은 전하고

by 쏘리

79년 12월 12일, 신군부 세력이 권력을 잡은 후(이 과정을 담은 《서울의 봄》 영화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느낀 점: 역사를 영화로만 배우고 영화 스토리를 실제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 "실제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라는 건, 세이노 어르신 입장에선 <서울의 봄> 영화 내용이 사실이 아닌 부분도 있다는 걸 말씀하시는 걸까요? 그렇다면 왜 사실이 아닌 영화를 만들게 됐을까요? 왜 사람들은 사실이 아닌 걸 사실처럼 믿고 따르고 보게 되는 걸까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할까요.


(* 저는 이때 당시 대학교 동기가 소개해준 남자분과 이 영화를 같이 봤습니다.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연애를 하면 딱히 할게 영화 보고 밥 먹고, 어디 구경 가고, 그게 전부니까요. 아무튼, 역사라는 과목을 좋아하긴 했지만 역사에 미치광이는 아니었고, 고3 담임선생님이 역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세계사도 짧게 들었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2> 책도 주셨는데.... 아무 튼요.. 이 영화를 보고 저는 내용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등장인물과 역할에 좀 더 치중해서 봤습니다.)



(* 저는 1993년 천안에서 태어났고, 봉명초, 서여중, 월봉고, 안성 동아방송예술대 1학기 다니고 자퇴 후 아산 선문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코스모스로 졸업했습니다. 1학점 (* 담당 지도교수님 사제동행을 이수 못해서 코스모스 졸업이 됐지요.) 사제동행은 pass 만하면 되는데 그게 왜 안 되었는지도 제가 따로 글에 적어는 뒀지만요. (* 한 줄 요약하자면, 지도 교수님이 엄하셔서 무서워서 못 찾아가서 졸업이 딜레이 됐습니다.)





아무튼, 저는 93년생이니 79년도에는 태어나지 않았지요. 그래서 제가 타지로 첫 입사 후 1년 간 함께 애써줘서 고맙다고 손수 책 모퉁이에 적어둔 편지만 여러 차례 읽고 책 내용은 읽으려고 몇 번 애썼지만, 책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책을 원래 좋아하던 타입도 아니었고, 또 어떤 배경과 맥락의 내용이었는지도 잘 모르니, 팀장님이 주신 편지만 읽고 죄송하지만 책 선물 감사하다고 하고 그냥 제 자취방 원룸 모퉁이에 놓여 있었을 뿐입니다.


항상 같이 출동을 나갔다 돌아오면


"정프로 아까 케이스 어떻게 생각해."

"정프로 아까 말 왜 그렇게 했어."


전화 상담을 끊으면


"목소리 기어들어가게 말하지 말고, 간결하게, 팩트만 전달해."

"항상 진정성 있게 살아야 해."


이것저것 많은 것도 물어보셨습니다.


언제는 갑자기 "오렌지가 영어 철자로 뭐지?" 물어보셨고,


저는 대략적으로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철자 하나 틀릴까 봐


검색 확인 후 알려드리기도 했는데


아마 영어테스트였을까요...?


영어 공부를 하긴 해야 하는데 파닉스부터 해야겠습니다.


대략적으로만 대충 공부했던 습관 때문인지


영어로 먹고살게 아니라고 생각을 해서 그런지.


굳이 필요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근데 다 거두절미하고, 요점은 저는 먹고살기 바빴고, 정치에 지읒자도 몰랐으며, 정치 얘기만 하는 어른들이 꼰대스럽다. 세대차이가 난다 정도로만 인지했기에 앞에서는 크게 별 말을 하지 않고 수긍하지만 돌아서면 그냥 까먹어 버리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직장을 다니고, 여러 팀장과 상사들을 만나면서 제가 훌륭했던 상사분들과 일을 했었구나를 알게 되고 그때 그 시간들이 그리워져서 연락은 드리지 못했지만 선물 주신 책이라도 끝까지 다 읽어보는 게 도리겠다 싶어서 2023년 4월 퇴사 후 처음으로 완독 하게 됩니다.


(* 훌륭하지 않았던 상사분들을 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미운 마음이야 있겠지만, 훌륭했던 사람을 더 알게 해 줄 수 있어서 그분들께도 감사의 말씀들 드리고 싶습니다.)



만나 뵌 지 오래되었고, 태어나서 전라도 광주에 한 번도 간 적이 없다가 그냥 5.18에 맞춰서 혼자 가봤습니다.

같은 대한민국 하늘아래 같은 민족이지만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습니다. 끝과 끝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나 싶었습니다.


왜 그렇게 지역감정들이 있는지를요. 인터넷 댓글로만 다들 치고받고 싸우는 사람들은 그냥 할 일 없는 또는 그냥 씹는 게 취미인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실제 현장을 가보니 댓글로 달리는 게 어느 정도 진짜 진심 들이었구나를 알게 됩니다.


저는 충청도인데 충청도는 멍청도라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왜 그런 지역감정과 싸움과 비아냥, 같은 한 민족인데 왜 그렇게 됐을까요? 다 이유가 있겠지요. 아픈 과거와 역사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태어나서 경험도 안 해봤으니 잘 가늠이 안 갑니다. 다만, 그다음 세대한테까지도 그 다툼을 그 싸움을 그 억한 감정들을 계속 대물림해야 하는지는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퇴사 후 새벽에 일어나 직장 생활하면서 만났던 쓰레기들. 인간쓰레기들은 제가 치울 수 없으니, 길거리 나뒹구는 쓰레기라도 줍자.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 이것밖에 더 있을까? 싶어서 줍다가 만난 이웃 어르신이 계십니다. 그 어르신과 아파트 경비원 어르신도 계셨고요.


저에게 자꾸 좌빨, 빨갱이라는 단어를 라이브 하게 하셨고, 공산당이 되면 안 돼! 저에게 침을 튀기며 얘기를 하셨습니다. 호롱불 키던 시절부터 지내셨던 분들이시니 젊은 제가 알리가 있나요.


근데 저도 직장 생활하다 보니, 어라? 사회생활은 해야겠고, 그러면 얼추 알아듣는 척이라도 하거나 티키타카가 되려면 어떤지를 알아야 하는데 제 생각과 제 주관과 제 가치관이 아직 정립도 안 된 상태에서 누구 말이 맞다. 누구 말이 틀리다. 분간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걸 알아야겠다 싶어서, 도대체 여/야, 좌빨 빨갱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왔는지부터 왜 그리고 양쪽 다 왜 그러는지부터. 서울 강남교보문고에 갔다가 이방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지. 어느 한쪽에 속해야지만 살아갈 수 있나 싶어서 꽤나 힘들었습니다.


회사에만 가도 어디 라인을 잘 타야 실수를 해도, 성과를 받아도, 승진을 하는 것에 있어서도 영향을 끼친다는 걸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실상 내가 다닌 직장은 깨끗하겠지. 그럴 리 없지. 싶었습니다.


저는 저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더 배울 점이 있다 생각하고, 윗분들에게도, 동료에게도 배울 점이야 많지만요.


결론은 그냥 하고자 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저도 환청이길 바랍니다.


상사의 이름은 적지 않겠습니다.


"사회주의 아니야?"라는 발언에 저는 속으로 "뭔 생뚱맞게 사회주의야. 아 왜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지. 어떻게 어느 정도로 설명을 해야 알아들으실까" 이거였습니다.


그 뒤로 미묘하게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세상 물정 모르고 해맑게 지냈던 청년 중에 하나였는데 말이지요.


단, 자살 실무를 응급실에서 하다 보니,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더라고요.


사회적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 :

보건복지부 통계 수치 보고자료 또는 환자 치료를 위한 기록을 위해서 자살원인 사유를 파악해야 합니다.


결국 관심을 가지고 보니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고,

우리나라가 왜 계속 1등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되고.


저 또한 대가리가 많이 깨졌고.


그뿐입니다.


정치인들? 결국엔 이념? 국민을 위한다? 가증스러워서


운전하다가 보이는 정치인 현수막들도 죄다 찢고 싶은 심정이지만


제가 세상을 다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땐


제가 아무리 노발대발 떠들어대고 글을 싸지른다 해도.


귓등으로도 들리지도. 변화되지도 않겠구나를 알았을 땐.


나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나를 알아버렸을 땐.


왜 살아야 하나 싶더라고요.


왜 열심히 일을 했었나 싶더라고요.


어차피 지사제로 때려 막으면 그만이지.

그만 먹어야 하는 데, 건강한 걸 먹어야 하는데


이상한 오만가지를 먹고, 약으로 땜빵을 하니.


평생에 지사제를 달고 살아야 할 인생이라면


왜 살아야 할까.


보기 좋은 슬로건들, 보기 좋은 멘트들. 아무튼 그렇습니다..)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곧 이어서 광주에서 비극적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때 대학생으로서 데모를 많이 했던 친구 H가 몰래 광주로 내려가기 전, 내가 살던 차고에 잠시 들렀다. 약 1주일 후, 그는 서울로 돌아와 직접 목격한 광경을 내게 들려주었다. 얼마 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책의 불법 복사본을 황석영이 썼다고 해서 읽어보기도 했는데, 내가 들었던 내용과는 좀 달랐고, 나중에 그 책이 이름만 빌려주었던 것임을 알고는 기분이 떨떠름했다.)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이 책은 또 어떤 내용일까요. 제목만 놓고 봤을 땐, 죽음이 난무하고 시대가 어둠으로 지배된 건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근데 결론은 들었던 내용과는 달랐고, 그 책 이름만 도용을 했다는 걸까요? 왜 그 H 친구는 그런 행위를 했을까요?)






계엄하에 머리가 장발이거나 복장이 불량하기만 하여도 삼청교육대로 끌려간다는 공포가 젊은 세대에 퍼져 있던 와중에, 1981년 3월, 간접선거를 통해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 시작된다. 그 당시 나는 여전히 차고에서 계속 살면서 머리도 짧게 깎고 다녔다.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친구 H와는 달리 계속 무관심한 채 공부와 경제적 자립에만 몰두하고 있었지만, “세상이 참 암울하는구나”라는 생각은 떨치지 못하였다.


(* 지금도 그런 상황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양극화, 아노미는 여전히 그리고 빠르게, 자살 최전방에 있다 보니 사회 전반적으로 온갖 부정적인 상황들을 1년밖에 느끼지 못했는데도, 그랬습니다. 누구는 그러더라고요. 너무 몰입하지 말라고. 근데 정신건강사회복지사 직원들 중에 일을 대충 하는 사람 즉, 그냥 돈벌이 먹고살려고 하는 사람은 알아서 몰입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냥 표면적으로 환자들을 대할 뿐이죠. 같이 일했던 사람들 중에 정신건강사회복지사를 왜 할까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 : 환자를 사람으로,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진심으로 회복을 바라지 않고, 정신병자 미친놈이라고 거리를 두는, 그리고 그들보다 더 위의 에 있다는 선배들을 여럿 봤습니다. 실상 그 선배들 삶을 들여다보니 더 별 볼 일 없고 겉가죽만 폼생폼사에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압니다.))

이미 소설가의 꿈은 버렸던 시절이었으나, 매년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모아 놓은 작품집이 발간되면 계속 구입하여 읽곤 하였다. 그런데 1983년도 작품집을 읽었을 때는, 혹시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내가 무심코 버릴까 봐 책 표지에 “버리지 말 것”이라고 써 놓았고, 그 덕분에 40년 넘게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 세이노 어르신의 글씨체를 보다니요. ㅋㅋ! 제가 버리지 말 것이라고 적고 싶은 것엔 세이노 가르침 책을 적어두고 싶습니다. 알량 방귀 뀌는 것은 아니고. 진심입니다. 정말 위선자 같은 어른이 아니라, 학연 혈연 지연을 제치고 어른 다운 어른이 없을까? 1000억 자산이 중요한 게 아니고. 위로 올라갈수록 그런 사람들만 남아서 득실대는 이 대한민국에 말이지요.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이 물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땐 참 그동안 학교에서 배우고, 좋은 말만 늘어놨던 어른들이 뭔가 싶었습니다.)






신춘문예 1983년 작품집. 표지 위 ‘버리지 말 것!’은 당시 세이노의 메모





왜 그랬을까?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김백겸 시인의 ‘기상예보’라는 시가 실려 있기 때문인데, 나는 그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보다 겨우 두 살 많은 시인이 쓴 이 시에서 느꼈던 전율을 여전히 종종 느낀다.

(* 저는 <좋아 좋아-일기예보> 노래를 좋아합니다. 이 노래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잘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참 많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시내버스를 기다리거나, 봉사활동을 하러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가려고 걸어가거나, 늘 mp3를 귀에 꽂고 살았으니까요. 안 들었던 노래가 없을 정도입니다.)

(* 기상예보라 하니 그냥 갑자기 떠올라서 적습니다. 제가 좀 생뚱맞기도 합니다. ENFP 뇌구조 한 번 보시겠어요? 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 참 저 같아서 웃겨서 저장했습니다. 제 머릿속은 이렇습니다.)




기상예보(氣象豫報)/ 김백겸(金伯謙)


하늘 흐리고 안개 낀 숲엔 우울이 내려와 있음


(* 표정은 흐리고 안개 낀 상황엔 답답함이 내려와 있음)


구름에 갇힌 빛살들


(* 생각에 갇힌 빛살들)


허공에 날개 자국을 긋고 가는 멧새


(* 허공에 외치는 내 바람들은 아무런 미동도 없고)


모두 표정(表情)을 남기고 있지 아니함


(* 모두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하루를 꾸역 살아가는데)


길 잃은 고아처럼 서서 플라타너스는 적막을 날리고


(* 방향을 잃은 새처럼 이리저리 날고 싶기만 한데)


풀씨로 흩어진 슬픔은 북북동(北北東)에서 북북서(北北西)로 방향을 바꿈


(* 이리 방향을 틀어도, 저리 방향을 틀어도 내가 편히 쉴 곳은 어딜까)


폐부로 흘러드는 저기압의 음모


(* 한숨이 너무 나오니 숨을 참아버린다)


백(百) 마일 밖 한랭 전선은 풀잎들의 잠 뿌리 뽑을


(* 경계선 그 선은 왜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일까)


폭풍을 몰고 오는 중(中) 임


(* 폭풍전야 같이 고요하고 적막한 이 상황)



지금은 모든 사랑이 위험함


(* 모든 사랑이 왜 위험해야 할까.

아름다운 사랑 앞에 왜 우리는 위험해야 할까)


외투를 걸친 우리의 꿈


(* 우리의 꿈은 누구 하나 다치지 않는 것)


방독면(防毒面)을 쓴 채 큰길로만 다님


(* 나뒹구는 먼지들 마시기가 싫어서 마스크를 껴도 답답하고

벗어도 답답하고. 참 뭣 같은 세상이 되어버렸다. )


골목마다 비수(匕首)를 품고 매복한 어둠
시간들의 휘파람이 대꼬챙이로 눈 찔러 오는 저녁


(*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고 불지 말라던 어른들 말씀

지금은 휘파람 불일도 없고 불리지도 않는다)


지금은 모든 생각이 위험함


(* 내 생각을 왜 궁금해할까?

타인의 생각을 왜 궁금해야 할까?


내가 하자는 대로 하지도 않을 거면서

내가 말하는 대로 해주지도 않을 거면서


결국 생각이라는 건, 그 사람의 가치관, 성향이라는 것.


사람 생각은 시시때때로 바뀌는데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시간을 보내고

어떤 것을 접하고 어떤 것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에 따라서


위험하기도, 안전하기도 하다는 걸)



문(門) 닫고 굳게 빗장을 지른 거리의 불빛
창 틈을 엿보는 소문과 함께
얼굴 까맣게 죽는 지금은

모든 그리움이 위험함


(* 나이가 들어가니 느껴지는 것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를 염두하는 사람들.


선의를 그냥 선의로 보지 않고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도대체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는 걸까?

그래서 아니라고 말을 해도 믿지 않는 사람들.


나만 생각에 갇힌 게 아니라

갇힌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접하다 보니


나도 갇혀버리게 됐다는 걸 깨닫곤


오히려 좋아해야 할까.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과 섞이지 않을 수 있으니?)



찬비가 내림


(* 마음에 찬비가 내림 사람의 진심이란 왜곡되기 이리도 쉬운 거였나)


우산을 들고 사람들은 사람을 비껴감


(* 우산을 들고 아무도 스쳐가지 않는 곳에서 온전한 빗소리를 들으며 걷고 싶다)


낯선 총을 멘 겨울의 척후병이 요소요소 서 있고
바이칼 호수를 지나 시베리아 삼림(森林)을 막 빠져나온


(* 총, 꼭 총이 아니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총만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버린 나이가 되어버렸다)


러시아의 절망도 보임
공중엔 바람의 채찍 가득해


(* 얼마나 더 거센 바람들을 마주해야

단단해질 수 있을까.

이미 충분히 단단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또 다른 바람들이 불어온다.


하지만 안다.

이제는 안다.


바람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는 걸)



두려움에 야윈 나목(裸木)들의 어깨 더욱 가늘고
겨울잠에 젖어 봄날을 꿈꾸는 개나리 새눈


(* 사계절이 있는 대한민국이 형형색색

다양한 매력을 갖고 있는 대한민국이


다음 세대

다음 어린 친구들이


조금은 더 뚜렷한 사계절을 겪었으면 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보잘것없는 작은 행동 하나가

나비효과처럼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소롯이 숨결에 싸여
한 개비 성냥으로 남겨 논 최후의 불꽃임.

(* 최후의 불꽃, 최후의 보루.


내가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우리가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아닌 우리 네가 아닌 내가 솔선수범해서


최후의 보루가 되어 볼까.)


시인이 이 시를 썼을 1982년에는 무슨 일들이 이 땅에서 있었기에, 그 시인과 같은 시대를 살던 내가 전율마저 느꼈을까? 전두환의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만취한 순경이 카빈 총기를 난사하여 62명이 죽고 33명이 부상당한 사건도 있었고, 군용 수송기가 2번이나 추락하여 각 사고마다 군인이 많이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했으나 (각 사고마다 53명씩 사망하였다) 언론 보도 검열 때문에 단신으로만 쉬쉬 알려졌고, 미국은 “한국에서 물러가라” 고 하면서 발생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최초의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2년 전 광주에서 있었는데, 그 이후의 여러 미문화원 사건들의 시발점이 되었다)도 있었고, 그 당시에는 무려 7,000억 원 (그해 정부 예산이 95,781억 원이었다) 규모의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사건도 있었다.


(* 과거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골치 아픈 일들은 비일비재할 것이다. 그 사이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나는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하루 종일 생각에 잠길 순 없지만, 그럼에도 한 번쯤은 생각을 갖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시절이 하 수상할 때마다 이 시를 다시 읽었다. 요즘 뭐가 뭔지 모르게 굴러가는 세상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정확하게 판가름하기 힘들어서 또 읽었기에 이 글을 쓰는 중이다.


(* "보지도 않고 믿는 자가 복된 자"라고 아버지가 지하 주차장에서 나와 종교적 믿음 관련해서 언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당시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마주해서 나는 자기 전 늘 총알기도를 했는데, 그 총알기도 내용은 (오늘은 우리 아빠가 술을 안 드셨으면 좋겠어요.) 이 기도뿐이었다. 하느님은 견딜 만큼의 시련만 주신다고 했는데 어린 나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는지, 매일같이 성당에 나가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전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도를 했다. 하지만 내 기도는 꽤나 늦게 들어주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힘들 때만 하느님을 찾는 것 같아서 죄송하기도 했다. 참, 어렸던 내가 순수했던 내가.


이제는 알아버렸다.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고.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기도는 들어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기도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꼭 성당에 나가야지만, 꼭 절에 가야지만, 꼭 같은 종교인을 만나서 무언가를 해야지만 성스러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소가 어디가 됐든, 내가 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것이다.)


(* 종교에 대해서도 아주 적나라게 쓴 글이 있는데 생략하겠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내가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지 밝히기만 하여도, 진실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하기만 하여도 극좌, 극우 둘 중 하나의 딱지가 붙여지기에 “모두 표정을 남기고 있지 아니함” 아닌가.


(* 하루에 세 번은 웃고 싶어서, 무표정한 사람들을 보면 웃으라고 던지는 내 말들은 진심인데, 웃을 일이 없다고? 그냥 웃으면 미친것 같다고? 미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웃는 것이 중요한 것을 왜 모를까? 비즈니스적 웃음이든, 진짜 행복해서 웃는 것이든, 뭐든 간에 웃음이 사라진 이 상황이. 진짜 웃길 뿐이다.)


내면의 표정이 없는 상황에서 무슨 사랑이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은 모든 사랑이 위험” 하다. 논의나 설명은 사라지고 각자의 주장과 격앙된 목소리의 결론만 가득하여 우리는 “우리의 꿈” 이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려고 “외투를” 걸치고 “방독면을 쓴 채” 로 아무도 알아볼 일이 없을 “큰길로만” 다니지 않는가.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드러냈다가는 “골목”에 숨어 있던 “어둠” 의 “비수”에 찔릴 테니까 “지금은 모든 생각이 위험함”이 맞다. 그러니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들이 지금 나와 생각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모든 그리움도 위험” 해지고 만다. 내 품 안에 들어올 반경을 우산으로 막은 채 시베리아 찬바람 속을 헤매다 보니 저절로 움츠러져 “어깨 더욱 가늘고”…. 그렇지만 “개나리 새눈” 이 “한 개비 성냥” 으로 그어져서 “최후의 불꽃”을 피우게 된다는 말에 아주 조금이지만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 참 좋았던 사이들이 왜 정치판 때문에 금이 가야 할까. 처음엔 하나하나 뜯어서 알아볼까 했다가 지랄발광들을 하는구나 싶어서 관뒀다. 진짜로 국민들을 위한다고? 진짜로? 정치인 이 개새끼들아. 지금 대통령도 그다음 대통령도 그 대통령 측근들 또한 똑같다. 직업이다. 직업이면 그 자리에 맞게 책임을 지고,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고, 짱구를 굴리지 말아라. 다시 말하지만 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건 국민이다.


갑, 을, 병, 정. 평생이 픽스된 게 아니고


갑은 을병보다 정을 챙겨주면 된다.

그러면 을병은 알아서 갑을 세워준다.


갑은 갑이라고 갑질만 할게 아니라

정을 살펴라. 정을)




시 속에 쉼표조차 없이 오직 맨 마지막에만 마침표 하나가 있는 이 시를 읽는 독자들 역시, 이 시에 작은 공감이라도 느끼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위에서 한문을 표기한 부분은 본래 한문으로만 표기된 단어들이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신춘문예 1983년 작품집 속 김백겸 시인의 ‘기상예보’





추신: ① 2024년, 김백겸 시인이 그동안 발표한 시 중에서 남기고 싶은 시들을 모아 《커피와 사약: 김백겸 시선집》을 발표했다. 이 시집에 실린 ‘기상예보’에는 한문이 없으며, 일부 표현이 조금 더 친절하게, 이를테면 마지막 단어 ‘불꽃’은 ‘불꽃임’으로 바뀌었다.



② ‘외투를 걸친 우리의 꿈’에서 그 시절에 내가 미 8군 부대 안 대학을 다닐 때, 염색한 미군 잠바를 입고 다녔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현재까지 살아오면서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을 때마다 그 잠바를 다시 꺼내 입곤 했는데 이번에 세탁소에 맡겨 깨끗이 세탁한 후 데이원 출판사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처박혀 왔다가 쓰레기통에 들어가곤 했던 각종 감사패, 상패들 중 남아 있는 것들을 찾아내 프라이버시가 드러나는 글자들은 전동커터기로 모두 지우고 미군 잠바와 함께 주었다. 최근 이사를 한 출판사에 좀 괴이한 장식품이 될 듯싶다(나는 사무실이건 집이건 그런 것들을 진열한 적이 없다. 나에게 상을 줄 수 있는 자는 나뿐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추신 : 책을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엔 너무 아쉬워서 어떡할까 싶어서 한 장 한 장 뜯어보다가 지금은 못 참겠어서 속도를 내서 읽고 있습니다.


제가 한 참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격이 없이 나온 표현들 또한 귀엽게 봐주신다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고?


지금은 태어나주셔서 감사드리고, 책을 남겨주셔서 더더욱 더 감사드리고. 그 신념과 가치관이 변하지 않고 마지막 날까지도 젊은 친구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해주셨으면 해요. 실제 뵐 리도, 뵐 기회도 없겠지만요. 뵌다고 한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순대국밥에 소주 석 잔 마시고, 헤어질 때도 뻘쭘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상상은 해봤는데요.


약간의 기대와 상상이 있는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요. 담배를 피우신다고 하셨는데, 흡연은 줄이시고, 운동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이 짧지만 또 그리 짧지도 않은 인생 조금은 더 건강하시고, 소중한 하루를 누리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글을 올립니다.


정소연 올림.






편집자주) 세이노의 깜짝 편지 14호에 실린 시 '기상예보'는 시인 김백겸 선생님께 게재 허락을 구하였습니다. 원래 '불꽃임'으로 쓰셨으나, 당시 신문사의 편집 실수로 '불꽃'으로 게재된 사실을 알게 되었음을 밝힙니다. 흔쾌히 전문 게재를 허락해 주신 김백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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