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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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높이까지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팔 생각을 하기보다는 어깨 높이에서 파는 것이 맞다.
(* 머리 높이 꼭대기까지 올라갈 때를 기다리는 자는 추락을 기다리는 자와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조금씩 점진적으로 이만하면 됐다. 할 때 놓을 줄 도 알아야 장기전을 뛸 수 있다. 섣부른 단기간에 무언가를 이루려는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단기간에 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단기간에 이룰 수 있다고? 그 단기간에 이뤄진 것들은 금방 단기간에 사라질 솜사탕 같은 것이다. 신기루 같다고 할까)
코인, NFT는 사고 싶어 하는 사람이 계속 생겨야, 즉 앞으로도 계속 오를 것이라는 믿음이 계속 존재하여야 가치가 유지되는 것인데 그 게임의 주된 투자자들은 영끌로 표현되는 계층이고 부유층은 아니기에 가치의 급격한 추락 시점이 필연적으로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한탕주의, 영끌족들은 필연적으로 급격한 추락시점이 온다고 한다. 영끌은 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뜻이다. 영혼을 배팅한 자들은 자신의 영혼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하고 배팅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진정한 모 아니면 도인 인생들. 하지만 결과가 도가 나올 수 있음에도 모이면 땡큐고 도가 나오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생들아. 모 아니면 도는 도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때 뛰어들어야 한다. 왜 모만 나올 것이라 생각하는지.)
이미 갖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한 왕거미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나는 갸우뚱했다. 이미 갖고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게 왜 왕거미랑 같은 맥락인 걸까? 왕거미는 이미 충분한 삶을 사는 곤충 중 하나인가? 나는 보통 거미를 집에서 발견하면 죽이기보단 풀숲에 놔준다. 작은 투명한 거미일지라도. 그 중학생 때 (도덕)인가 고등학교 윤리에서 배웠던 방생 주관식을 틀렸기 때문이다. 살생, 방생. 둘 중 하나였던 건 분명한데 틀렸다. 그 뒤로 작은 생명이라도 내가 위협받으면 죽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살릴 수 있는 쪽을 택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화성시 봉담에 거주할 때 바퀴벌레가 나왔는데 봉지에 잡아다가 1층까지 내려가서 풀숲에 풀어줬다. 그걸 한창 등산 같이 타던 단톡에 올렸었다. 바퀴벌레를 잡은 것도 용하지만 그걸 또 1층까지 내려가서 풀어줬던 내가 다들 신기해했다. 만약 내가 타지로 나가지 앉았더라면 엄마를 찾으며 잡아달라 떼를 썼겠지만. 혼자살 다 보면 별의별 일을 겪고, 도와줄 사람은 없다. 바퀴벌레와 동침을 하느니 잡아다가 분리를 시켜줘야 하는 게 내 판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