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계단마다 배추잎이 굴러다니고,
이웃집 문 앞에는 절임배추 박스가 층층이 쌓인다.
찬바람 불기 전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려는 손길이
골목마다 조용히 번지는 계절.
김장이 힘든 이유만 있는 건 아니다.
김장 끝나고 먹는 따끈한 수육,
갓 만든 양념에 굴을 살짝 섞어
절임배추에 싸 한입 베어 물면
그 순간만큼은 김장을 잘 했다고 생각이 든다.
이건 김장할 때만 먹을 수 있는 우리 세대의 작은 보상,
그리고 세대를 이어주는 겨울의 의식 같은 맛.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다르다.
얼마 전, 갑작스러운 무릎 통증으로
걷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병원에서 MRI를 찍었고
의사는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골이 많이 닳았어요.
나이에 비해 퇴행이 빠른 편입니다."
약, 주사, 그리고 '당분간 무릎을 쓰지 말 것.'
버스를 기다리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도 요즘 무릎이 아프다고 하신다.
나와 시어머니 나이 차이는 약 30여 년.
내가 어머님의 나이가 되었을 때
제대로 걷고 있을까.
그 질문이 낯설게, 그리고 진짜로 아팠다.
시어머니는 내가 이 정도로 아픈 줄 모르신다.
아니, 본인은 더 아픈데
차마 말 못 하는 걸 수도 있다.
"네가 뭐가 아파. 아직 젊은데."
이 말, 우리 세대에겐 정말 익숙하다.
하지만 요즘 30~40대의 몸은
겉은 멀쩡한데 속은 벌써 경고등이다.
하루 종일 앉아 있고,
스마트폰으로 목이 굳고,
운동은 늘 '이번 달만 지나면' 미뤄진다.
그러다 김장철이 오면
갑자기 몇 시간씩 쪼그려 앉아
배추를 씻고 절이고 버무린다.
무릎이 멀쩡할 리가 없다.
이게 바로 우리 세대의 독박 김장.
어머님 세대와 방식은 같지만,
몸은 예전과 정말 다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의사는 쉬라는데,
현관 앞엔 배추는 쌓여만 간다.
몸보다 배추가 우선이 되는 순간.
예전엔 힘들어도 김치 냄새만 떠올리면 버틸 수 있었는데
올해는 그 여유조차 사라졌다.
'이게 마지막 김장이 될 수도 있겠다.'
그 생각이 불쑥 올라온다.
아니면 이제
절임배추 + 반조리 양념 세트로 갈아타야 하나.
요즘 친구들은 이미 그걸
"합리적인 김장"이라 부른다.
진짜로 김장을 하는 며느리는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
솔직히 안다.
우리는 부모 세대처럼
오래도록 그런 김장을 할 수 없다는 걸.
무릎도, 허리도, 체력도
이미 다른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우리 아이 세대는
'김장철'이 아니라
"겨울엔 김치 사먹는 시기"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올해,
나는 배추 앞에 다시 앉는다.
무릎에 파스를 붙이고,
진통제를 삼키고,
양념 냄새에 마음을 달래며.
이 김장이 진짜 마지막이 아니기를.
그리고 방식이 달라져도
김장에 담긴 마음만은 이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