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리커 스트리트로 와요.
첼시마켓에서 랍스터를 먹다.
첼시 마켓은 하나의 각 잡힌 쇼핑몰 같았다. 다양한 종류의 상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한국인에게 가장 유명한 것은 랍스터라고 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양질의 랍스터를 맛 볼 수 있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다른 곳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랍스터를 파는 식당으로 갔다.
여행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미 많이들 와 있었고 한국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쉑쉑버거 매장 다음으로 한국 사람들을 많이 본 장소다.
배는 커도 간이 작아서 중간 크기의 랍스터를 주문했다. 갑각류 음식을 자주 먹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런 뻑적지근한 갑각류 음식을 먹어본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 랍스터를 먹는다 하면 마음먹고 고급 레스토랑에 입장해서 각잡고 앉아 많지도 않은 먹을거리를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었는데 이곳 첼시마켓의 랍스터 가게는 수산시장 같은 분위기인데다 주문한 음식을 받아서 구석에서 잽싸게 먹는 시스템이랄까. 의자도 없는 테이블에서 서서 낼름낼름 먹는 모양새였다. 서서 랍스터다.
정말 맛집인가 보다 싶은 스타일. 하지만 웬걸. 정말이지 너무 맛있었다. 커다란 랍스터에 살이 꽉 차 있었고 입속에 쏘옥 집어 넣으니 시원한 살이 혀와 입천장에 와 닿으며 신선한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달달한 맛이 느껴지며 연한 살이 씹을 것도 없이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느낌이었다. ‘랍스터는 참 맛있는 거구나!’ 라는 인상을 절로 주며 먹고 있으면서도 아쉬우며 ‘에이 큰 거 먹을걸...가기 전에 한 번 더 먹으러 와야겠다.’라며 간이 작아 중간 크기로 시킨 게 후회가 들 정도로 맛있었다. 어련히 이런 훌륭한 음식에 맥주 한잔 곁들일 법 하지만 오후에 낮술에 한 번 크게 혼난 우리는 그냥 물과 함께 아주 아주 맛있게 먹었다.
포만감 없는 미식이 주는 행복감을 느끼며 첼시마켓을 나왔다. 오늘은 늦으막히 잠을 깨어 거리로 나가 맛있는 거 먹으면서 그저 정처 없이 돌아다닌 하루였다. 시간 아깝다 생각하며 계획에 따라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것보다 오히려 뿌듯했고 평화로웠다. 이렇게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니 여기 사는 사람 같았다. 하긴 진짜 뉴요커들은 엄청 바쁘게 산다고 들었으니 이곳에서 여유부리는 사람은 오히려 여행자들인가 보다.
느긋한 하루의 저녁은 마트에서 장을 봐 내 집 같은 남의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것으로 했다. 내가 만들 건 아니고 승연이가 만들 꺼였다. 지하철을 타고 브루클린으로 넘어와 숙소 근처에 찾아 두었던 마트로 향했다. 역시 외국에서 마트에서 장을 보는 건 또 재미가 쏠쏠하다.
큰 나라답게 음식을 큼직큼직하게 팔았다. 빵과 고기들도 큼직하니 영화나 만화에서 보던 비주얼이 한 번쯤은 먹어 보고 싶게 생겼고 과일들도 색색이 좀 더 진해 보였다.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맥주병들과 음료들, 싱싱해 보이는 야채들이 색다른 구경거리들이었다. 그 넓은 마트를 돌고 돌아 애플파이와 닭고기, 맥주 몇 병과 샐러드 종류 등을 샀다. 마트에서 나오자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평화로운 휴일의 하루가 저물어 가는 기분이었다.
많이 산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꽤 무거웠다. 뭐 들었다고 이래 무겁지...병맥주의 병무게인가 보다...병맥주는 이게 안좋아...걸어서 한참 가야하는데... 뭘 타고 갈 형편은 아닌 것 같고... 별 수 없으니 힘을 내서 낑낑 대며 숙소로 들고 갔다.
한동안의 복작거림 끝에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 닭이 구워져 나왔고 미국 느낌 물씬나는 애플파이가 놓였고 얼마 전에 알게 된 맛있는 맥주가 갖춰졌다.
“이야~ 진짜 오늘은 미국에 사는 사람 같다.”
맥주도 너무 맛있고 닭구이도 맛있었지만 두툼하고 찐득한 애플파이는 아메리칸 식감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게 잊지 못할 맛이었다. 군 복무 시절 용산에 있는 미군 부대에 일이 있어 들어가게 된 적이 있었다. 미군 부대안은 작은 미국 마을 같았다.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던 때라 미국 삘이 넘쳐 나는 거대한 산타 모형도 있었고 PX도 우리나라 부대와 달랐다. 그 중 미군 부대 안의 제과점에서 두텁고 넓찍한 체리 파이를 골라 사먹고 '와 음식먹으면서 이런 느낌은 또 처음이다. 완전 내 스타일이다.' 했었다. 오늘도 배가 불렀지만 두툼한 파이의 그 바디감과 향긋한 맛의 매력 때문에 입을 떼기가 힘들었다.
한가로운 미국의 하루를 보내고 맥주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밤에는 밖으로 나가기가 좀 그랬는데 옥상이 있어서 아주 유용하게 이용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작업 중인 것으로 생각되는 캔버스가 귀퉁이에 세워져 있었다. 옥상 바닥에 여기저기 튀어 있는 물감 흔적을 따라 발을 갖다 댔다. 저 멀리 보이는 맨하튼의 야경들과 지하철이 지나가면서 보여주는 빛의 흐름, 주변의 어둠이 섞여 더없는 낭만의 밤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맥주병을 가볍게 꺽어 한 모금을 넘겼다. 어느 루프탑 부럽지 않은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옥상에서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