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밤
정리했다. 온 기운을 다 소진한 기분으로... 내 안에 있는 모든 감동과 흥분이 머리를 뚫고 나간 듯한 기분으로... 매번 공연이 소중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우리가 처음부터 그려왔던 그림을 완성하고 갈 수 있음에 감사했고 안도했다.
“저희도 이제 그만 가볼께요.”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구세주님들이 돌아가신다고 했다.
“아 정말 너무 감사해요. 이걸 어떻게 갚아야 될지 모르겠네요. 오늘 너무너무 큰 도움을 받았어요.”
“아니예요. 저희도 너무 즐거웠어요. 사실 이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멋지네요. 저희도 용기 얻고 가요.”
“아~ 진짜 진짜 감사드려요. 담 번에는 한국에서든 여기서든 꼭 같이 술 한 잔 해요.”
“네 그래요. 정말 재밌었어요.”
“네, 또 봬요~~!”
감사에 감사에 감사를 드리고 싶었고 손을 흔드는게 아니라 정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은인들을 떠나보냈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니 한국 분인 듯 한 남자 분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우리를 보고 계셨다.
“안녕하세요. 저는 저기서 가게 하고 있어요.” 먼저 나에게 인사를 해 왔다.
“아 한국 분이시구나. 예,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노래 잘 들었어요. 한국 사람들이 여기 와서 이렇게 해주니까 진짜 반가웠어요.”
“아~ 보셨구나~ 좋게 봐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이거 저희 가게에서 파는 닭 강정인데 한 번 드셔보시라고요.”
“와~~진짜요? 감사합니다. 아~ 너무 부끄럽네요. 딱히 퀄리티가 좋지 않아서 너무 쑥스럽네요.”
“아니예요. 정말 재밌었어요. 한국 사람들이 여기 와서 공연해주니까 반갑고 뿌듯하고 기분 좋네요.”
“아 괜히 민폐인 것 같았는데 좋게 봐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하!” 멋쩍은 웃음으로 난 대답했다.
“동영상도 계속 찍었어요. ㅋㅋㅋ”
“아하하핫! 지워주세요. ㅋㅋㅋ 다시 볼 생각하니 제가 다 부끄럽네요.ㅋㅋ”
“정말 재밌게 봤어요.”
“진짜 감사합니다. 진짜 진짜!”
“암튼 너무 반가웠어요. 여기까지 와서 이러기 쉽지 않으셨을텐데... 멋졌어요!!”
“고맙습니다. 이거 저희 멤버들이랑 잘 나눠 먹을께요. 정말 잘 먹을께요. 감사합니다.”
말 할 수없이 뿌듯했다. 누군가에게 긍정의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보람으로 다가왔다.
“봤어? 야시장에 있는 닭 강정집 사장님이신데 이거 주고 가셨어. 공연 재밌게 잘 보셨다고.”
“오~~진짜? 대박이다~!”
“와 현지 한국 분이 이런 것도 주시고... 먼가 뭉클하네.”
“뭔가 표현할 수 없는 신기한 기분이야.”
“와~ 맛있어~!” 뭐든 맛있을 때였지만 진짜 맛있었다. 하나 둘 나눠 먹었다.
이제 남은 건 우리의 마지막 축제였다. 이 흥분을, 이 기운을, 이 전율을 함께 나누며 오늘 밤을 마무리 하는 일만 남았다.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악기를 챙겨 숙소로 돌아가는 길. 다행이도 일말의 아쉬움 없는 발걸음이었다.
“길 찾아보니 여기서 숙소 별로 안 머네. 슬슬 걸어가도 될 것 같은데?” 구글 지도를 보니 지하철 한 정거장도 되지 않는 곳에 우리의 숙소가 있었다.
“살살 걸어가자.”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평소보다 훨씬 높은 톤으로 말을 재잘댔다. 살아오면서 그 때 단시간에 가장 많은 말을 했던 것 같다.
두고두고 남길 인생의 진하고 커다란 추억이 완성된 밤이었다. 숙소 근처의 편의점에 들렀다. 술을 잘 하지 않는 우리들이었지만 꽤나 큰마음 먹고 맥주 6병을 사고 보드카도 한 병 샀다. 안주 삼을 만한 과자도 몇 봉지 사고 물도 샀다.
“오늘 이거 다 먹는다.” 내가 허언증에 가까운 소리를 했다.
*10PM
시계는 밤 10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다. 숙소로 들어서자마자 거실에 놓여 있는 원형 테이블에 허겁지겁 술판을 준비했다.
“이야~~~수고했다~~~멋있었다~~~최고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칭찬을 퍼붓고 서로의 공을 치하해주었다. 어울리지 않게 너무 훈훈했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과 이번 여행에 대한 크나큰 성취감에 도취된 밤이었다.
정신을 잃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다시 오지 않을, 다시 만들지 못할, 두 번 다신 느끼지 못할 최고의 밤이었다. 뚜껑이 들썩일 정도로 흥이 올라 인생 최고로 높은 톤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밤 우리 외의 것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기분으로 환장하게 마시며 떠들었다. 재영이가 새벽 2시에 먼저 귀국 비행기를 타야하는 것이 너무너무 아쉬웠다. 파티 분위기를 한껏 만들어 냈다. 줄어드는 술과 시간에 애가 탔다. 소모되어 가고 있는 이 밤이 너무나 안타깝고 애잔했다. 황진이가 노래했든 동지 섣달 기나긴 밤의 한 허리를 잘라다가 굽이굽이 펴내고 싶었다.
*(3.5) AM 12:30
어느덧 밤 12시 반....이제는 재영이가 정말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이 되어 재영이 자신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가방을 매고 문을 나섰다.
“한국에서 보자!”
“아~ 진짜 가기 싫다.”
“그러니까...남자가 가는 게 이래 서운할 줄이야.”
“근데 당장 우리도 내일 비행기야.ㅋㅋㅋ”
“진짜 간다.”
“조심해서 가! 한국에서 보자.” 나와 상민이형도 당장 내일 오후 비행기인데도 먼저 가는 사람을 보니 되게 떠나보내는 기분이 들었다.
“술 마셔서 비행기 입밴 당하는 거 아니야?ㅋㅋㅋ”
“그럼 다시 와. ㅋㅋㅋ”
“겁나 뛰어야겠다. 진짜 마지노선이야.”
“어, 갈게~!”
재영이가 떠나고 남은 사람들도 대충 자리를 정리했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큰 창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내밀어 방콕의 야경을 바라봤다. 무서우면서도 상쾌했다.
- 무사히 비행기 탐
재영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야 주취자도 비행기 태워 주는 구나
- 진짜 아슬아슬했다 엄청 뛰어옴
- 고생했다, 잘 가라
- 눈 감았다 뜨면 한국이겠네
- 이따 보자
- 그래, 내일 조심히 오고
어느 나라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특히 한국인들이 ‘마지막’이라는 말에 대한 감성이 크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특유의 정 때문인가 싶기도 한데 나 역시도 별거 아닌 것에도 ‘마지막’이라는 수식이 따르면 괜시리 특별해 보이고 짠해진다. 그 단어에 속아 왠지 다시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며 바라본 풍경은 더욱 애잔했다. 실제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을 것이다. 남은 술로 벗을 삼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술에 잔뜩 취하고 야경에 취하고 밤 공기에 취해 있었다. 이리 저리 영양가 없이 많은 생각과 감흥이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일어났다. 가져온 스피커로 음악을 틀고 있는 힘을 다해 밤의 끝을 붙잡았다. 결국 나는 모든 술을 동 냈고 어느샌가 쓰러져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