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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May 04. 2021

크고 싶어 큰 것도 아닌데 네게 그러는 내가 밉다

첫째에게 쓰는 반성문

내년에 학교에 들어갈 첫째를 생각하면 세월이 흐르는 게 화살촉보다도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갓 태어나 꼬물 거리던 모습이 눈 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데 벌써 아이는 내년에 학교에 가고 나는 학부모가 된다. 

현실인데도 꿈처럼 아득하고 믿기지가 않는다.


첫째가 일곱 살이라서 첫째에게는 자꾸 억울한 일들이 생긴다.

또 둘째가 태어나면서 첫째에게 자꾸 억울한 일들이 생긴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 말귀를 알아듣는 건 첫째라고 그래서 동생이 태어남으로써 절대 첫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수 없이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둘째가 태어나고 나니, 나는 첫째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컸다는 이유로 첫째에게 더 많은 걸 요구하고 더 많은 걸 바라고 더 많은 기대를 품는다. 그래서 아이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고 나면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후회하고 자책하며 첫째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으면서 반복하는 내가 밉다.


나는 첫째가 나 때문에 빨리 철들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부터라도 첫째를 위해 내가 달라지기 위해 이 글을 적는다.




예전에는 첫째가 어리광만 부리면 손과 발이 되어 모든 걸 해줬는데 이제는 하나씩 직접 해나가는 첫째다. 양말도 혼자서 척척 신고 옷도 골라놓으면 가끔은 혼자서도 입는다. 화장실에도 혼자 가고 시간이 촉박할 때는 차려준 밥도 스스로 잘 챙겨 먹는다.


이제 본인 것을 스스로 하는 걸 뛰어넘어 동생 기저귀를 가져다준다거나 수유쿠션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는 동생 앞에 달려가 동생을 달래주기도 한다. 우리는 첫째가 이렇게까지 동생에게 친절하고 동생을 잘 돌볼지 상상도 하지 않았다. 첫째는 작년보다 올해 더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하고 있다. 이것만 생각하면 우리 첫째는 하루 종일 칭찬을 듣고 어깨를 으쓱하고 다녀도 되는데 자꾸 혼 날일이 생기고, 사과해도 안 받아주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신경질적으로 대할 때도 있으니 그럴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속상할까.


아침 등원을 할 때 얘기다. 언제나 그렇듯 등원차량은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 시간 안에 깨워서 옷도 입히고 밥도 먹이고 이도 닦이고 가방도 싸고 또 나도 준비하려면 난 늘 바쁘고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그럴 때 아이는 더 자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내가 차려준 반찬으로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며 다른 반찬이나 요리를 요구하기도 하고, 차려준 밥을 내가 씻거나 옷을 입고 준비할 동안 조금 먹어라고 얘기하고 갔는데 손도 안대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평정심을 잃고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내버린다.


아이는 그저 신경질이나 화 짜증 없이 자신의 의사표현을 했을 뿐이었는데 나는 그걸 이해해주지 못했다. 모범적인 엄마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그래, 많이 피곤하지. 얼마나 피곤하겠어"하며 아이의 곁을 지키는 엄마이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했다가는 정말 피곤하다며 결석 얘기를 슬며시 꺼내며 유치원 가는 것에 대해 동참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차려준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당장 스파게티를 해 오라는 아이 앞에서도 나는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 있다. 스파게티를 지금은 만들 시간이 없는데 다녀와서 꼭 만들어 줄테니까 지금만 이걸 먹자 하고 다정하게 설명하며 아이를 이해시킬 수 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나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그게 아이에게 통하지 않을 때 나는 이미 씩씩 거리고 있는 것이다.


먹기 좋게 밥을 차려주고 등원 준비를 한다고 밥을 먹으라고 했는데 한 숟갈도 먹지 않았을 때도 그래, 밥 한 숟갈 덜 먹고 간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하고 유하게 그 상황을 넘기면 된다. 그런데 고작 밥 한 숟갈, 두 숟갈이 뭐라고 아이에게 밥을 왜 안 먹었냐며 다그치고 화를 낸다. 그러면서 이렇게 다 해주는 집이 있는 줄 아냐면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주는데 왜 그러냐고 아이에게 불평을 쏟아내기도 한다. 그런 내 모습이 유치하까지 하다.


우리 첫째는 가 속상해하면 미안하다고 바로 사과를 한다는 것이다. 뒤돌아서 생각해보면 나와 의견이 다르거나 내 의견을 빠르게 따라오지 못한다고 해서 대부분 내가 마음을 상해하는 건데 그 사과조차 바로 받아주지 않을 때가 있단 걸 생각하니 내 자신에게 너무 실망스럽다. 마음 상할 아이를 생각하면 슬프기까지 하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에 아이가 튜브에 든 화장품을 있는 힘껏 꾸욱 눌러서 튜브 옆구리가 터지는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첫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러면 안돼라고 말하고 그 사건을 잊어야 했다. 하지만 아이가 사과를 하고 이제 안 그러겠다고 했는데도 한참을 씩씩 거리며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냐며 아이를 다그쳤다. 아이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시간을 두고 씩씩 거릴 일은 아니었는데 아이가 반성을 하는데도 나는 어른답지 못하게 행동했다.


그래 놓고는 가기 전에 뉘우쳐서 아이에게 다녀오면 엄마가 편의점에서 하나 사줄 게라던지, 많이 사랑해 같은 말을 하는데 이미 상해버린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다. 아이는 다른 날보다 조금 풀이 죽어서 유치원 차에 오른다.


그러고 나면 나는 하루 종일 자책과 후회를 반복하며 아이가 올 동안 아이를 그리고 생각하며 기다린다.  


왜 나는 첫째보다 무려 30년 가까이를 더 살아놓고도 내 의사와 다르다고 내 의사표현을 저런 식으로 해버릴까. 첫째가 말귀를 알아들으만큼 커서 나와 대화도 하고, 첫째의 의사를 분명하게 잘 표현하는 건 축복이지 나쁜 게 아니다. 첫째는 자아가 생길 만큼 쑥쑥 잘 크고 있다는 거니까.


아이의 속도 모르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부족한  엄마이다. 그 부족함이 아이에게 상처를 심어주는 건 아닐까 늘 노심초사하면서도 반복적으로 아이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날 볼 때 나는 정말 내가 괴물 같다.


네가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언제든지 너의 의사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꼭 그럴 수 있도록 자유로운 아이로 키우는 게 나의 목표이다. 그런데 그걸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 엄마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미안할 뿐이다.


아이에게는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하고, 작은 것에서도 감사함을 떠올리라고 하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식이란 존재를 가져놓고 왜 좋은 면만 보지 못하고 그러는 걸까. 모순이다.


오늘도 아이에게 배우는 게 많다. 가장 귀하고 소중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이는 나와 살면서 가르쳐준다.


내가 조금만 속이 상해 보이면 내 앞에서 뒤돌아 엉덩이를 실룩실룩 흔들며 내 기분을 띄어주는 널 보며, 엄마 사랑해하며 내게 안기는 널 보며,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며 내 목을 꼭 안아주는 널 보며 나는 오늘도 성장한다. 내게 좀 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널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주려는 것보다, 네 마음이 나 때문에 상하지 않게 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너의 장점을 더 눈여겨보며 칭찬하고 응원하고,

널 사랑하는 만큼 네가 잘하고 있는 모든 순간과 모습들을 사랑하고 싶다.


네가 7살이 되고 싶어서 된 것도 아니고, 내년에 학교에 갈 만큼 크고 싶어서 큰 것도 아닌데 다 컸다고 생각하고 어른의 잣대로 너의 모습을 판단하거나 평가 내리지 않을게. 있는 그대로의 어린이로 널 대할게.


아이가 엄마의 꿈은 무엇이었냐고 가끔 물어보는데 아이의 앞에서는 작가라고 말했지만, 더 간절하고 시급한 꿈은 아이의 상황에 맞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유연한 엄마가 되는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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