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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Jun 08. 2021

외할머니는 왜 마음으로 나를 낳았어.

보고 싶어도 못 보게.

내게는 시간이 흘러도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한 사람이 있다. 늘 함께 있지만 때때로 잊히는 사람. 웃고 떠드는 순간마다 잊어버 게 미 사람. 그 한 사람이 내 가슴속에 살고 있다.




아주 어렸을 적 나는 마가 누워 잠들 수 없을 만큼 밤낮없이 보채고 예민하게 굴었다고 다. 그래서 날 돌보는데 엄마, 외할머니로도 모자라 엄마 친구의 엄마까지 을 보탰다고 했다.


그럼에도 너무 힘들어서 우리 엄마는 소말리아인처럼 말랐다고 했다. 엄마의 인생 중 가장 말랐던 시절이 내가 태어났던 때였다고 했다.


어릴 때 나는 한 번 울면 그칠 줄을 모르고 울었다. 할머니가 날 업고 시장에 다녀오면 왕복 2시간이 걸는데 시장에 가면서부터 울기 시작했던 내가 돌아오는 포대기에서도 울고 있었으니 할머니는 기억만으로도 혀를 차신다.


할아버지는 오죽하면 그치지 않고 자꾸만 우는 날 엄마에게 다락에 두라고도하셨다.


할아버지의 손주는 모두 8명. 그중 할아버지 칠순잔치 영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손주가 있다.


그게 바로 나다.


할아버지가 주인공이니 카메라가 날 따라다니면서 찍은 것도 아닐 텐데 나는 무려 20차례가 넘게 등장한다. 등장만 하고 금세 사라질 만큼 날쌔기도 날쌔다.


나는 어렸을 적 5층짜리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에 살았다. 1층부터 5층까지 걸어 다니며 그곳에 사는 언니, 오빠들의 손을 스스럼없이 잡았다. 인사 잘하기로도 유명했다. 그 덕분인지 모든 곳을 내 집처럼 들락거렸다. 아침에 일어나 배가 고픈데 가족들이 자고 있으면, 나는 1층 언니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곤 했다.


이제 막 을 배웠을 때도 집 앞 슈퍼에 혼자 가서 동물 흉내를 내고 과자를 받아 오기도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이사를 하면서 전학가게 됐다.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내 소개를 하라고 시간을 주셨다. 나는 내 이름 말하고 노래를 하나 부르겠다며 "남행열차"를 열창했다고 한다.

그리고 6년 내내 내 별명은 남행열차가 되었다.


엄마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그런 나를 사랑하긴 했지만, 내가 별나다고 했다.


나는 그 별나다는 말이 싫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 별남을 특별함으로 바라봐 주신 분이 계신다.

그분이 마음으로 날 낳고 키워주신 외할머니이다.

별나지 않고, 모나지 않고 지금의 나로 자랄 수 있었던 건 할머니의 그 믿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학창 시절에 바쁜 엄마로 인해 마음의 방황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마다 엇나갈 수 없었던 이유도 집에서 날 기다리고 계실 외할머니 때문이었다.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헌신하신 외할머니 때문이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선머슴 아이보다 더 선머슴 아이처럼 구는데도 엄마에게 늘 같은 말씀을 하셨다.


이 아이는 커서 하나가 열몫할 아이 지켜보라고 말이다. 아주 크게 될 아이니 기다려보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을 기억했다. 할머니의 그 말처럼 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지금도 꿈을 잃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도 어쩌면 할머니가 끝까지 날 믿어덕분이지 않을까.


지금도 할머니의 그 말씀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데 꺼지지 않는 연료가 되어주고 있다.


신랑을 처음으로 할머니께 소개해드리기 위해 요양원에 갔을 때다. 할머니는 신랑을 보며 어디서 이런 귀인을 데려왔냐고 말씀하셨다. 나뿐 아니라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들도 꽃처럼 예쁘게 보석처럼 귀하게 바라봐주신 분이다.


신랑의 두 손을 꼭 붙잡고 만져주시며 진심으로 반겨주셨다. 나는 줏대가 있고 참 올곧은 아이라고 그래서 거짓말을 못 하고 바르다면서 상처 받기 쉬우니 신랑이 올곧은 나를 잘 지켜주라고도 하셨다.

 

내가 아이를 낳아 할머니한테 갔을 때도 할머니는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지시고 치매가 와서 요양원에 있으면서도 "내가 다 키워줘야지. 얼마나 귀한 새끼인데"하고 말씀해주셨다. 갈 때마다 내가 낳은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처럼 손뼉을 치고 여름 햇살보다 더 밝고 환하게 웃으시며 맞아주셨다.


할머니는 내가 살면서 그런 큰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늘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내가 받은 사랑이 큰 만큼 베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 주신 분도 우리 외할머니이다.


그런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세상이 지는 것처럼 아프고 힘들었다.

남들은 90이 넘어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죽음이 호상이라 했지만, 내게는 할머니가 몇 살에 돌아가시던 슬픈 죽음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아픈 날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5년이 지났음에도 명절 때마다 시댁에 가는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명절 때 시댁에 가면 신랑의 할머니가 와 계셨기에 외할머니가 떠오르고 너무나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거리를 정말 함박눈이 내리 듯 내리 펑펑 울었다. 너무 그립고 보고 싶어서, 못 해드린 게 너무 많아서, 죄송해서, 그게 한이 되어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주 오랫동안 할머니를 단 한 번이라도 뵀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할머니가 있는 사진과 영상은 휴대폰이 바뀔 때마다 절대 휴대폰에서 지우지 않았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고 미어져서 잘 보지도 못하면서도.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는 돌아가신 후에도 내 꿈에 자주 나와 주셨다. 꿈에서조차 할머니와의 시간은 늘 따뜻했으며 행복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보고 왜 엄마 꿈에는 이리도 안 들려주시냐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할머니 내가 많이 안쓰럽고 불쌍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살아계실 때 할머니에게 엄마는 늘 자랑스러운 딸이었고 나는 할머니가 키운 손녀딸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장례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화장을 하는 내내 젖먹이를 안고 대기실에서 할머니를 떠올리며 슬픔의 눈물을 흘렀다. 유골함을 납골당에 모실 때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기절하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그리고 정신을 좀 차리고는 할머니 유골함 앞에서 약속했다. 내가 외할머니 대신 엄마의 엄마가 되어주겠다고. 그리고 쉽게 울지 않겠다고.


지금 그 약속을 떠올려보면 너무 터무니없는 약속이었다. 철부지인 내가 어떻게 엄마의 엄마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 약속을 떠올리며 엄마를 많이 이해하게 됐고, 엄마와의 사이가 회복됐다. 그 정도만 해도 할머니는 만족하셨을 것이다.


할머니와 보냈던 모든 순간 중 그립지 않은 순간이 단 한순간도 없지만 이토록 감사한 분이, 그리운 분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할머니는 지금도 내 가슴속에 살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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