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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Sep 03. 2021

벚꽃 사기극.

20대의 작가노트.

요즘 우습게도 작가노트를 찾은 후, 20대에 내가 쓴 작가노트에 푹 빠져 산다.


읽으며 무게를 잡는 내가 철이 없어 우스웠다. 열정만 앞 흙바닥에 그린 삐뚤빼뚤 정돈되지 않은 땅따먹기  글이 쑥쓰러웠다.


하지만 그때의 그 패기와 에너지만큼은 지금의 내게서 찾아볼 수 없다. 툴었지만 때 더 예리하게 사물과 삶을 관찰하기었다. 


그때의 패기가 그때의 용기가 그리운 밤, 나는 내게 한 가지 숙제를 냈다.


20대의 작가노트에서 글 한 편을 골라 브런치에 올리고 비슷한 주제의 글을 곧이어 써서 올리겠다고 말이다.


30대 작가노트에 '고장'이라는 첫 주제로 글을 썼을 때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이 다음 주제로 '고침'이나 '수리'가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어봐 주셨다. 난 그 주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그 주제로도 글을 써서 올리려 한다.




벚꽃 사기극



어딜 가나 벚꽃 천지였다. 새끼손톱만 한 꽃잎들이 자잘하게 붙어서 꽃이 되고, 그런 꽃송이를 너무 많이 달아 버거워 보이는 벚 나무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도로가에도, 집 앞 뜰에도, 교내 화단에도.


근데 그 벚꽃이 한순간 우르르 다 떨어져 벼렸다.


정말 나도 봤는데. 도로에 나뒹굴고, 할머니 손 꼭 잡고 가는 아이의 어깨에도 떨어지고, 심지어는 내 발 끝에도 사뿐히 떨어지는 그 벚꽃을.


그래서 나는 벚꽃 나무가 벚꽃은 까맣게 잊은 줄 알았다. 떨어져 버린 벚꽃 대신 파릇하게 새로 돋은 초사귀들만 달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뭐 시험에도 그렇게 적었지. 내가 생각하는 게 틀릴 수 없으니까. 아니, 틀리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시험이 끝날 때도 그것 때문에 속 썩지는 않았다.


그저 내 얘기를 적는 에세이인데 벚꽃 얘기만 자잘하게 늘어놓은 내 글 실력 때문에 속 썩었다.


그리고는 벚꽃나무를 봐버렸다. 머릿속에서가 아닌 눈으로.


제길. 저 벚꽃 나무가 원래 저기 있던 그 벚꽃 나무가 맞나? 아니, 저 나무가 벚꽃 나무가 맞기는 하나?


차라리 부정하고 싶었다. 근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매일 보던 그 장소가 맞는데 뭘. 벚꽃이 한창 피었을 때 예쁘다며 한참을 서성였던 그 나무가 맞는데 뭘.


더 이상 도망갈 구멍이 없자 나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이미 봐버린 벚꽃 나무가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벚꽃이 진 자리마다 생채기 마냥 더 선명한 붉은빛이 돌고 있을까?


아무리 나무가 생명이라고, 여름에 나무에 귀를 대보면 물 마시는 소리가 난다고 하더라도 정말 이건 너무했다. 사람도 상처가 나면 아물기 전에 빨갛게 부풀어 오르듯이 나무도, 그것도 나무기둥도 아니고 나뭇가지 끝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


그래, 어쩌면 저것은 생채기가 아닐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근데 왜 하필 꽃이 떨어진 자리만 저렇게 붉은빛을 띠고 있는지, 도통 두 눈으로 봐 놓고도 믿을 수가 없다.


나는 정말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벚꽃 나무를 놓고 사기극을 벌인 꼴이 돼 버렸다.


규모가 커도 너무 크다. 숨길 수도 없고, 감출 수도 없다. 그냥 차라리 나 죽었다 하고 체념해 버리는 게 가장 빠른 수다. 그래서 나는 정말 나 죽었다 생각하고 벚꽃 생각을 머릿속에서 떼어내려고 해 봤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벚꽃 나무는 어딜 가나 눈에 띄어 나를 괴롭혔다. 벚꽃 나무가 다리가 달려 날 괴롭히려 따라다니는 것도 아닌데.


정말 누구에게 이 화를 돌려야 하나 한참 생각해보아도 답이 없다. 아니, 답은 있는데 부정하고 싶다. 에세이도 제대로 못 써놓고 사기까지 치다니.


그때처럼 내가 미운 적이 없었다. 준비 부족에 성의 부족. 근데 그것보다 더 큰 잘못은 무턱대고 나를 믿은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내 관념을 믿은 것이다. '벚꽃'하면 내 머릿속을 떠오르는 그 관념.


누누이 그런 것은 죽은 것이라고 직접 보고 꼼꼼하게 관찰해서 쓰는 게 더 생생한 글이 된다고 배워와 놓고, 단과대학 앞에도 떡하니 벚꽃나무가 있는데 시험 치러 가면서 그거 한번 제대로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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