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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Oct 08. 2021

주말부부의 안정기와 환장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겪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들.

주말부부를 하며 수 없이 거쳐 간 안정기와 환장기가 교차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도무지 적당히가 안 되는 사람.


내게 신랑은 도무지 적당히가 안 되는 사람이다.


'아니, 사람을 좋아해도 적당히 좋아해야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생각만으로 내 심장이 어떻게 됐나. 신랑이 와 있는 주말이면 설레고 떨려서 도무지 잠이 오질 않는다. 새벽까지 얘기를 나누다 잠을 청하는데도 혼자 뜬 눈으로 새벽 2~3시 더하면 4시까지도 있다.


함께 있는데 잠들어버리는 시간이 아까워서 또 신랑과 한 집에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은 신랑이 첫째와 자는 곳으로 가서 신랑 곁에 살포시 눕는다. 신랑은 잠결임에도 불구하고 날 꼭 안아다. 심지어 토닥거리기까지 하며. 그 체취가 너무 좋아 나는 잠시 넋을 잃는다.


'그래. 내가 그리워하던 게 이 체온, 이 체취였어.' 시간이 제발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랑과 연애 6년에 결혼 8년 차 뜨겁지 않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다.



아빠의 빈자리를 인정하고 나니.


주말부부를 하며 처음에는 혼자서 아빠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이들을 잘 돌봐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한 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오분 대기조도 아니고 바로, 지금 대기조로 아이들을 대했다. 그러다 보니 등부터 시작해 어깨까지 담이 걸리기가 일쑤였고, 자주 근육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주말부부로 지내다 보니 아빠의 빈자리는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신랑과 둘이 있을 때도 이렇게 아이들에게만 매달리지 않았다는 걸 인정했다.


그리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까지 긴장하고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도.


주말부부를 하며 단 하루도 익숙해지는 날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의 주말부부에도 안정기가 찾아왔다. 몸도 마음도 근육이 풀려오며 아픈 날이 훨씬 줄어들었다.



구세주가 진짜 올까?


주말이 다가오면 나는 백마 탄 왕자님이나 구세주를 기다렸다. 드디어 신랑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집으로 온 신랑은 웃는 것조차 힘들어 입꼬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걸까. 내 기분은 저 높이 천장을 뚫고 밤하늘까지 올라가 구름 위를 걷고 있는데 그의 낮고 힘없는 목소리는, 때로는 대답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의 그는 나를 지금 있는 이곳까지 뚝 떨어뜨렸다.


한마디로 백마 탄 왕자님이긴 왕자님인데 백마를 탈 기운도 없는 왕자님이, 구세주이긴 구세주인데 우선 자신을 구해야 할 만큼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든 구세주가 왔다.



주말부부에서 빠질 수 없는 조미료, 진솔한 대화.


우리는 금요일 밤에 만났지만 새벽까지 식탁에 앉아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한이라도 풀려는 듯이 두 눈이 풀려있을 때까지 풀려서도 서로에게 몸을 기울인 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신랑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단 걸 안 것도 그때였다. 주말부부인데 주말인 일요일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에 속상해서 신랑에게 속상함을 눈물과 화로 푼 적이 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그래야 할 대상은 주말임에도 회사로 돌아갈 신랑이 아니라 회사에 가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신랑도 정말 너무 가기 싫다고 우리 곁에 있고 싶다고 했다. 그런 속마음을 말 한 건 처음이었다.


주말이 다 가기도 전에, 그것도 환한 대낮에 신랑을 다시 보내야 하는 내 마음도 내 마음이었지만 나는 상대의 고단함을 볼 줄 몰랐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그다음부터 줄 곧 일요일 3시에서 4시면 집을 나서지만 그때처럼 울거나 화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다른 금요일에는 출근하면 매일 밤 11시까지 일을 하다 퇴근하는 신랑은 요일을 가늠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끼는 긴장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프로젝트에 온 정성과 힘을 쏟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해놓은 양은 턱없이 적게 느껴지고 해 나가야 할 양은 산더미처럼 많은 데다가 상사와 함께 일을 하니 긴장을 한시도 늦출 수가 없다고 했다.


주말부부를 하고 난 후 자신이 직장에서 느끼는 감정을 말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나는 신랑이 이렇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아줘서 너무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대화를 하다 보면 힘든 상황을 오롯이 겪고 있구나 느끼고 진심으로 공감하게 된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며 집에 있는 게 편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마음과 그걸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다는 서러움이 폭발할 때면 신랑에게 내 힘듦을 토로했다.


집에서 아이를 보지만 단 10분도 집중해서 글을 쓸 시간도 없어라는 말부터 보이지 않으니까 모를 수도 있지만 내가 지금 많이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내 시간을 가진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고 한 적도 있다.


신랑은 그때마다 내 마음을 헤아려주고, 인정해주고, 토닥거려줬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육아에 집중할 수 있었다.


긴 글을 쓰지 못해도, 글에 집중할 수 없는 환경임에도 지금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 비수가 될 때


몸이 피곤하면 마음의 여유가 사라진다. 그럴 때면 상대는 농담으로 던진 말이 비수가 되기도 하고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때가 주말부부의 환장기이다. 상대가 대체 왜 상처 받는지 공감조차 하지 못하는 때. 아무리 원점으로 상황을 돌리려 해 봐도 삐걱거릴 때마다 삐딱하게 돌아 앉은 마음 때문에 자제가 되기는커녕 자꾸만 일이 커진다.


하루 종일 서로의 의도와는 다르게 꽈배기처럼 꼬여간 날, 서운함을 풀지 못한 째 첫째를 재운다고 들어가서 잠들어 버린 신랑을 두고 속상한 밤을 보냈다. 이미 잠에  깬 둘째까지 내가 자는 사이 신랑이 데리고 나갔다. 나도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게 이기적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서운함과 속상함이 버무려져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침대와 혼연일체가 되었다.


조금 있다 신랑이 날 데리러 왔다. 미안하단 말과 함께 날 기어코 데리고 나갔다. 식탁에는 탐스러운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아침잠을 포기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아침까지 차린 그에게 나는 이미 마음을 다 뺏겼다.


수줍은 얼굴로 군대에서 하던 참치 양파요리라며 요리를 설명했다. 양파는 혈관이 보이도록 얇게 써는 게 포인트라며. 계란말이도 정갈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흉내도 내기 어려울 만큼.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 어젯밤은 비록 슬펐지만 오늘은 매우 맑은 하루가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먼저 손 내민 신랑에게 고마워서 나는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다. 설거지부터 시작해 집 청소까지.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그렇게 보여주는 데에 우리는 익숙다. 지금 내가 하지 않으면 그 일은 고스란히 상대에게 돌아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장기가 끝나는 건 예측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애써준 모습의 상대를 발견할 때 환장기가 빛을 잃어가는 걸 느낄 수 있다.


티격태격했는데 그 와중에 잔뜩 쌓인 설거지를 해놨다거나 엉망인 집 청소를 해놓은 걸 볼 때 상한 마음임에도 했을 상대가 떠오른다. 그러면 한 없이 가엾고 미안한 감정만 든다.



"오빠"하고 부르면 모든 게 해결되는 기적


주말이면 "오빠"하고 부르면 모든 게 해결되는 기적이 이루어졌다. 그전에 함께 살 때는 그게 기적인 줄 꿈에도 몰랐다.


혼자서 아이 둘을 케어할 때 내 손을 거치지 않고 되는 것이 없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 때도 물티슈와 기저귀 비닐봉지를 가져다 놓고 시작해야 다. 그렇지 않으면 그중 빠진 걸 가지러 가는 사이에 대참사가 일어날 테니까.


그런데 신랑이 있을 때는 한 두 개 빠뜨리고 시작해도 "오빠"하면 옆에 척하고 가져다줘서 아이들을 보는 게 수월하기 그지없다.


하루는 식탁에서 저녁을 먹는데 수박을 잘게 잘라 둘째에게 줬다. 둘째는 수박도 관심이 없는지 날 보며 빠르게 기어와 식탁의자를 잡고 매달렸다.


이때부터는 둘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앞에 놓인 걸 먹는데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나마 가만히 잡고 서 있는 시간도 무척이나 짧아서 얼른 손을 닦고 안아 들 준비를 해야 한다.


그때 두 팔이 쑤욱 들어와 둘째를 안아 들었다. 신랑이었다. 밥 한 끼 편하게 못 먹었을 나를 챙기느라 아이를 안아 들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못해도 배가 부를 거 같았다.     


요즘 이가 난다고 잠투정이 심한 둘째는 업어주거나 안아줘도 주기적으로 버둥대며 잠을 쉽게 자지 않는다.

돌치레를 할 때 너무 안쓰러워 중단했던 밤중 수유를 다시 몇 번 했던 게 문제가 됐다. 이번 주 내내 새벽 세시 반에서 네시 반 사이에 일어나 밥을 달라고 울어댔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안으면 몸을 뒤로 활처럼 굽히며 버둥대고 업어도 발을 굴렸다. 그래도 아이의 이 건강을 위해서는 질 수 없었다. 품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 치는 아이를 필사적으로 안아 재웠다. 그러다 보니 며칠 전부터 자려고 누우니 팔과 어깨부터 관절통이 심해 이를 악 물만큼 아팠다.     


신랑이 안고 있으니 버둥대는 거뿐만 아니라 엄마가 아니라고 자지러지게 운다. 내게 다시 달라며 팔을 내밀자 아니라며 힘 좀 빼야지 하며 아기를 안고 있는다.


저 방법은 대게 효과가 있었고 다시 내게 안기면 엄마가 좋은지 아는 건지 순해진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신랑이 한참을 안고 있다 내가 안아 들었는데도 바로 기대어 잠이 들었다. 신랑이 세상 든든할 수가 없다. 그래. 바로 이게 환상의 콤비지.


신랑과 살면서 함께 해왔던 것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의 존재 자체가 기적임을 깨닫는 순간들이었다. 주말은 항상 끝까지 당겨진 고무줄을 놓는 순간처럼 매우 빠르게, 그리고 매섭고 무섭게 월요일로 데려다 놓았다. 하지만 그건 의미를 부여해도 좋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우리가 함께 보낸 주말이 너무 소중해서 시간의 흐름이 빨라지는 거니까. 그만큼 서로가 애틋하고 좋아서 주말이 아깝게 자꾸자꾸 지나가는 거니까.     



고작 이틀뿐인데 이 이틀을 못 참아서 저러는 거야?


대의 부재가 낯설어서 그런 탓일까. 지금 내 곁에 이 사람과 영원히 볼 수 없게 된다면? 이 사람과의 하루하루가 기적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환장기에는 이 생각마저도 효과가 없다.


정말 환장하게 심사가 꼬이고 뒤틀리기 때문이다.


한 번 서로의 핀트가 어긋났을 뿐인데 한 주간 보지 못했던 설움, 떨어져 지낸 동안 홀로 고단했던 시간들, 이틀뿐인데 이 이틀 동안도 못 참아주고 못 맞춰주고 지금 이러냐는 속상함 같은 것들이 자꾸 양념이 되어 버무려져 점점 덩치가 커진다.


주말부부의 환장기는 정말 답도 없다.


생선을 바를 때 생선가시만 완벽하게 빠지는 것처럼 명확하면 좋을 텐데 생선 초보자가 가시를 바를 때 살을 다 짓이겨 놓는 것처럼 저런 양념들이 본질을 다 흩트려 놓는다. 그래서 주말부부는 실타래가 한 번 꼬였다 하면 서로가 최대한 노력해서 자신의 감정을 다스려가며 돌아가며 풀어줘도 자꾸자꾸 엉킨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말이나 행동은 그 의도가 아닌데 상대는 자꾸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게 반복되면 감정이 상한다.

그러면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이 잘못일까 다르게 받아들인 사람이 잘못일까? 설사 한쪽의 잘못이라도 상관없다. 환장기에는 내가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도 되고 다르게 받아들인 사람이 되기도 하니까. 그냥 이유 막론하고 자꾸 부딪히는 것이다.     


서로를 이토록 아끼고 사랑하는데 우리 둘 정말 왜 그럴까. 이대로 정말 괜찮을까. 속상함이 길어질수록 마음과 정신이 피폐해진다. 안 그래도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은데 떨어져 있는 게 속편하겠다 싶고, 실제로 떨어져 있고 싶고 마구잡이로 화가 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떨어졌을 때의 고충들이 너무나 생생히 기억나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다.


주말부부에게 싸움은 독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빨리 화해를 해도 돌아오는 월요일이면 둘은 떨어져야 한다.


싸운다고 소비한 몸과 마음을 보듬어주고 보살펴 줄 상대가 없다는 건 외줄을 타는 것처럼 굉장히 아슬아슬하고 고독한 일이다.   

  

매주 똑같은 강도의 일이 주어지지만 그 전보다 조금은 피폐해진 몸과 마음으로 해야 하니 어느 하나에게도 도움 될 게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걸 기대했는지, 그 기대가 어떤 방식으로 일그러졌는지를 진심으로 공감해주기에 너무 지쳐 있었다. 주말부부를 한다는 건 서로가 각자의 자리에서 평소보다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걸 표현해내는 방식에서 주말부부를 하기 전보다 둥글지를 못했다.     


그럴 때면 감정을 글로 썼다. 우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상대가 오늘 하루나 이번 주말 동안 잘해줬던 일들을 나열해 봤다. 적다 보니 그가 날 환장하게 만든 그 순간은 정말 개미의 똥만큼 작은 일과 시간이었다. 그 외에 시간은 나를 진심을 다해 아껴주고 사랑도 주었다. 적다 보니 환장하게 만든 일이 그 사람의 진심은 아닐 거라는 걸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면 마음의 긴장과 속상함이 아이스크림 녹듯이 녹아내렸다.


주말부부의 환장기를 끝낼 수 있는 건 결국 상대가 아니고 나임을 인정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 방법을 쓰고 난 이후부터는 환장기는 몹시 빠르고 신속하게 끝이 났다.



주말부부의 뜻은 주말이 지나는 횟수만큼 자라는 부부일지도.


우리는 주말이 지나는 횟수만큼 더 자라 있었다. 그 원동력은 물론 서로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었다.     

다시 서로를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다시 매일 함께 붙어살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는 그전에 우리일 수 없을 만큼 많이 자라 있었다.     


주말부부를 하며 내 삶이 바뀌었다. 내게 주말부부를 해본다는 건 축복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다.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그와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를 일깨워주는 시간이었고, 작은 일에도 더욱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육아에 있어서도 나는 더 성장했다. 혼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경험은 내게 아이들을 데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엄마로 만들어 주었다. 데리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립적이고 능동적인 엄마로 만들어 주었다. 이것밖에 못한다고 생각했던 영역들이 점점 커져서 이것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나가는 그를 배웅할 수 있는 게, 저녁이 되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를 볼 수 있다는 게 모든 게 기적 같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가족이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 수 있는 게 얼마나 귀하고 값진 일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주말부부를 하며 그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과분한 칭찬을 듣고, 지나치게 미안하단 말을 들었다.     


사실은 이제껏 이런 나와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건 신랑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끝이라고 알며 살았던 나를 그 크기가 너무 작았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귀히 여기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동안 너무 게을렀고, 덜 배려했으며, 쉽게 신경질 적이었다. 감사한 걸 지금보다 훨씬 무디게 느꼈으며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게 많았던 사람이었다.


주말부부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는 거라더니


주말부부로 살며 집이 훨씬 더 소중해졌다. 이사는커녕 새로 인테리어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만났을 때마다 매번 다른 여행지에 있는 것처럼 벅차고 아름답기까지 했으니까. 늘 보던 집 주변 풍경마저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잊지 못할 뷰가 됐다. 그 마법은 우리가 떨어져 있을 때도 지속이 되었다.


장기를 겪을 수 있는 것도 결국에는 서로가 곁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건강하게 말이다. 세상에는 감사해야 할 일로 넘쳐난다는 것을 주말 부부를 하며 느꼈다.


그 밖에도 겪어보지 못했다면 몰랐을 일들로 가득한 주말부부는 우리 부부에게 정말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희소성. 만날 기회가 적을수록 함께 있을 시간이 적을수록 서로는 더 귀해졌고,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곁에 있는 상대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알게 해 주었고 싸우거나 기싸움을 하며 낭비한 시간이 얼마나 값어치가 없는 건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안타깝게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까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도 주말부부를 하지 않았다면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해 삶의 질이 훨씬 높아졌다.


우리는 떨어져 있어도 나는 결코 외로울 수 없다는 걸 주말부부를 하면서 깨달았다. 그의 부재가 나의 성장을 독려했다. 살면서 주말부부를 하며 보낸 시간이 서로를 더욱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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