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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Dec 12. 2022

너를 고단하다 여긴 날들.

이렇게 예쁜 너를 키우며, 뒤늦게 깨닫는 못난 엄마.

첫째 아이의 방학이 끝나간다. 아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잘 먹고, 잘 놀다 잠이 들었지만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죄책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끝에 다다르면 좋았던 것, 잘해줬던 것들은 기억이 안 나고, 미안했던 것, 못 해줬던 것들만 생각이 날까.


아이가 방학을 하면 해주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함께 하고 싶었던 일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런데 한 달이 넘는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막상 아이에게 해준 게 몇 가지가 안 되는 거 같다. 첫째 아이가 방학을 한다고 해서 일을 쉴 수는 없었다. 그전과 다름없이 매일 출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직장에 아이를 데리고 간다는 게 내겐 곤욕같이 느껴졌다.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을 한 날도 물론 있긴 있었지만 그중 며칠이나 될까. 그러다 보니 아이에게 그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자꾸 짜증을 냈다. 그리고 나면 꼭 후회를 했으면서도 말이다. 나는 하루에도 몇십 번씩, 아이에게 화나 짜증을 내지 말아야지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도 그게 잘 되질 않았다.


손님과 얘기 중인데 숨도 쉬지 않고 아이가 날 부를 때, 그 부름에 대답을 하고 진정을 시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나를 부를 때, 계산을 하고 있는데 일부로 이쪽으로 와서 훼방을 놓을 때 나는 아이와 함께인 게 부담스러웠다. 세상에 하나뿐인 내 소중한 아이인데 그때는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자기편이 많은 그곳에서 아이는 고삐가 풀린 망아지 같았다. 아무 데나 신발을 벗어놓고 맨발로 뛰어다니기도 하고 신발을 신고 다니는 맨바닥에 누워 아예 뒹굴기도 했다. 잘 진열되어있는 물건들을 아무 데나 가져다 놓을 때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거기까지면 얼마나 좋을까. 물건들의 위치를 바꿔놓고 진열을 훼집어 놓아 물건을 더는 만지지 말라고 했더니 하루에도 수십 번 날 따라다니며 물었다. "엄마. 나 저거 갖고 놀고 싶어. 만지면 안 돼?"하고.  나는 그럴 때면 참고 또 참다가 아이에게 상처되는 말을 했던 것도 같다.


여기까지 내 시선이다. 왜냐하면 아이가 한날 내게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한다며 서러움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따라가면 할 수 있는 게 없고, 재미있는 것도 없는데 그나마 어지럽히지 않는 놀이를 찾아 놀려고 하면 내가 못하게 하고 화만 낸다는 것이다. 나와 같이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를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실은 나도 억울했다. 그렇게 심심하면 안 따라오면 되는데. 더군다나 집과 매장은 같은 건물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만 타면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인데 혼자 좀 있으면 안 되나. 집에서는 할 게 차고 넘치게 많은데 왜 매일 날 따라와서 이 사달을 내는 거야.'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튼튼한 현관문이 있고 대낮인데 대체 뭐가 무섭다는 거야.'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래. 그렇게 놀 게 많은데 엄마가 좋다고 따라 와주는 게 어디야. 이것도 다 한때라던데. 나중에는 통사정을 해도 따라다니지 않는다던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내 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일을 하는 와중에도 아이가 푹 빠진 보드게임을 함께 해주었고, 좀 덜 바쁠 때는 아이 곁에 다가가 앉아 얘기를 나눴고 아이가 하는 걸 봐주었다. 자주 안아주려 애썼고 원하는 걸 들어주려 노력했다. 방학 때는 정말 푹 쉬고만 싶다고 해서 잘 다니고 있는 태권도 학원까지 쉬게 해 주었다. 아이는 기차를 타보고 싶어 했다. 나는 그런 아이를 위해 나 혼자서 신랑 회사가 있는 지역으로 기차를 타고 가기도 했다. 사실 나도 신랑 없이 두 아이를 데리고 기차를 타는 건 처음이라 얼마나 긴장을 한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지하철에서 기차를 갈아타러 가는 길에 계단은 또 얼마나 많은지. 한 손에는 아이들의 짐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둘째를 안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느라 그 후 며칠을 앓다. 김장을 하고 난 후처럼 팔이 아팠기 때문이다.


랬는데도 나는 아이에게 안했다. 3박 4일 여름휴가를 간 것도, 아이가 그토록 가고 싶다던 키즈카페에 가서 실컷 놀다 온 것도 다 내 기억 속엔 이미 없었다. 이렇게 글을 쓰려고 떠올리다 보니 다 생각이 난 거였다. 직장에 출근하는 평일에 나와 아이가 단 둘인 그때 내가 해준 게 많이 없다는 생각이 나를 뒤덮었다. 둘째가 올 때 퇴근을 하기에 퇴근 시간이 빠른 편임에도 하루 종일 시달린 난 첫째와 재미나게 놀아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림을 그리거나 보드게임을 하는 정도였다. 아이를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그걸 보고 좋아하는 아이를 보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던 것도 다 잊었었다.


아이는 집에 와서 잘 놀다가도 너무나 자주 내게 안아달라고 뛰어왔는데 8살이다 보니 몸이 컸다. 아이의 무릎에 찍히고 부딪혀 아플 때가 많았다. 가만히 다리에 잘 안겨있어도 무게에 아플 때가 있었다. 그래서 세 번 중 한 번은 돌아가라 했던 것 같다. 그것도 미안했다. 티브이는 항상 아이들 껄 틀어놓다 보니 의미 없는 휴대폰을 들여다볼 때가 많았는데 휴대폰이 더 소중해서 아이를 안아주지 않다 생각했을까 봐 그것도 너무 미안했다. 내가 조금 불편하고 아팠어도 무조건 안아줬어야 했다. 엄마를 찾을 때가 좋은 거라고, 엄마가 제일 좋다고 할 때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나는 잘 알아야 했다. 나는 종종 아이가 안아달란 요구를 외면한 나쁜 엄마였다. 내가 구제불능같이 느껴졌다. 진이 빠지더라도 아이를 위해 무어라도 해야 했다 나는.


나는 개학을 일 주 앞두고 부랴부랴 아이와 갈 곳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둘째가 태어난 후로 둘만의 데이트는 없던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점심을 먹고 퇴근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이도 나도 이 갇힌 공간 안에서 더는 버틸 자신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방학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나가는 게 우리 모두 살 길 같았다. 직장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 아이만을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무게 같은 건 모두 집어던지고 초등학생이 된 것처럼 가벼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로 갔다. 태어나서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대관람차도 아이랑 타보고, VR 체험도 했다. 아이에게도 다 낯선 것들이었다. 아이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매일같이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아이의 손을 잡고 어디라도 나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다시 이루어진 적 없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관람차가 올라갈 때는 무서워서 내 다리에 얼굴을 파묻던 아이가 다 타고 내려와서는 세 번만 더 타자고 나를 졸랐다. 나는 타기 전에는 별 거 아니라고 여겼던 대관람차에서 내려오고 나서는 집에 돌아올 때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관람차의 우리 자리가 제일 위 절정에 치달았을 때 나는 곧 곤두박질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때 내 곁에는 우리 아이가 있었고, 그 무서운 순간에도 나는 아이의 온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우리 아이의 보호자였고, 아이의 공포심을 달래 주는 엄마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우리는 실컷 놀고 나서 길거리에 앉아 과일에 설탕을 입혀놓은 탕후루를 사 먹었다. 사람이 주변에 많았지만 그곳에서 우리 둘 만 있는 거 같았다. 내 눈에는 탕후루를 맛있게 먹는 아이만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반짝이는 눈이, 해맑게 웃는 표정이 내 마음을 얼마나 벅차게 행복하게 했는지 아이는 알까. 하루를 거르고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물고기를 보러 아쿠아리움에 갈 참이었다. 아이는 지하철을 타는 걸 좋아했는데 그날도 지하철을 타고 갔다. 아쿠아리움에는 물고기를 보는 것 말고도 할 거리가 가득했다. 볼풀장은 120cm 이하로 120cm가  마지노선이었는데 어쩌면 이번이 복덩이가 아쿠아리움에 있는 볼풀장에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랐다. 그 외에도 앵무새 먹이주기, 거북이 먹이주기 체험. 모니터에 그림을 그리면 화면에 그 그림이 출력돼 움직이는 체험 등등을 하며 우리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둘이서만 외출을 하는 것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다 우리에게는 뜻깊은 일이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자신의 방학 동안 나와 참 많은 걸 해주었다. 자신이 보호자가 돼 준다며 나와 동생 병원에 가는 길에 같이 가주었고, 함께 출근도 해주었다. 일하는 엄마 곁에 붙어 있는 것보다 재미난 것들이, 편한 일들이 가득일 텐데 아이는 오로지 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나는 한 없이 작아지고, 부끄러워졌으며 눈물까지 맺혔다. 내가 종종 아이에게 가시 돋친 말과 힘들다는 말을 하기도 했을 텐데 아이는 일관되게 내 곁을 지켜주고, 날 찾아줬으니 말이다. 이런 보석을 알아보지 못한 건 순전히 내 잘못이었다.


글을 쓰며 내가 못해줬던 것만 있었던 건 아니었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못했던 것들이 많음도 떠올렸다. 육아는 정답이 없고, 내가 어떻게 했어도 후회가 따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아이의 첫 초등학교 방학이 지나는 동안 아쉬움 많이 남다. 이건 육아를 하는 내내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나고 나면 잘해준 것보다 후회되는 게 더 많을 것이다. 그래도 이 사실기억하면 후회를 덜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아이가 내 곁에 건강하게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도록 감사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자꾸 잊지만 이 소중하고 예쁜 아이가 우리에게 와줘서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지를 말이다. 그리고 지킬 수 있을지 모를 약속을 다시 해본다. 겨울 방학에는 지금보다 더 잘해줄게 하고.


그랬던 겨울방학이 시간이 흘러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막막함에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았을 텐데 여름방학을 보내며 써 놓았던  글이 내게 희망을 준다. 덕분에 나는 그때보다는 더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살포시 품어본다. 그때의 나보다 그때의 복덩이보다 분명 우리가 성장했을 테니 우리의 찬란한 겨울방학을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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