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며느리의 도의적 책임과 둘째 며느리의 특권.
살면서 때로는 한쪽 눈 질끈 감고 내 고집대로 밀고 나가는 실행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걸 하기 전에는 그것에 따르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결정도 그것에 관한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을 하고 난 후에는 후회가 없다. 신랑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모두의 의견에 반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게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집을 와서 신랑이 집안의 첫째가 아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둘째라서 적당히 빠지고, 물러서도 좋을 법한 상황이 생겼을 때였다. 이번에도 나는 둘째 며느리인 데다 손주 며느리이기 때문에 꼭 빈소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았다. 신랑은 물론이고 어머님께서도 나와 아이들까지는 와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가끔씩 뵈었던 할머니의 모습을 기억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아주시던 그 시간이 너무나 생생했다. 나도 이런데 신랑은 오죽할까. 대학을 가며 집을 떠나기 전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으니 추억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와 같은 슬픔을 겪은 적이 있었다. 평생을 함께 산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무너졌다. 무너져 내린 내 곁을 지킨 건 신랑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잘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텅 비어버린 가슴에 용암 물같이 뜨거운 슬픔이 흐르고 있을 그가 눈에 밟혔다.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더욱더 우리가 백년가약을 맺으며 한 약속을 떠올렸다. 힘들 때도 변치 않고 그의 곁을 지키겠다는 그 약속. 그는 지금 어느 때보다 혼란스럽고 슬프고 아플 것이다. 내가 그런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이렇게나마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빈소를 지키고 있는다고 피곤해봤자 얼마나 피곤하겠어. 또 아이들을 그곳에서 돌보는 게 힘들어 봤자 얼마나 힘이 들겠어.'
내 상태는 제쳐놓고 그만 보게 되었다. 그를 만나 새로운 가족이 된 가족들의 아픔만 보게 되었다.
'평화로운 일상은 잠시 접어놔도 좋을 것 같아.'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의 빈소는 고향에 차려졌다. 두 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 빈소가 차려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빈소가 차려졌으니 모든 게 훨씬 수월했다. 거기다 어머님 댁에서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빈소가 어머님 댁에서 가까웠다.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을 때 나는 가족들의, 친척들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구나 깨달았다. 가장 큰 슬픔을 짊어지고 있을 때 누구 하나라도 거들면 그 슬픔의 무게가 그만큼 가벼워지지 않을까 했던 생각이 정말로 그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이가 그 슬픔의 무게를 덜어가는 게 맞다. 나는 그저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이었다.
잠이라도 편하게 자라며 어른들이 배려를 해주신 덕에 우리는 밤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님 댁으로 갈 수 있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아이는 내가 오늘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며 안마를 해주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처음으로 겪은 아이를 내가 돌봐줘야 하는데 어느새 이렇게 자란 걸까. 동생이 맨발 차림으로 빈소를 나가 복도를 전력 질주한 걸 여러 번 본 탓일 거다. 아이는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며 흐느꼈다. 그 와중에 아이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엄마. 가족이 죽는다는 건 내가 죽는 것과 같아. 가족이 죽는 고통은 속이 썩는 것과 같아. 근데 괜찮겠어. 내가 요즘 아빠한테 싫다고 한 적이 많은데 너무 후회가 돼. 왕할머니 보고 싶다. 할머니 저도 언젠간 따라갈게요.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좋겠어요. 지금쯤 천국에 가 계시겠지. 생명이 삶이 그렇게 긴 건 아니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할머니는 생명과도 같은 추억을 쌓아주신 분이야. 나의 가족관계에서 위인 같은 분이지. 나의 마음속에는 항상 새겨둘 거야. 소중한 왕할머니. 이젠 편안히 가세요. 내가 없어도 하늘에서 잘 계세요."
아이가 태어나면 우주가 하나 태어난다고 하더니 그게 정말이었구나. 나보다 더 큰 우주가 자라고 있었다. 가까이 계시지 않아서 많이 뵙지는 못했지만 아이는 할머니와의 시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별을, 그 슬픔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만큼 자라 있었다.
나는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빈소를 지킬 참이었다. 그런데 시부모님이 나를 말렸다. 이정로만 해도 충분하다는 뜻이셨을 것이다. 그리고 신랑이 가장 크게 말렸다. 사실 하루하고 반나절을 빈소를 지켰을 뿐이었지만 며칠 째 잠을 못 자고 출근한 것처럼 몸이 피곤했다. 가기 전부터 편도가 부어있었으니 몸에 무리가 가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여덟 살 첫째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음을 깨달을 때마다 온몸을 비틀었고, 세 살 둘째는 자리를 쉽게 이탈했다. 둘째 복숭이를 잡으러 다니는 게 내가 빈소에서 아마 가장 많이 한 일이 아닐까 싶다. 이튿날 저녁쯤 부모님이 문상을 오시면서 신랑을 뺀 우리 가족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됐다. 빈소에 우리 셋이 빠졌을 뿐인데 휑하고 조용했다고 식구들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와줘서 정말 너무 힘이 됐다고 고맙다고도.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곁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하루 종일 신랑이 걱정되었다. 탯줄로 연결된 것처럼 그의 공허함과 슬픔, 안타까움, 후회가 문득문득 파도가 밀려오 듯 가슴을 저리고 아프게 했다. 나도 당신만큼은 아니더라도 함께 아파하고 있다고, 지독히도 공감하고 있다고 말하며 그를 곁에서 안아주고 싶었다. 지친 그가 내게 기댈 수 있게 어깨를 내어주고 싶었다. 나는 그와 결혼한 이유를 떠올렸다. 자취를 하던 그가 밤새 아플 때 나는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곁을 지킬 수가 없었다. 혼자 살 때 아픈 게 가장 서러운데 이제 더는 그 설움을 그가 느끼질 않길 바랐다. 그가 아프고 힘들 때 내가 곁에서 그의 이마에 물수건이라도 올려줄 수 있다면, 온도계로 그의 상태를 체크하고 돌봐줄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결혼을 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런데 이런 힘든 순간에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켜줄 수 없음이 정말 미안했다.
모든 걸 마치고 돌아온 신랑은 쪼그라든 귤처럼 푸석했고 아파 보였다. 마음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는 집에 돌아왔음에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그건 적어도 후회를 남기고 오진 않았다는 뜻이었다. 예배를 하며 할머니의 영상을 틀 때 정말 많이 울었다고 했다. 나는 잘했다고, 정말 잘했다고 하며 그를 꼭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