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되자 여덟 살 첫째 아이의 잠드는 시간이 늦어졌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둘째가 방학하는 이주동안은 출근을 안 해도 되니. 그런데 날이 갈수록 잠드는 시간이 늦어지고, 일어나는 시간이 미뤄지기만 했다.
나는 저녁이 되면 잠이 와 눈을 비볐다. 하지만 아이는 그러고도 한참 후에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가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해서 잠이 들 때까지 나나 신랑이 곁을 지켜주는데 그러면 우리는 노곤노곤 잠이 오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곁을 지켜야 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누굴 약 올리려고 하는지 잠을 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가관이었다. 미안한 기색도 조심을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가며 일부로 쿵쿵 거리기도 하고 또다시 누굴 놀리는 것처럼 킥킥거리기까지 했다. 늦은 밤까지 그러니 혹여나 겨우 잠든 둘째가 깰까 봐 노심초사하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깜깜한 방안은 아이가 금세 자 준다면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저렇게 몇 시간을 자지 않고 일말의 가책도 없게 행동할 때면 그 공간은 날 억누르고 옥죄이는 공간이 되었다. 만약 아이 곁에 이렇게 오래 누워있지 않았다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하루종일 보고 싶었던 신랑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볼 수 있었고, 나도 따라 잘 수도 있었다. 소파에 신랑과 붙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보고 싶었던 프로도 볼 수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점점 분위기가 심각해지고 험악해졌다. 아이를 재우는 밤뿐 아니라 낮에까지 이게 문제로 이야기가 나올 만큼 말이다. 마음이 차분할 때 말을 하면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도 잘 알아듣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평온한 시간에 아이를 불러 자세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말을 해도 아이의 바뀌지 않는 태도였다. 미안하단 말 뿐이었다. 잔소리 정도로만 여겼을까. 아이와의 닿지 못한 간극에 나는 점점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허무함과 좌절감을 느꼈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잠을 자고 싶었을 뿐인데. 그러다 자주 신랑 생각이 났다. 우리는 방학을 즐기고 있지만 신랑은 그 와중에 매일 출근을 해야 했었는데. 왜 나는 내가 힘들고 나서야 이 문제가 심각하다 생각했을까.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아침에 출근까지 해야 하는 신랑을 미처 배려하지 못했을까 나 자신이 한심하고 미웠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고 해서 좋은 엄마가 아닌데. 선경지명이 있었는지 신랑은 늘 나보다 단호한 편이었다. 아이의 교육을 신랑 뜻에 더 따라야겠다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생각을 해봤다.
나는 매번 한 발씩 느렸다. 이번에는 태권도 학원을 끊지 않고 방학 때도 가고 있지만 처음으로 맞는 여름방학 때만 해도 아이의 말만 듣고 태권도 학원까지 끊어 버렸다. 정말 푹 쉬고 싶다는 아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버렸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 한 시간이라도 몸으로 에너지 분출을 하지 못 한 아이는 나를 들들 볶았다. 일을 해야 하는데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다고 볶고, 심심하다고 볶고, 답답하다고 볶고. 그러면서도 집에 혼자 있는 건 잠시도 거부했다. 나는 내 시간은커녕, 놀아주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는 다니는 아이와 함께 해야 했다. 나는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될 일들을 몸소 겪어야 체득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때도 신랑도 엄마도 날 말렸던 것 같은데. 아이의 말을 다 들어주는 것과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걸 여러 번의 과정을 겪으면서 알아가고 있다.
아이가 자지 않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아이를 재우려 갖은 방법을 쓰다 잠시간을 놓친 나는 아이보다 늘 늦게 잠이 들었다. 정말 자야 할 시간에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져서 잠이 들 수 없었다. 내가 비로소 잠들 수 있는 그 시각이 너무나 원망스럽고 슬펐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잠만 좀 제시간에 자고 싶다는 건데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나날이 고통스러웠다. 어제만 해도 9시 반에 함께 들어간 아이는 12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고, 나는 그보다 더 늦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첫째는 그렇게 기를 쓰고 자지 않으려다가 잠이 들면 그만인데 나는 어쩌면 그때부터 새로운 시작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직 어린 둘째가 자신의 애착대상인 내 머리카락을 잡으며 수시로 깨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콧물이 좀 차는 날이면 수시로 내 머리카락을 덥석 덥석 잡으며 잠이 깨서 칭얼거린다. 육아를 하며 퇴근이라는 걸 바라본 적도 없는 내게 상황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너무 반복되다 보니 그렇게 제대로 잠들지 못한 날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있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바위가 쪼개지는 것 같은 극심한 편두통이 생겼다. 지금도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책상에 엎드려 자고 싶지만 첫째 아이를 데리고 출근을 해 있는 상태다. 둘째가 하원을 하는 4시 까지는 빼도 박도 하지 못하고 이곳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말 조금 더 자면 머리가 맑아져 아이를 더 살갑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시간만 조금 주어진다면 이 아이에게 다시 활짝 웃으며 이리 와서 안겨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보이차와 믹스커피로 잠을 견디는 걸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나는 사실 그것보다 내 심정을 견디고 있는 게 더 위태롭게 느껴진다. 명절이 지나서야 아이의 방학이 끝날 텐데. 두 번째 방학이라고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잠 하나 못 잤다고 벌써 이렇게 안 좋은 것들만 곱씹고 앉아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자꾸 나를 탓하게 된다.
사실 그냥 다 괜찮으니 잠을 자고 싶다. 내게 주어진 게 길바닥에 침낭밖에 없다고 해도 좋으니 잠을 자고 싶다. 인도 한 복판이라도 좋고, 파도가 닿는 모래사장 끝도 좋다. 산 정상도 좋고, 시멘트 바닥도 상관없다. 밀린 잠이 많아 사람들이 힐끗거리더라도 모르고 잘만 잘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겨우 겨우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침부터 시작된 첫째와의 투닥거림에 너무 지친 나머지, 아니 며칠을 그대로 이어져 온 투닥거림에 너무 지친 나머지 잠시만 혼자 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며 아이에게 휴대폰을 쥐어줬기 때문이다. 지금 첫째와 나의 거리는 내 발걸음으로 다섯 발자국이면 닿는다. 그런데 마음의 거리는 중간에 급류가 흐르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다. 어떡하면 이 아이를 제대로 케어할 수 있을지, 아이가 행복할 수 있을지, 내가 행복할 수 있을지. 오늘부터는 어떻게 해서든 혼자 들어가서 자라고 했는데 저녁에 또 어떤 한바탕 난리가 날 지도, 그 어떤 것도 짐작도 장담도 할 수 없다. 나는 사실 지금도 여전히 아이가 예쁜데. 눈만 마주쳐도 저 아이를 내가 낳았나 싶을 만큼 귀한데. 무엇하나 쉽지가 않다.
그래. 잠이 문제다. 눈을 감으면 금세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나는 그러면 안 된다. 아이들이 눈을 감고 안기면 포근함을 느낄 수 있게 항상 품을 내어줘야 하는 나는 엄마니까. 내가 약해져서도, 나태해서도, 게을러서도, 잠을 자서도 안 된다. 가끔 아이는 내가 잠드는 시간 외에 너무 피곤해서 잠시 잠이라도 들면 자신이 배려해 줘서, 자신이 이해해줘서 내가 잠을 잘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 사실 나도 알아. 동생이 오는 걸 막아줬겠지. 엄마 힘들 텐데 조금이라도 자 마음을 내어줬겠지.' 그런데 왠지 그 말이 억울하다. 진짜 지치고 지쳐서, 잠을 쫓아내다 쫓아내다 못 참고 자는 건데. 나는 잠을 잘 때마저 왜 아이의 허락을 맡아야 할까. 내가 왜 잠을 자는 게 아이의 이해를 받아야 할까. 내 몸인데, 나는 내 건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음을 실감한다. 아이를 키우며 나를 버리고, 내 자신을 내려놔야 할 순간은 수 없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나름 그래도 괜찮았는데 안 괜찮은 스위치가 달칵하고 운 없이 눌러진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제일 잘 안다. 나는 무척이나 단순하다.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다가도 오늘 하루만 잠을 좀 푹 잔다면 다시 돌아갈 것이다. 사실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꼭 돌아가고야 말 것이다. 그래야만 아이도 신랑도 나도 웃을 수 있다. 내가 시무룩해있고, 지쳐있고, 슬퍼만 한다면 그 감정들은 가족 모두에게 들러붙어 상황을 더 악화시킬 테니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건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다. 보이차 한 잔으로 시름을 달랬으니, 당장 믹스 커피 한 잔으로 피곤을 삼켜야겠다. 지금 내 앞에는 다섯 발자국이면 닿을 첫째가 있다. 그날 하루는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바로 이 아이를 안아줘야겠다. 다 괜찮다고 아이도 나도 토닥여주어야겠다. 정말 괜찮아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