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하영 May 30. 2023

그의 곁에만 서면 여자가 된다.

그와 내가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은 낯선 즐거움이 되어.

신랑의 월차날에 맞춰 어마어마한 계획은 아니지만 소소한 계획을 짜 보았다. 얼마 만에 둘 만의 시간인지 모르겠다. 아이들까지 매일 넷이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느라 둘만 있었던 시절은 아득한 꿈이라 여기고 살았는데.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본 영화는 신과 함께였고, 나는 아바타 2를 몹시 보고 싶었지만 결국 짬이 나질 않아 포기했어야 했다. 결혼을 해 아이를 키우다 보니 포기는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렸다.


내 옷을 사는 것보다 아이들의 옷을 살 때가 천 배, 만 배 더 행복했고, 우리 둘만의 오붓한 시간은 10분만 주어져도 밤하늘의 별의 숫자를 합한 거보다도 후하게 느껴졌다. 너무나 당연히 여겼던 내 시간과, 여유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 것도 아이를 가지고 맞게 된 변화였다. 덕분에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쉬이 넘기지 않 감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누구의 엄마가 아닌 한 남자의 여자로서 드디어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게 된 것이다.


점심시간에 잠깐 빠져나와 그와 데이트를 해야 했다. 찰나 같을 테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을 것이다.


직장에서 벗어나 그의 손을 잡았을 때부터 나는 더 이상 30대 중반의 아이 엄마가 아니었다. 억척스러움은 잠시 던져놓고 그를 처음 만난 23살로 돌아다. 여전히 그의 손은 크고 도톰했고, 내 손을 감싼 온기는 따뜻했다.


다른 날 보다도 수수한 옷과 화장조차 하지 않은 맨얼굴에 그가 실망하지 않을까 슬쩍 눈치를 봤다. 요즘 둘째는 점점 더 팔다리가 길어지는 만큼 자신의 의사가 생겨 아침에 옷을 입히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닌데 오늘도 역시 그랬었다. 화장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는 제시간에 맞춰 등원 차량에 태워야 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지만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인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는 싫은데... 하지만 그는 여느 때처럼 날 보고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이쁘다는 말도 보태면서 말이다. 살면서 이토록 편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가족 외에는 없었는데 그와 내가 가족이라니. 매일 같이 살면서도 그와 내가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은 낯선 즐거움이 되어 민들레 홀씨처럼 내 마음을 간지럽힌다.


월차날은 그동안 못한 개인적인 업무를 봐야 할 거고, 친구들도 만나야 할 텐데. 가장 금쪽같은 시간을 내게 할애해 주다니. 이것 역시 익숙해지지 않는 부분 중 하나이다. 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은 이 남자를 내가 어떡하면 좋을까. 더 잘해주고 더 아껴주는 수밖에 없겠지. 그가 내게 귀한 시간을 할애해 준다는 게 나는 아직도 믿기질 않을 만큼 좋았다. 힐끔힐끔 곁눈질로 그를 훔쳐봐야 할 만큼 가슴이 떨리고 설렜다. 정면에서 그의 얼굴을 봤다간 어쩌면 넋 놓고 침을 흘리다 눈이 멀지도 모른다.


그는 여전히 멋있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는 중후함까지 더해져 매력이 아주 철철 넘쳤다. 우리의 점심 데이트는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갈빗집이었다. 나는 졸입식이든, 생일이든 중요한 날은 늘 갈빗집에 갈 만큼 갈비를 좋아했는데 온전히 내 취향에 맞춰 짠 데이트 코스였다. 밖에 밥이 매번 맛있을 수 없는데, 그것도 회사에서 일률적으로 나오는 밥이 집밥보다 영양가가 높거나 맛있을 리 없을 텐데 그는 자신은 밖에서 밥을 자주 사 먹으니 내가 먹고 싶은 걸로 꼭 고르라고 했다.


달콤 짭짤한 갈비를 한 입 베어 물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는 고기를 시킬 때면 된장찌개와 밥을 항상 같이 시키는데 양가 어른들께서 우리의 그 취향을 보고 너희는 정말 천생연분이라는 말을 쓰셨다. 내게 고기는 일종의 반찬이라서 밥 없이 고기만 먹는 건 너무 짜게 느껴졌다. 그런데 신랑은 어떤 마음으로 처음부터 밥과 된장찌개를 시켜서 먹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토록 식성 또한 비슷하다니. 정말 운명이 아닐 수 없단 생각을 했다.


사실 연애를 시작한 기간에야 그와의 공통점을 찾고 그걸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인연임을 직감하지, 연애 6년에 결혼 10년 차인 내가 그래도 되는 건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지만 여전히 똑같은 마음이라 어쩔 수가 없다. 그저 아무 말없이 보고만 있어도 이렇게 편안하고 웃음이 나는 걸. 그와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꿀처럼 달콤하고, 라일락 향기처럼 강렬한 추억을 남긴다. 나는 그와 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그에 대해 궁금한 것도 차고 넘친다. 여전히 그를 좀 더 알아가고 싶다.


열심히 고기를 굽는 모습을 보며 정성스레 상추쌈을 싸서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쩜. 저리도 귀여울까. 아직도 내가 주는 쌈을 수줍어하며 받아먹다니. 어쩌면 내 눈에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씐 건지도 몰랐다. 돈을 아낀다고 배가 점점 불러오는 척 연기를 하다 어느 순간 슬쩍 젓가락을 내려놓기도 했던 연애 때가 떠올랐다.


오늘은 고기 양이 충분해서 서로 눈치 보며 먹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부른 배를 탕탕 치며 음식점을 빠져나왔다. 회사 복귀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더 하고 싶은 게 없는지 물어보았다. 내게 포커스를 맞추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고 하는 그의 말투가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하던지. 지금이 겨울이라도 봄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우리는 배도 꺼질 겸 근처 등산로를 가볍게 걸었다. 매일 답답한 벽 속에 갇혀있다, 그 시간에 걷는 등산로는 짜릿함 그 자체였다. 조금 걸어 올라갔는데 이름 모를 새들이 앞다투어 예쁜 목소리를 뽐냈다. 새소리에 향긋한 풀내음까지 깊숙한 숲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상쾌했다. 서둘러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으며 이곳에는 그와 나 둘 뿐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편안했다. 그건 봄 햇살 때문도, 나무에서 뿜어내는 피톤치드 때문도 아니었다. 오직 그가 내 곁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성인이 되기 전부터 일 년에 한 번씩 해외여행을 갔었다. 하지만 그와 결혼하고 간 해외는 신혼여행이 마지막이었다. 그와는 굳이 멀리 나가지 않아도, 해외에 있을 때만큼의 벅참과 설렘, 행복을 느낄 수 있어서 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 돈을 아껴 그와 낳은 소중한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해주고 픈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덕분에 그와 갈 곳이 이토록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려 온다. 지금껏 그와 살며 함께 해 온 것들도 많지만 아직 해보지 않은 것들도 많아서 다가올 앞날이 더 설렌다.


그가 내 남편임으로써 나는 마법의 가루 한 스푼을 탄 것처럼 늘 동화 속 주인공처럼 당차고 씩씩하게 살 수 있다. 역경이나 고난은 내겐 먼 일이다. 그 어떤 일이 닥쳐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그가 내 곁에 있는데 무서울 게 없다.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줄, 또 쓰러지기 전에 옆에서 붙잡아줄 그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칭찬은 물론 위로와 격려도 아끼지 않는 늘 변함없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주어야지 늘 다짐했다.


우리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는 빵을 사러 가는 거였다. 이것도 미리 계획해 둔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곁에 있으면 자연스레 내가 좋아하는 걸 하게 된다. 그가 등을 떠밀어 주는 탓이 클 것이다. 아예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는 직장 동료분의 빵을 먼저 신중히 고르고 내 것을 담았다. 눈으로 보기만 했는데도 온갖 디저트 들 속에서 헤엄을 치는 것 마냥 기쁘고 행복했다. 포장되길 기다리며 맞은편에 앉은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쌍꺼풀 속 맑은 눈동자는 호수처럼 촉촉했다.


그가 그 귀한 월차를 내게 써 준 덕분에 나는 오늘 스위스에서 본 호수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했다. 빙하가 녹은 물 색깔은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늘 내게 다채로운 새로움을 안겨준다. 내가 그의 아내라서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면, 나도 그의 아내로서 그를 이토록 행복하게 해 주며 살고 싶다. 서로에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까지고 건강하게 그가 내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캠핑 가는 날이 장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