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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영 Feb 11. 2021

엄마. 엄마가 옳았어요

2부

꿈이 있는 엄마 밑에 꿈이 있는 아이가 자란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며 낯선 도시로 오게 됐다. 내가 네살 때 방문판매사원이 된 엄마는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집과 가게와 회사를 방문했다. 일과 사랑에 빠진 엄마는 집에 와서도 일, 일, 일, 일뿐이었다.


요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와 친한 친구의 이름은 무엇인지 같은 것들은 몰라도 단골 고객의 니즈와 생각, 그가 친하게 지내는 인물들은 머릿속에 줄줄 꿰고 있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살이 갑자기 붙으면서 내 종아리가 튼적이 있다. 붉은색의 가느다란 줄이 생기며 종아리가 쩍쩍 갈라졌다. 그런데 나는 그 변화가 무언지 몰랐다. 그러다 튼살이 하얗게 되었을 때 엄마가 내 다리를 보게됐다. 그때는 이미 튼살방지제를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내 종아리에는 아직도 하얗게 튼 자국이 있다.


엄마는 내 옆에 없는 일에도 한결같았지만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늘 한결같았다. 한눈팔지 않고  엄마가 하고 있는 그 일만 팠다.


시간과 노력은 다행히 엄마를 배신하지 않았다.  방문판매사원이었던 엄마는 이제 방문판매사원분들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었고 그 규모는 엄마가 상상하던 이상으로 커졌다. 엄마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되었다.


일하는 엄마는 즐거워 보였다. 엄마의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가득했고 엄마의 목소리는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들떠있었다. 얼굴에는 활짝 핀 꽃처럼 싱그러운 미소가 만연고 표정은 늘 자신감에 차 있었다.

엄마는 내 곁보다 그곳이 더 어울리는 사람 같았다.


 그런 엄마가 싫었다. 

내가 엄마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장 가엾은 희생자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엄마 주변 사람들에게 비출 때면 사람들은 짰는지 늘 같은 대답만 했다. "너네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하고 말이다. 그 말을 하고는 어린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래 너는 힘들겠다."정도의 위로를 건네고는 했다.


엄마는 내게 결핍의 대상이자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성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도 엄마처럼 성공하기 위해 엄마의 어떤 면들을 관찰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행인 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같이 사는 가족이기에 자연스레 알아다는 점이다.


엄마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었다. 처음 방문판매를 시작하고 첫 고객이 되었던 일면식도 없던 분이 귀한 인연이 되어 엄마 회사에서 퇴직을 할만큼 오래 근무해주셨다. 엄마 회사에 근무하시는 분들 중 오래 일하신분은 20년정도, 짧게 일하신 분들이 7년 정도였다.


엄마는 음식점에 가서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금방 친해졌다. 생일파티를 한다고 갔던 단골집에서 케잌을 나누어주다 연을 맺고, 범죄예방 모임에 갔다 인연을 맺고, 그 귀한 인연들은 모두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엄마에겐 사람을 사귀고 쭉 이어가는 특이한 재능이 있었다.


엄마는 퍼주고 퍼주고 또 퍼주기만 했다. 이러다 빈털터리가 되어버리겠다싶을 만큼 퍼주어서 그만하라 말리고 싶을 정도였다. 줄 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하는 엄마의 얼굴은 내 걱정과 달리 행복해 보였다. 엄마는 그 덕분인지 좋은 사람들을  사귀게 됐다. 진심으로 엄마를 아껴주고 걱정해주는 엄마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은 엄마에게 똑같이 퍼주고 있었다.  곁에서 보는 내게는 늘 신기한 모습이었다.


내게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도 배울점이 꼭 있다며 사람을 볼 때 늘 좋은점을 보라고 했다.


엄마는 꿈을 꾸면 그 꿈이 정말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상상조차 못할만큼 큰 꿈을 꿨다. 하지만 엄마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만들어 다.


엄마가 처음 방문판매사원이 되어 교육에 참가했을 때 10년 후에 이루고싶은 걸 그리라고 도화지를 받았다. 엄마는 그 도화지에 엄마가 지을 집을 그렸다. 시골에 지을 소박한 집이었지만 아무 것도 없던 엄마에게는 정말 말그대로 꿈같은 집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사전에 포기라는 단어는 없었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생각으로 될때까지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는 법을 배운적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후로 30년이 지난 지금 엄마의 그 꿈은 어떻게 실현됐을까? 방문판매사원으로 시작해 방문판매사원을 관리하는 관리자에서 사장이되었고, 연고도 없는 시골에 정착해서 가족이 주말에 머무를 수 있는 본체를 시작으로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업연수원과 펜션6채를 지었다. 리고 엄마 이름으로 법인회사를 만들어 오프라인과 인터넷쇼핑몰도 운영하고 있다. 한 마디로 몸이 10개라도 부족할만큼 신경쓸 것도 많아졌고 바빠졌다.


그래서 갈퀴로 돈을 긁어모을 만큼 많이 벌게 됐을까? 사업이라는 게 물론 그런 시기도 있지만 팬티한장 사는데도 손을 덜덜 떨 포기할만큼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다. 천석꾼은 천가지 고민이 있고 만석꾼은 만가지 고민이 있듯이 어깨에 짊어진 짐이 무거울수록 함께 가야할  식구들이 늘 수록 더 부지런해져야 했고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했다.


나는 엄마를 닮아 하고싶은  많다. 리고 꿈이 없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꿈이 없는 나를 상상하는  정말 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려운 건 꿈이 없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도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죽을 것 같다. 지금의 우리 엄마가 그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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