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옛이야기
바람이 선선했던 어느 여름밤, "육이오 때는 말이다." 하며 아버지는 옛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먹을 게 없어 고생한 이야기, 산에 가 나무껍질을 벗겨오고 종종걸음으로 몇 리를 걸어가야 겨우 나물을 캘 수 있었다던 시절.
나무껍질이며 푸성귀를 넣어 멀겋게 죽을 끓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냥 전설 속 이야기겠지 싶을 만큼 어떻게 견디고 사셨을까 싶어 어린 마음에도 안쓰러움이 일었다. 모진 세월을 잘 견뎌오신 아버지가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 중 산에서 나무를 해다 등짐을 지고 물이 불어난 냇가를 건너려다 아찔했던 일이며, 리어카에 나뭇짐을 싣고 몇 리를 걸어갔던 일들은 내 어린 시절과는 너무 먼 괴리가 느껴졌다.
하지만 무거운 나뭇짐을 싣고 팔러 나가던 날의 이야기는 특히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린 형제였던 큰아버지는 앞에서 운전을 했고 아버지는 뒤에서 밀며 경사길을 오를 때는 힘을 줘 밀어야 했단다. 또 내리막길을 갈 때는 있는 힘을 다해 리어카가 앞으로 쏠리지 않게 뒤로 버텨내야 했었다고.
이제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시는 아버지의 검게 굴곡진 얼굴을 보며 선연하게 그려지는 그림들. 가슴이 쓰라렸다.
시원한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한 채 장에 도착해 나무를 팔면 그 돈은 할아버지께서 고스란히 챙기셨다니. 어린 아들 형제에게 알사탕 하나도 사 주지 않으셨다는 말씀엔 어른도 다 어른이 아니구나 싶었다.
엄마 없이 자란 슬픔과 인정 없는 홀아버지 밑에서 가난에 허덕이고 애정에 굶주렸을 한 소년에 대해 내가 죄인이 된 듯 한없는 미안함에 마음이 아려오곤 했다.
아주 가끔, 밤하늘을 보고 누워 들었던 색 바랜 이야기들이 흐릿해지는 기억의 상자 안에 켜켜이 쌓여 지금껏 머문다. 한 해 한해 노환과 치매로 약해지는 아버지의 기억에서 마음 아프고 힘들었던 그때의 기억들을 깨끗이 지워 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물가물 아버지의 옛이야기가 떠오를 때면 지금도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그때
"설마?" 하고 묻기도 했고,
"어떻게 그런 걸 사람이 먹을 수 있어. 아직 어린데 어떻게 그런 일을."라고 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풀죽을 먹고 그 독기로 인해 배앓이를 하고 얼굴이 탱탱부어 고생했던 이야기와 나뭇짐에 얽힌 이야기는 내 마음을 유독 아프게 파고들었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지는 거라던 아버지의 혼잣말이 오래도록 귓전에서 맴을 돈다.
이따금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부모님 등에 끼얹고 고사리 손으로 쓸어내릴 때 등줄기를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에 멀쩡했던 팔다리가 흠씬 눈물로 젖었던 기억.
유독 그런 날 우물가 옆엔 새하얗고 새빨갛게 피어 있던 접시꽃의 빛깔이 유난스레 짙고 선명하게 보였던 날은, 지금보다 한참 무더운 여름이었다.
늦게 핀 감꽃들이 지는지 모르게 지고 초록색 작은 열매가 눈에 도드라지게 자라고, 메말랐던 대추나무에서도 자잘한 꽃이 소금처럼 피어난다.
여름 장마의 축축한 습기와 한 여름 무더위를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해 났던 그 시절이 아련하기만 하다.
그나마 한 대뿐이던 고물선풍기를 부모님은 늘 우리 사 남매에게 양보를 한 채 부채로만 여름밤을 나셨다. 철이 없던 나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듯싶다.
부모님은 우리보다 더위를 덜 탄다고 믿고 싶었었는지도 모른다. 틈만 나면 선풍기를 끌어다 놓고 선풍기 앞에서 장난을 쳤던 철없던 시절이 야속하게 찾아드는 밤.
밀려드는 잠과 이유 없이 그것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드는 정처 없는 생각들 사이를 내내 오락가락한다.
다시 비가 내린다.
투두 둑! 투두 둑! 자 륵! 자 륵! 내리던 빗소리가 이내 또 잠잠해진다. 어둠에 기대어 들리는 빗소리는 언제라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더없는 안정제가 되어 내 안으로 스민다.
이미 지난 일들은 언제고 아련한 추억이란 이름이 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들곤 한다. 이 밤엔, 잦아드는 빗소리와 창문으로 스미는 밤바람이 잠 못 드는 기나긴 시간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