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월의 첫밤 (2)

초여름의 밤 풍경

by 시나브로

어릴 적 시골에서 보아왔던 제멋대로 피어났던 들꽃보다 모양도, 색깔도, 훨씬 다양하고 화려해진 꽃이지만 향기 없는 꽃들이 태반이었다.


나 혼자서 아끼던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아쉬움에 무척이나 속상했던 기억이다. 그날 이후, 꽃을 살 일이 있을 땐 가급적 향기가 있는 꽃을 고르려 한다. 제가 가졌던 자기만의 향기를 잃어가는 꽃들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울뿐이다.


갈수록 가짜 같은 꽃들이 많아 실망했던 기억. 화려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향기가 없는 꽃은 마치 주관 없고 영혼 없어 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다시 세 바퀴 째 돌며 이 계절 유월과 너무 잘 어울리는 넝쿨장미 곁에서 보란 듯이 도심을 지키며 반듯하게 서있는 초록그늘나무의 사진을 찍었다. 한참 사진을 찍고 나서 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찍었던 사진을 하나씩 확대해 가며 가까이 들여다본다.


마치 한낮에 찍은 사진만큼이나 선명하게 잘 나온 사진도 있어 뿌듯해진다. 가짜가 진짜 같은 세상,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분하기 힘든 세상. 어떤 때는 오히려 어수룩해 보이는 진짜가 가짜로 오해받는 세상.


다시 한참을 서서 장미꽃의 향기를 오래도록 깊숙이 맡아보았다. 은은하게 스미는 장미향, 장미꽃의 사진을 찍고 다시 사진을 확대해 본다. 갑자기 사진 속 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나에게 물어오는 듯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와 깜짝 놀랐다. 처음엔 느리게 밤바람을 느끼며 지나버린 오월을 곱씹으며 천천히 걸으려던 걸음이 나도 모르게 자꾸만 빨라진다.


'이나마도 어차피 운동이 되게 하려면.' 하는 생각에 또 욕심이 앞선다. 지난 몇 주, 집과 직장이 전부였던 게으름의 시간들. 내 다짐들은 어찌 그렇게도 쉽게 무너지고 마는지...


무심히 흐르는 시간 속에 어느새 봄은 가버렸다. 이즘에는 늘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 소리가 들린다. 왠지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 묻어뒀던 생각에 빠져들게 되고 아련한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내게 된다.


자꾸만 꼬리를 물고 올라오는 생각들을 억지로 눌러 잠재우려다 또 어떤 날엔 차라리 그 생각 속으로 일부러 빠져들게 되는 날도 있다. 진한 향기를 풍기던 아까시꽃 이파리도 이미 누렇게 말라 오월을 데려가 버렸다.


하얀 찔레꽃만 순박한 시골처녀같이 수줍게 피어 진심과 진실이 담긴 그 진짜 향기에 빠져보라 우리를 유혹했던 날도 점차 가버렸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거닐었던 건지산 숲길, 그곳에서 마주했던 오월의 끝자락이 아련하기만 하다.


푸른 숲에서 묻어나던 풋내음에도, 하얀 찔레꽃 향기에 빠져 동심을 불러보았던 그날. 그날엔 우리들이 공유했던 추억에 빠져 달달해진 마음만 한껏 젊어져 봤던 날이었다. 그것들은 진즉 모두가 오월 속으로 묻혀 들어 이젠 추억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이제는 하며 아쉬워 찾아보아도 이미 봄은 다 가버리고 말았구나.' 봄의 끝자락에 선 나를 성질 급한 여름 냄새만이 성큼 몰려나와 에워싼다.


무서운 여름이 그렇게 나를, 다시 바짝 긴장하게 한다. 초여름의 유월, 어느 한밤의 풍경 속에 선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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