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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FREEBOW MAN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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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산의 카프카 May 24. 2023

11. 스페인 바르셀로나, 최고의 드러머와의 데이트

굶주림의 끝에 만난 한국인 드러머

오늘의 여행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별들과의 밤샌 대화를 마치고 독일 뮌헨을 거쳐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2012번의 Freebow도, 그리고 그 여정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구멍 난 지갑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아직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3일이나 남았는데 주머니에 남은 돈은 우리 돈으로 만원 언저리였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일단은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기념으로 Freebow부터 하고 보자는 생각에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일명 미완의 가우디 성당으로 향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우리나라 말로 성가정 성당이라는 뜻으로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영혼이 담긴 걸작이자 유작이며 그리고 미완의 성당이다. 1882년부터 건설을 시작했으나 10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건설 중이며 완공은 가우디 사망 100주기인 2026년이라고 한다. 미완이라고는 하나, 현재의 모습만으로도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유산의 반열에 들기에는 충분한 상태였다. 흘러내리는 듯한 가우디 특유의 곡선의 미가 성당 전체를 아우르며 종교를 떠나 이 건축물을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스러움을 선물하고 있었고 나 또한 그에 감응하여 절로 허리가 숙여졌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안토니 가우디 선생님. 부디 당신의 작품 앞에서 freebow를 하는 저를 이해해 주세요.’  


내 멋대로 이해와 용서를 바라고 사그라다 파밀라아 성당 앞에 위치한 공원에 자리를 잡고 Freebow를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 공원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지켜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당 앞 큰길로 통행하고 맞은편 공원으로는 오지 않는 듯했다. 목표한 2012번의 freebow도 다 되었고 성당의 위용에 압도당하기도 했기에 굳이 큰 길가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freebow가, 나의 여행이 끝이 보이지만 이렇게 의욕이 푹 꺾인 것은 아무래도 굶주림 때문이리라.  


배가 고팠다. 이틀 동안 말 그대로 빵 한쪽 밖에 먹지 못했다. 인류를 이끈 위대한 성인들은 몇 날 며칠을 허기를 잊고 깨달음을 추구했다고 하는데 내가 아무리 범인이라고 해도 고작 이틀을 굶었을 뿐인데 먹는 생각 밖에 나지 않았다. 몸 안에 힘이 하나도 없다. 엎드렸다가 일어나는 속도가 한참이나 걸린다.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고 억지웃음을 짓는 것도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래선 안 된다. 한 사람에게 절을 하더라도 진심으로 해야 한다. 지금의 내 상태는 결코 Freebow man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모습을 보고 그 누가 날 존중할 수 있으며 그 누가 존중의 의미를 느낄 수 있겠냐는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존중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먹어야 했다. 이건 절대 날 위해서가 아니다. 존중의 가치를 위해서다. 그렇게 날 합리화하고 방법을 구상했다. 사실 방법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주머니에 있는 만원을 쓰던가, 아니면 구걸을 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 행선지인 로마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티켓을 끊어야 하기 때문에 이 돈은 쓸 수 없다. 그렇다고 노력 없이 구걸하며 비참한 생을 이어가는 것도 싫었다. 


그때 불현듯 배낭가방 안에 담긴 목걸이가 떠올랐다. 한국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인도에서부터 지금껏 고이 간직하고 있던 선물이었다. 아무리 무거워도 가족들과 친구들을 떠올리며 가방 제일 깊숙한 곳에 넣어두고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었는데, 그 목걸이가 생각난 것이다. 목걸이는 넉넉잡아 30개 정도 되었다. 이 목걸이 몇 개를 팔아서 먹을 걸 사자. 몇 개를 판다고 해도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여기서 굶어 쓰러져 가족들과 친구들을 걱정시키는 것보다 목걸이를 팔아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들도 원할 것이라고 또 나를 합리화시켰다. 


생각을 정하고 나니 행동이 빨라졌다. Freebow를 위해 펼쳐 두었던 카펫 위에 목걸이를 펼쳤다. 그리고 주저앉았다. 1개당 10유로는 받아도 되지 않을까? 너무 비싸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인도에서 여기까지 들고 오는 비용을 고려하면 그리 비싼 가격은 아니겠지 싶었다. 정 안 팔리면 가격을 좀 낮출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판매가 쉽지 않았다. 살면서 뭔가를 팔아본 적이 없었기에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 마당에 무슨 자존심이 남아 있는 거냐. 이 녀석아!’라고 스스로를 꾸짖어 봐도 도통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잠깐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도 소극적으로 가격만 말할 뿐이었다. 지금까지 수천 명의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freebow를 하던 나는 어디 가고, 길거리에서 처음으로 물건을 파는 초보 잡상인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 공원에 앉아 있었다. 

“야! 나 여기서 사진 찍어줘” 

자책하고 있던 내게 한국말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20대로 보이는 한국인 여성 2명이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녀들은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는 나를 흘깃하고 성당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다급히 그녀들을 불러 세웠다. 

“안녕하세요? 한국분들이세요?” 

그녀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는 그들이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다급하게 말했다. 

“혹시 목걸이 사지 않으시겠어요? 이거 인도에서 산 목걸이인데 1개당 5유로에 팔고 있어요.” 

순간적으로 절반을 깎은 가격을 말했다. 제발 관심을 보이기를, 제발 사주시기를. 

“아뇨, 저희는 필요 없는데요.”

그리고는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정말 죄송한데, 제가 배가 너무 고파서 그렇습니다. 제발 하나만 사주세요.”

그녀들의 얼굴에 짜증이 피어올랐다.

“휴. 도대체 왜 그렇게 사세요? 돈이 없으면 여행을 오면 안 되죠.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 차일 때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녀들의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그녀들의 한숨이, 짜증이 실체화되어 예리하게 나를 후벼 팠다.

“야, 그냥 빨리 주고 가자.” 

그녀들은 지갑에서 10유로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비참했다. 더 비참한 건 떨리는 손으로 그 돈을 받는 내 모습이었다. 나는 10유로를 받고 그녀들에게 내 눈에 제일 예뻐 보이는 목걸이 3개를 건넸다. 그러나 그녀들은 받지 않았다.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연락처라도 가르쳐 주십시오. 한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갚겠습니다. 계좌이체 해드리겠습니다.”

“됐어요. 필요 없으니까 앞으로는 그렇게 옷 입고 돌아다니면서 이런 거 하지 마세요. 그런 거 다 나라 망신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들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거지가 되어 버렸다. 연락처도 받지 못했기에 평생 가도 그녀들에게 그 돈을 갚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고작 15,000원에 나는 내 자존심을 잃어버리고 한 달 가까이 존중을 위해 살아온 내 인생이 돈 없이 한량처럼 구걸하며 여행하는 여행객으로 비하되고 그렇게 그녀들에게 그렇게 기억되고 말았다. 그녀들은 평생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한복 입은 거지를 이야기할 터였다. 너무나 비참했다. 손에 쥔 지폐가 찢어져라 구겨지고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갔던 방향의 반대방향을 향해 냅다 달렸다.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 세트를 먹었다. 맛있었다. 햄버거를 입에 넣기 전까지 느꼈던 비참함이 눈 씻듯 사라졌다. 이렇게 맛있는 햄버거를 놔두고 그녀들에게 달려가서 돈을 돌려줄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니, 배가 불렀구먼. 좀 전까지 나를 괴롭혔던 번뇌가 배가 부르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단순한 것인가. 아니면 삶이란 것이 이다지도 단순한 것인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되지 못할 것이다. 

배가 부르니 그녀들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긴 여행에 너덜너덜해진 갓과 누렇게 때가 탄 한복을 입은 내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선비보다는 각설이 같았다. 시커멓게 때가 탄 소매로 건넨 목걸이가 그녀들의 화려한 옷차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들의 입장에서는 기대했던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꿈에 그리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앞에 두고 목걸이를 판매하려는, 돈을 구걸하는 나로 인해 기분을 망쳤으니 고운 말이 나오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도 같은 한국인이라고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셨으니, 그녀들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가게 앞 벤치에 앉아 부른 배를 두들겼다. 햇살은 따스하고 배는 부르고 당장 오늘 잘 곳이 없어도 만족스러운 현재였다. 잠깐 이렇게 벤치에 앉아 낮잠을 자고 오후에는 힘을 내어 freebow도 하고 목걸이도 팔자고 다짐했다. 목걸이가 잘 팔리면 오늘 잘 곳도 구하고 안 팔리면 하릴없이 스트라스부르에서처럼 노숙을 할 계획이었다. 역시 사람이 시작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또 그게 익숙해지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햇살을 이불 삼아 지그시 눈을 감고 낮잠을 청했다. 


“이보세요. 저기요.”

잠이 든 나를 누군가 불러 깨웠다. 비몽사몽 한 정신에 한국말로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잠결에 여기가 한국인지, 스페인인지 헷갈려 나를 깨운 언어가 한국말인지도, 내가 답변을 한국말로 한지도 몰랐다. 그 순간에는 길가에 노숙자처럼 잠을 청하는 내가 큰 잘못을 한 줄 알고 연신 사과부터 한 것이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를 깨운 사람은 건장한 체격의 한국인 남성이었다. 오전에 같은 한국인에게 혼난 기억이 있어서 어깨가 움츠려 들었다. 그래서 다시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잠깐 잠이 들었습니다. 이제 일어나서 다른 데로 가겠습니다.”

그러자 그는 호탕하게 웃더니, 말했다.

“저한테 왜 사과를 하고 그러세요. 밥은 먹었어요?”

불과 1시간 전에 햄버거를 먹었음에도 입은 “아니요”라며 거짓을 얘기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도 식전이라며 일단 밥부터 먹자며 근처의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자기가 주문하겠다며 몇 가지를 음식을 주문하고는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옷을 입고 여기서 뭐 하고 있었습니까?”


나는 그에게 freebow의 정신과 취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 캠페인을 수행하기 위해 인도를 출발해 런던을 거쳐 이곳 바르셀로나에 도착하기까지의 한 달간의 여정과 만났던 사람들, 내가 보고 느낀 것에 대해 꽤나 장황하게 얘기했다. 내 나름의 밥값이었다. 다행히 그는 중간중간 내게 호응을 해주며 웃고 때로는 비통해하며 청자로서 수준급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한참을 듣던 그가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할 거예요?”

“덕분에 배불리 먹고 푹 쉬었으니, 이제 오후에는 freebow를 마저 하려고 합니다.”

“아니, 로마로 가는 버스가 내일 있다면서요? 오늘 잠은 어떻게 하실 거냐고요?”

“뭐 지난번 스트라스부르에서처럼 캠핑장을 찾던지, 아니면 공공화장실을 찾던지 하려고요. 잘 되겠죠.”

그는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여기가 무슨 동네 시골인 줄 알아요? 여기 무서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거리에서 잠을 잘 생각을 해.” 

자기 일 같이 화를 내는 그에게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인사하는 나를 만류하고는 날 일으켜 세웠다.

“감사 인사든, 사과든 한 번이면 족해요. 너무 자주 많이 하면 그 가치는 떨어지는 겁니다. 일단 알겠으니까 나 따라와요. 오늘은 내가 당신의 천사가 돼줄 테니까.”

밥까지 얻어먹은 마당에 잠까지 신세 질 수는 없어서 거듭 거절했지만 그는 내 팔을 부여잡고 나를 인근의 숙소로 이끌었다. 그는 게스트하우스에 비용을 지불하고 말했다. 

“일단 여기서 좀 씻고 쉬고 있어요. 저녁 6시에 데리러 올 테니까 그때 만나서 못다 한 얘기도 하고 바르셀로나 구경도 좀 합시다. 괜히 FREEBOW 한다고 또 밖에 나가지 마시고. 아까 들어보니 거의 다했더니만. 오늘은 나랑 같이 좀 놉시다.”


눈물이 날 듯했다. 여기서 울면 괜히 그의 마음이 불편해질까 싶어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그를 배웅하고 그의 말마따나 깨끗이 씻고 숙소에 누워 낮잠을 청했다. 오늘 하루도 꽤나 이런저런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곧바로 잠에 빠졌다. 깨어나보니 어느새 약속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바삐 씻고 그를 맞이하러 밖으로 나갔다. 그는 약속한 시간 10분 전에 도착했고 나를 이끌고 저녁을 먹였다. 

“자. 밥도 먹었으니 바르셀로나 구경 좀 할까요? 가우디 대성당은 낮에 이미 보셨을 거고. 오늘 마침 분수쇼 하는 날이니까 그거나 보러 갑시다.”


나는 그를 따라 카를레스 부이가스 광장으로 갔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는 매주 주말마다 세계 3대 분수쇼 중 하나인 몬주익 분수쇼가 열리고 있었다. 운 좋게도 내가 방문한 요일이 주말이었고, 운 좋게도 이 분수쇼를 보여주는 천사가 내 옆에 있었다. 이른 저녁이었는데도 분수쇼 야경을 보기 위해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그 분수쇼를 잘 볼 수 있는 언덕의 계단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사고가 생겼다. 혼잡한 틈을 타 한 소매치기가 그의 지갑을 훔치려 한 것이다. 그는 크게 노하여 소매치기범을 잡아 다그쳤다. 다행히 지갑은 찾았지만 소매치기범은 사람들 속으로 황급히 달아났다. 


“봤죠? 여기가 이렇게 위험한 곳이야. 성종 씨 밖에서 잤으면 큰일 날 수도 있었어.”

화내는 그의 모습과 너무 대놓고 당당히 물건을 훔치는 소매치기에 놀란 것도 잠시, 눈앞에서 시작되는 분수쇼에 넋을 놓고 보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 준비했는지 맥주를 내게 건넸고 잠깐 맥주로 목을 축인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화내는 모습 보고 놀랐죠? 미안합니다. 그런데 여기 오래 살면서 저런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특히 우리와 같은 동양인을 우습게 알고 타깃으로 삼는단 말이지. 그래서 성종 씨가 하는 freebow에 놀랐어요. ‘이야. 뭐 이렇게 생각하는 청년이 있지?’ 하는 생각이었어. 현재 이곳에 살면서 인종차별을 겪고 있는 나는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차별을 하고 있었거든.”

“제 모습과 생각이 건방졌을 것 같아요. 잘 모르는 녀석이 뭘 안다고 이러지 하시고요.”

“하하. 사실 그런 부분이 없진 않았지. 그래서 너무 궁금한 거야. 당신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래서 못 참고 깨워버렸지. 근데 당신 이야기가 너무 재밌는 거야. 그래서 밥을 사줬던 거고. 밥 먹으면서 들은 이야기가 또 내 마음을 건드렸어. 그래서 숙소도 잡아준 거고. 그리고 이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지. 여하튼 당신은 대단해. 멋있는 사람이야.”

갑작스러운 그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몸을 배배 꼬며 쑥스러워하는 내게 그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드러머예요. 알죠? 드럼 치는 사람. 드럼은 늘 맨 뒤에 있잖아. 그리고 항상 보컬에 가려져 있어. 나는 그게 싫었어. 그래서 드럼 하나로도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드럼이 중심이 되는 그런 드러머가 되려고 무작정 독일에 왔어. 딱 성종 씨 나이일 때. 그리고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긴 시간을 보냈지. 올해가 졸업이야. 그 시간을 버텨낸 나를 위해 졸업축하 겸 여행 중에 성종 씨를 만났지.”

꿈을 위해 도전하는 사람은 늘 빛이 난다. 투명한 눈동자에, 그의 의지를 쏙 빼닮은 앙다문 입술에 그의 지난했던 세월과 그의 도전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뭘 새삼스럽게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요? 사람 민망하게. 하여튼 난 이제 자신감이 생겼어요.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세계 최고가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마음도 있어요. 이 정도의 결심도 없으면 어떻게 세계 최고가 되겠어요? 안 그래요?”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몬주익 분수쇼가 마치 그의 드럼 연주 같다. 그의 절실함을 담은 고백이 꼭 이뤄지기를, 그래서 이 몬주익 분수쇼를 보러 구름같이 모인 이 정도의 인원이 그의 드럼 앞에 서기를 바라본다. 


그와의 만남은 여기까지다. 그는 늦은 밤 나를 숙소에 데려다주었고 우리는 다음날 아침 다시 만나기로 했지만 시간이 엇갈려 만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와 만나기로 한 자리에 내 연락처를 적은 메모를 남겨두었지만 그가 그것을 봤는지 알 수 없다. 그로부터 연락은 없었지만 나는 지금도 무언가를 포기하고 싶을 때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때 인터넷 검색창에 “세계 최고의 한국인 드러머”를 검색하며 그를 떠올린다. 


바르셀로나에서의 또 한 편의 추억을 덧칠하고 나는 드디어 마지막 도시 로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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