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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산의 카프카 Apr 07. 2024

남산타워

#1. 모르는 전화

때때로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이 불편하고 어색해질 때가 있다. 숨 쉬는 방법이라던가, 웃는 방법이라던가. 지난밤에는 잠자는 방법이 불편했다. 어떻게 잠을 자는 거였더라? 괜히 양 몇 마리를 세어보다가 되려 또렷해지는 정신에 황급히 머릿속에서 지웠다. 매일 밤 이렇게 잠들지 않았었는데,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되는 것이었던가? 그렇게 잠자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잠을 잤지만 잠을 잔 것 같지 않은 기분이었다. 괜스레 두근거리는 심장이 왠지 오늘 하루, 무슨 특별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런 날은 꼭 어떤 일이 생겼었다. 몇 달간 애써왔던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가 이유 없이 중지되었을 때도, 사소한 이유로 아내와 다투고 화해의 기념으로 덥석 고양이를 입양한 그날도 이런 기분이었다. 


회사에 출근해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차라리 빨리 알게 되는 것이 나을 텐데, 마치 시험성적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기대 이하든, 기대 이상이든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보다 어서 발표된 성적을 확인하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을 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감사합니다. 남북회사 이종성입니다.”  

“이종성 씨?, 이종성 씨 맞습니까?” 

네, 제가 이종성입니다만, 어디시지요?”

아, 여기는 영월경찰서 생활지도과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정기옥 씨와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정기옥 씨가 어머니 되시죠?”


정기옥. 그 세 글자를 수화기에서 듣는 순간 가슴이 철컹 내려앉았다. 수년간 잊고 싶었던, 그리고 잊으려고 노력했던 그 이름이 다시금 내 인생에 비집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저는 그 사람과 연락 안 하고 지낸 지 5년이 넘었습니다. 법률적으로 모자관계일지는 모르나 실상 남남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신 것 같더라고요. 그렇긴 한데, 참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될지 모르겠네. 여하튼 저희가 지금 정기옥 씨를 보호하고 있는데 조금 문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전화로 설명드리기에는 조금 어려울 것 같은데, 이쪽으로 좀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 돌아가셨습니까?” 용기를 내어 물은 질문에 황당하다는 상대방의 헛웃음이 먼저 들려왔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멀쩡하시고요. 아니, 멀쩡한 건 아니네. 어머니께서 그러니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입니다. 정확한 건 저도 의사가 아니니까 어떤 상태라고 설명드리기는 어렵고 자세한 건 서에 오셔서 설명을 들으시고 병원에 같이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기억상실증? 이건 또 무슨 아침드라마에 나올 단어인가? 늘 그녀와 엮일 때면 평범했던 내 인생은 시트콤이 되거나, 숨 막히는 드라마가 되어버리고 만다. 5년 만에 돌아온 그녀는 또다시 내 인생을 뒤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을 채 정리도 하기 전에 그럼 서둘러 오시기 바란다는 경찰의 이야기에 이렇다 할 말을 전하지 못하고 통화가 종료된 것은. 언제까지 가야 되는 것인지, 꼭 가야 되는 것인지 물어볼 것이 산더미였건만 당황한 사이 끊어진 전화에 한참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가야 될 것인가. 무시할 것인가. 남은 오후 일정과 내일 회의일정을 챙겨 보는 것을 보면 무의식은 이미 가야 된다고 결정을 내린 듯했다. 그토록 연을 끊고자 했건만 엄마와 자식이란 천륜은, DNA에 아로새겨진 인연의 끈은 사람의 의지로 조절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팀장님께 어렵사리 “개인사정”으로 급히 휴가를 써야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탐탁잖은 팀장님의 표정을 보니 아마 내 얼굴도 별반 다를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바쁜 와중에, 황금 같은 휴가를 이 사람을 위해 써야 한다니! 뭐 어떻게 개인사정으로 팀장님께 승인은 받았지만 또 집에는 어찌 이야기를 해야 하나? 어머니란 사람과 마지막 만남은 장례식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던 내가 갑자기 어머니를 만나러 강원도에 간다고 하면 와이프의 표정은 팀장님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쏘아붙이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와이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내일 또 어떻게 찾아갈지. 뒤숭숭한 마음으로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정리하고 퇴근할 때 또다시 그다지 받고 싶지 않은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누나였다. 

“야. 너 전화받았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글쎄!”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부터 꺼내는 누나를 보니, 나이를 먹어도 변한 게 없구나 싶어 가슴이 답답해졌다. 

“왜 웃어? 이게 웃을 일이야? 이 상황에 웃을 수 있다니, 너도 참 너다.”

“다행이네. 그래도. 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누나한테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도 못 했는데, 경찰이 알아서 누나한테 설명을 했나 보네.”

“기억상실증은 뭐냐고 그러니까. 그리고 강원도? 어디 영월? 연고도 하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또 거기까지 간 거냐고!”

내가 묻고 싶은 것을 나한테 묻는 것을 보니 누나와 나는 정기옥이란 사람의 뱃속에서 같이 나온 친형제가 맞는구나 싶었다. 

“누나도 그렇겠지만 나도 지금 정신 하나도 없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가긴 가야 되지 않겠나? 일단 가서 상황을 보고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할 것 같은데. 근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상황이 상황인지라 강원도까지 갈 수도 없고. 정말 미안한데 혹시 네가 한 번 올라가서 만나보면 안 되겠나? 아무리 그래도 엄만데, 그래도 일이 이렇게까지 됐다는데 자식이 가서 한 번은 봐야지.”

그 짧은 이야기를 하면서 누나의 목소리는 금세 눈물로 덮였다. 화가 눈물로 바뀌기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소리부터 친 것도 나를 강원도로 올려 보내기 위한 큰 그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답 없이 가만있으면 과거에 몇 번이나 날 설득시키기 위해 그러했듯이 온갖 눈물공세로 나를 괴롭히겠지. 

“안 그래도 내가 가려고 했어, 누나. 누나 사정 뻔히 아는데, 갑자기 누나가 거길 어떻게 가겠어. 물론 같이 가면 좋겠지만. 그 사람 때문에 둘이나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 누나 말대로 일단 올라가서 경찰관이랑 대화해 보고 어떤 상황인지 확인해 볼게. 누나도 잘 알잖아? 그 사람 거짓말의 달인이라는 거”

누나는 잠시동안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를 그 사람이란 단어로 지칭한 것이 마뜩잖은 듯 힘찬 콧김만 몇 차례 내뿜었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나를 올려 보내려면 내 비위를 맞춰야 할 텐데.

“여하튼 내일 휴가 쓴다고 회사에도 얘기했어. 갔다 와서 전화할 테니까 오늘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자.”

전화를 끊고 싶은 내 바람과 달리 누나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지난날 어머니의 행동과 그리고 자신이 아이들을 키우며 느끼는 모성애에 대해, 마지막으로 남편과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까지 다 듣고 나서야 내 작은 바람은 이뤄졌다. 굳이 누나가 그녀의 고단한 삶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녀를 이해했겠지만, 이 또한 누나의 성격이고 누나 나름의 내게 대한 미안함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집으로 가서 내 나름의 사죄를 해야 할 차례였다. 


“고생했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보며 마중 나온 와이프는 짧은 인사를 건네 왔다. 그녀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연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5년 간의 결혼생활은, 그녀의 작은 눈짓만으로도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나를 진화시켰다. 다행히 오늘의 그녀는 그리 기분이 나 빠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를 듣고도 그러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보, 문제가 좀 생겼어.” 

“무슨 문제?” 

“내일 급하게 강원도 영월에 좀 가봐야 될 것 같아.”

“출장이야? 무슨 출장이 갑자기 영월이래?”

“출장이 아니라, 어머니 때문에. 강원도 영월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어. 일이 생긴 것 같아.”

그제야 와이프는 된장찌개에서 눈을 돌려 나를 돌아봤다. 그녀의 미간이 움푹 들어가 있다. 위기상황이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또 왜?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전화로 하기는 좀 복잡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자세한 건 나도 내일 가봐야 될 것 같고. 간단하게 듣기로는 어머니가 기억상실증이 걸렸다고 하는 것 같은데.”

깊고 깊은 와이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한숨 쉬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라는 걸 그녀는 모르는 걸까. 이어서 체념한 듯이 ‘알아서 하던지’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굴 속으로 칩거한 그녀를 대신에 끓이다 만 된장찌개를 마저 끓인다. 된장찌개 속 두부가 거친 내 숟가락질에 조각난다. 그저 살기 위해 채 익지도 않은 감자덩어리를 입으로 구겨 넣는다. 어서 오늘 하루가 끝나기를, 아니 일어나면 이 모든 일이 지난밤 꿈이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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