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香) 에세이] 기억을 맡다

사춘기의 반감기에 남겼던 추억집착 스토리

경운기와 소가 공존하던 시절도 있었다


‘식사’와 ‘끼니’, ‘자식’과 새끼‘ 그리고 ’입‘과 ’주둥이‘. 비슷하다, 그리고 또 다르다. 그 둘 중 하나는 뭇 사람들이 소위 ’저속하다‘라고도 느끼는 말이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저속하지 않기도 하다. 저속하지 하다 할지라도 정겨울 수는 있다. 이러한 ’정겨운 저속함‘을 내가 그리워하고 있다. 바로 ’냄새‘. 그것은 향이라고 칭하기는 싫은, 내가 추억하고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의 냄새였다.


외할머니께서 장날 우리를 위해 사놓은 종합캔디와 라면박스가 있던 다락방의 냄새, 추운 겨울 차가운 부엌에서 끓이시던 우거지 국의 잠 오는 냄새, 눈을 쓸기 위해 손수 만드신 빗자루의 겨울나무 냄새. 이 모든 것이 그립다. 그래서 이들을 나는 향이 아닌 냄새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가 삶을 꾸리기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잠시간의 휴식이 필요하듯이, 아리따운 향을 찾아 스스로의 후각을 괴롭히는 와중에 잠시 냄새의 추억에 젖는 것도 나쁘지 않은 휴식일 것 같다. 향과 냄새의 주객전도된 이야기.


/경운기와 흙/

어린 마음에, 시골에서 먹는 밥과 반찬은 깨끗하지 못 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왠지 어디엔가 흙이 묻어있을 것 같고, 닭장에서 바로 꺼내온 계란조차 싫어했던 그 철없음. 그리고 몸을 씻기에도 고단한 외할머니의 땀 냄새 밴 꽃무늬 몸빼 바지. 그래도 어른이 되어 전보다는 조금 철이 든 후에는 그 흙냄새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경운기가 탈탈탈 내뿜는 매연도 사랑하려 했고, 흙 묻은 새참용 막걸리도 사랑했다. 멀어지니 더 그립고, 정겹고, 사랑스럽다.


/외양간과 여물/

영화 ‘식객’의 한 장면 중, 성찬이가 키우던 소가 도살장을 들어가다가 뒤를 돌아 성찬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것이다.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의 짭조름함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터이지만, 내가 그 장면에서 느낀 냄새는 소가 먹던 여물냄새, 그리고 외양간 안의 찬바람 냄새이다. 내가 기억하는 많은 시골의 냄새 중에서, 이 여물냄새는 워낙에 오래되어 잘 기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외양간의 냉기, 찬바람 냄새는 지금도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가 있다. 형용하기 어렵지만, 그 냄새는 약간 무언가가 타는 냄새와도 같았다.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찬바람을 맡아볼 수 있어서이다. 무색유취한 그 추억의 공기도 그리워진다.


/가마솥과 아궁이/

시골을 떠올릴 때 가마솥과 아궁이를 이야기 하는 것은 진부하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가마솥과 아궁이는 시골의 냄새를 담는 일종의 병(甁)과 같은 것이다. 입으로는 흰 쌀 밥의 꼬들꼬들한 맛을 삼키며, 코로는 가마솥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장작불 냄새를 마신다. 눈으로는 산 너머 지고 있는 석양의 아련함을, 엉덩이로는 방바닥의 따뜻함과 아늑함을 담는다. 그러고 보니 냄새란, 특히 시골의 냄새란, 내게 있어서 1차원적인 후각이 아닌 다차원적 오감이다. 그래서인지 다시 느껴보기 더 어려운 냄새가 되었구나.

아궁이.jpg 외할머니의 참기름을 부으면 불이 붙는 줄 알고 참기름을 부었다

/천원과 뻥튀기/

이럴 줄 알았으면, 구권 천원 지폐를 몇 장을 책상 서랍에 보관할 걸 그랬다. 천원 지폐의 냄새가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리고 맡고 싶다. 냄새라는 것이 꼭 맡으라고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두세밤 외할머니댁에 머무르다가 서울로 돌아간다며 인사를 드리면, 과자 사먹으라며 손도 아닌 주머니에 꾸역꾸역 넣어주시던 천원 지폐 두 장. 이상한 정신세계를 가졌다고 매도해도 기쁘다. 그 천원 지폐 두 장 쓰지 말고, 앨범에 담아둘 것을 그랬다. 흙 내음 나는 그 지폐가 그립고, 그 돈으로 기차역에서 샀던 뻥튀기의 투박한 냄새도 보고 싶다.


/세수와 빨래/

공중목욕탕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딱딱하고 오래 가는 비누, 모두들 한 번쯤은 사용해본 적이 있을 그 원색의 비누. 아마 외할머니는 우리에게 줄 몇 천원의 돈을 아끼시려 이 비누를 박스째 사서 다락방에 놓으셨는지도 모른다. 아침잠이 덜 깬 채 찬물에 세수를 하고 나서 내 코를 맴도는 그 비누향. 가끔 그것은 빨래에도 쓰였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마트에서 이 비누를 사다가 슬짜ᅠ각 화장실 세면대에 올려놓으면, 내가 아닌 다른 가족은 그 시간을 떠올릴 수가 있을까. 이번 토요일에는 황학동 풍물시장을 찾아, 투박한 느낌의 비누를 찾아봐야겠다.


기억은 냄새다. 냄새는 보인다. 냄새는 만져지기도 하고 손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냄새는 코로 맡지만, 때로는 가슴으로 맡기도 한다. 오랜만에 기억을 맡아보았다. 이러한 냄새를 담는 향수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쉬워도 해본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의 마음이 같이 동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에 손에 넣기 어려워 더 아쉽고 그리워지는 냄새 하나를 떠올리셨으면 한다. 내 손에 닿기 어렵고 담기 어렵기에, 머릿속에 남은 그 기억을 맡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향(香) 에세이] 괜한 투정이 생기던 비누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