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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Apr 21. 2023

수치스러운 대헌장

영국에서 대헌장이라 불리는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는 1215년 귀족들이 존 왕의 잘못된 정치에 분노하여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 문서라고 한다. 여기서 귀족을 분노하게 한 왕의 잘못된 정치는 무엇일까?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존은 프랑스로부터 노르망디를 되찾기 위해 엄청난 군비를 사용했다.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오다 납치된 사자왕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의 몸값으로도 많은 돈을 지출했다.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세금을 인상했다. 


존 왕은 재임 17년 동안 병역 면제세(Scutage)를 11배나 올렸다. 관세를 인상했고 일종의 상속세를 징수했다. 토지 임대료를 올리고 영주의 토지를 침해하거나 몰수했다. 그는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귀족의 자산을 몰수했으며 예고 없이 법을 선포하고 소급 처벌했다. 돈이 궁한 그는 교황에게 납부하는 보호비 지급마저 중단했다.


왕은 이론적으로 교황의 가신이었다. 왕은 토지의 소유권을 교황에게 넘기었기 때문에 영국 땅은 교황 소유였다. 왕은 토지를 임대하여 사용하고 그 대가로 교황에게 일정 금액을 납부해야 했다. 


존 왕은 매년 은화 일천 마르크를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교황에게 바치는 일종의 보호비였다. 교황은 이 돈을 받고 왕에게 반항하는 영주를 파문하여 주었다. 왕이 보호비 납부를 거부하자 교황 이노센트 3세는 1209년 존 왕을 파문하고 공식 폐위시켰다. 존은 파문에도 몇 년을 잘 버티었으나 결국 바티칸의 위세에 굴복하고 보호비를 다시 납부했다.


1214년 존 왕의 노르망디 침공이 다시 실패하자 영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은 스스로 신의 군대라고 부르며 런던을 점령하고 왕을 압박했다. 반란은 1215년 6월 왕이 런던 외곽에서 대헌장이라 불리는 합의문에 서명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존은 귀족들의 위세에 눌려 대헌장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세 유럽에는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많은 헌장(Charters)이 있었다. 따라서 대헌장(Magna Carta)은 절대 새롭거나 고귀한 서류가 아니었다.


대헌장은 세부적으로 63장으로 이루어졌지만 4개의 큰 원칙으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존 왕은 불법적으로 탈취한 모든 재산을 돌려준다. 둘째, 왕은 과거와 같이 재산의 탈취, 납치 및 처형을 하지 않는다. 셋째, 시민의 권리를 법제화하고 이를 모든 시민에게 확대한다. 넷째, 이러한 권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한 세부 절차를 정한다. 


대헌장은 이로써 의회의 동의 없이 새로운 조세를 부과할 수 없다는 것을 명문화했다. 또한 영국 법이 보호하는 대상을 성직자 및 귀족에서 모든 자유인에게 확대했다. 이는 그리스 민주주의 이후 처음으로 가난한 농부와 왕이 법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더하여 대헌장은 존 왕의 월권행위를 심사하여 이를 되돌릴 수 있는 25명의 영주로 구성된 위원회도 설립했다.


존 왕은 처음부터 대헌장을 준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왕은 배신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존은 대헌장에 서명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군대를 모집하고 반격을 시작했다. 왕은 바티칸에 투자한 결실을 뒤늦게 맺었다. 1215년 8월 교황은 대헌장을 무효로 하는 칙서를 발표하면서 이를 “수치스럽고, 품위를 손상시키며, 불공정하다.”라고 했다. 


여기에 더하여 교황은 반란을 이끄는 봉건 영주를 파문했다. 새로운 내전은 존 왕이 일찍 사망하여 피할 수 있었다. 존은 교황의 칙서 발령 이후 1년이 지나지 않아 이질로 사망했다. 왕의 후계자 헨리 3세는 9살로 보호자가 필요했다. 섭정 윌리엄(William the Marshal)은 일흔의 나이에도 반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정도로 힘이 있었으나 어린 군주를 위해 타협을 선택했다. 헨리 3세와 윌리엄은 타협을 위해 대헌장을 두 차례나 더 승인했다. 헨리 3세도 왕으로 즉위하면서 대헌장을 재확인해야 했다.


영국 왕은 대헌장에 의해 원칙적으로 의회의 동의를 받아 새로운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다. 왕이 새로운 세금을 요구하면 의회는 왕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했다. 이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영국 의회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영국 국민이 누리는 자유와 재산권 보호는 왕에게 세금이라는 돈을 주고 산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의회는 왕에게 1년이 넘는 과세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의회가 왕의 권력을 제한하자 영국 왕은 교묘한 방법을 찾아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법의 구속을 피하여 세금을 징수하려는 왕의 탈선과 이를 막기 위한 의회의 견제는 수백 년 동안 계속됐다. 왕이 노리기 쉬운 재산은 공인 종교가 아닌 종교와 유대인의 재산이었다.

***

영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한 이유는 좋은 조세제도 때문이다. 재산권을 보장하는 영국의 조세제도는 현명한 지도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 세금을 싫어하는 시민들이 만들었다. 시민들은 납득할 수 없는 세금의 납부를 거부했다. 시민들은 세관에 방화하고 세리를 폭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국왕과의 싸움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영국은 양식 있는 판사, 철학자, 시민의 힘으로 왕으로부터 개인의 재산권과 자유를 지킬 수 있었다. 재산권을 존중하는 영국 법치주의의 선례가 없었다면 유럽의 번영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

비슷한 시기 중국 송나라는 화약, 나침반, 인쇄기술을 개발했고 세계 최대 철강 생산국이었다. 중국은 기술 선진국이었으며 인구 부국이었다. 중국이 이후 쇠퇴한 이유는 관료들이 자본과 기술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는 관료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했다. 관료들이 지지하는 산업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정책이 바뀌면 해당 산업은 퇴보하였다. 자본은 자유롭게 재투자될 수 없었으며 막대한 부는 관료의 주목을 받았다. 관료들은 교묘하게 뇌물을 받거나 재산을 몰수하거나 해당 산업을 국유화했다.


중국 황제는 무제한적 이윤 추구로 상인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실제 당나라를 붕괴시킨 황소의 난도 상인들이 일으킨 난이다. 중국은 문민 관료를 우대하여 왕에게 부담스러운 상인과 군인을 통제했다. 관료들은 예측할 수 없는 조세로 상인을 통제했고 군인은 군비를 죄어 쿠데타를 억제했다. 관료들은 국가 발전을 희생하더라도 이들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중국은 이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으나 대가가 있는 조치였다.


군인들에 대한 통제는 국방을 약화시켰고 상인들에 대한 통제는 새로운 기술과 자본의 축적을 어렵게 했다. 유교적 가치 하에서 상인들은 자신의 지위를 낮추고 역할을 스스로 제한했다. 그들은 상거래와 기술혁신에 투자하는 대신 땅에 투자했다. 자녀 교육에서도 관료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과거시험에 투자했다. 중국에서 관료가 번성하는 동안 기술 발전은 더디어졌고 국력은 쇠락했다. 반면 서양은 대헌장과 같은 재산권 보호장치를 통해 약탈적 세금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업과 산업이 발전하게 됐다. 근대 동양과 서양의 기술과 국력 차이는 약탈적 세금 때문에 만들어졌다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Medieval England: How Englishmen Purchased Liberty with Taxes, page 162-166, 

The Birth of Plenty (William J. Bernstein, The McGraw-Hill Companies, 2004), England’s happy accident, page 68-73, 

Those Dirty Rotten Taxes (Charles Adams, Simon & Schuster 1998), There Were Giants in the Earth in Those days, page 19, 

Fight Flight Fraud (Charles Adams, Euro-Dutch Publishers,1982), Medieval England, page 119-124, 

Daylight Robbery (Dominic Frisby, Penguin Random House UK 2019), The Greatest Constitutional Document of all time, page 44-47

The Pursuit of Power (William H. McNeil,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The Ear of Chinese Predominance, page 4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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