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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Apr 23. 2023

영국 국교회 탄생의 비밀

영국 국교회는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로 교황과 대립하다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헨리 8세는 형이 죽자 형수였던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 결혼하고 1509년 왕위에 올랐다. 헨리 8세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자 1527년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려 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거부했다. 


교황의 반대에도 영국 대법관 크롬웰(Thomas Cromwell)은 1533년 새로운 결혼을 승인했다. 이후 그는 대주교가 되어 헨리의 첫 번째 결혼이 무효라고 공식 선언했다. 헨리는 이 일로 교황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이러한 공식적인 설명 뒤에는 재미있는 세금 이야기가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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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종교개혁을 돈 문제라고 보면 이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당시 영국 인구는 3~4백만으로 프랑스나 스페인에 비해 작은 나라였다. 허풍쟁이로 알려진 헨리 8세는 약한 국력에도 독일 용병을 고용하여 끊임없이 외국을 침공했다. 헨리는 1513년 스코틀랜드, 1522년과 1528년에 프랑스 침공을 단행했다. 1513년 스코틀랜드 침공에서 헨리 8세는 70만 파운드의 재정수입 중 63만 파운드를 전비로 사용했다. 당시 재무장 관 월씨(Wolsey)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강제 대출, 헌납(Benevolence)을 강요하여 악명이 높았다. 막대한 전쟁 비용에도 헨리는 사치와 낭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를 방문할 때 금으로 장식한 범포를 달고 항해했다. 사치는 왕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당연한 것이었다.


헨리는 전쟁을 위해 새로운 조세를 원했지만 영국 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헨리는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왕이 부과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전쟁세(Supplementary Subsidy) 등을 부과했지만 사람들은 이를 납부하지 않았다. 헨리는 할 수 없이 이 세금을 포기하고 다시는 영국 국민이 원하지 않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이는 허풍쟁이의 진심이 아니었으며 그는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헨리의 관심은 교회로 향했다. 교회와 수도 원은 막대한 땅과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교황은 십일조와 자산임대수입으로 매년 엄청난 수입을 거두고 있었다. 교황은 세금 문제로 의회와 다툴 필요가 없었지만 수입은 헨리 8세보다 훨씬 더 많았다.


영국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금과 은을 무역으로 확보했다. 어렵게 구한 이들 귀금속은 영국에서 유통되지 않고 교황에게 흘러갔다. 영국은 이로 인해 통화 부족 문제를 겪었고 이는 기업 활동을 위축시켰다. 상인들은 국제통화 금과 은이 교황에게 흘러가는 것을 반대했다. 헨리 8세는 이러한 불만을 이용했고 영국 의회는 1529년 교황에게 귀금속 송금을 금지했다. 이는 교황에게 이혼을 신청하기 이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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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의 돈을 착복한 헨리 8세의 이혼 요청을 당연히 거절했고 그는 1538년 헨리를 파문했다. 이때는 유럽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헨리는 파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 의회는 헨리를 영국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선언하면서 국왕을 지지했다. 헨리 8세가 교황을 제치고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된 것이다. 


헨리는 교회가 가지고 있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강탈한 것이다. 이는 영국 역사상 가장 큰 공식 강도 사건이자 자산 재분배 사건이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에 일어났다.


헨리는 종교개혁으로 재정수입을 두 배로 늘렸고 재정은 안정됐다. 하지만 헨리는 이후 프랑스, 스코틀랜드와 전쟁에서 2백만 파운드가 넘는 돈을 탕진했다. 이는 정상적인 재정수입의 10배에 이르는 지출이었지만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오지도 못했다. 헨리는 교회 토지의 헐값 매각, 혐의를 조작한 귀족의 재산몰수, 은행에서 강제 대출, 은화 및 금화의 함량을 줄이는 평가절하, 조세 징수 확대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는 매주 일요일 1회 단식한다는 가정하에 매주 1끼의 식사 비용에 과세하는 금식세도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헨리 8세는 많은 빛을 엘리자베스 1세에게 넘겼다. 엘리자베스는 세금을 늘리는 대신 스페인 무역선을 약탈하는 해적 사업에 투자했고 15년 후에야 비로소 유산으로 받은 재정 문제를 해결했다. 그녀가 해적여왕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헨리가 교회 재산을 몰수하자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지금까지 수도원에서 돌보던 가난한 사람, 병자, 고아 및 부랑자를 돌봐 줄 사람이 없어졌다. 이제 이 불행한 사람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헨리는 마을에서 피난처와 돌봄을 제공하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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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를 파문한 교황은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에 특사를 파견하여 영국과 국교를 단절하고 상거래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외교 단절은 곧 전쟁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헨리는 이 사태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대륙에서 영국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와 적군이 이미 스코틀랜드로 출발했다는 소문이 떠 돌았다. 


네덜란드는 헨리 8세가 주문한 대포 300기의 계약을 취소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정 박하고 있는 모든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다. 영국은 이를 전쟁에 대비하여 배를 징발하는 전 단계라 믿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영국 배의 출항까지 금지시킴으로써 영국은 전쟁 선언과 동시에 이들을 몰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 헨리 8세는 모든 상선을 해군 함정으로 무장시켰다. 해안을 방어하는 성벽도 쌓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가장 큰 성곽 구축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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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 달리 새로운 십자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십자군 전쟁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당시 이탈리아반도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나뉘어 있었고 전쟁이 빈번했다. 이탈리아 도시 간 주도권 다툼도 교황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톨릭 교회 자체도 끝없는 부패에 시달렸고 이에 반발하는 종교개혁 운동으로 병약해졌다. 로마 시내가 반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교황이 연금당할 정도였다. 힘 빠진 교황은 헨리 8세의 반란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영국의 종교개혁은 완성됐다.



참고문헌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Paul Kennedy, First Vintage Edition 1989), International Comparisons, page 60-63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After Magna Carta, page 240-242, 

Fight Flight Fraud (Charles Adams, Euro-Dutch Publishers,1982), The True Sovereign of England, page 185-187 

Those Dirty Rotten Taxes (Charles Adams, Simon & Schuster 1998), Fiscal Whiz-kids or Nitwits? page168-169

The March of Folly (Barbara W. Tuchman, Random House Trade paperback edition 2014), The Sack of Rome: Clement VII page 127-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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