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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Apr 26. 2023

대혁명의 도화선, 세금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모순 덩어리이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기본 이념으로 하고 있지만 독재자가 통치했다. 혁명은 주변국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군대를 주둔시키고 사유재산을 약탈했다. 주변 국가는 프랑스에 전쟁 배상금과 세금을 납부하고 젊은이들을 침략 전쟁에 보내야 했다. 


나폴레옹은 봉건제도 폐지, 국내관세 철폐, 국가행정체계 통일, 중산층(bourgeois) 중심 정책 등 사회 혁신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는 혁명의 도화선이었고 자신을 몰락하게 만든 세금 문제는 전혀 해결할 수 없었다. 세금은 프랑스 혁명의 원인과 나폴레옹의 패망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재정(돈)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자금 부족으로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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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모든 왕조가 그러하듯이 18세기 프랑스 왕의 유일한 관심사는 재정수입 확보였다. 프랑스는 영국과 7년 전쟁에서 패했고 엄청난 비용을 지출했다. 천문학적인 부채에도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 전쟁을 지원했다. 경쟁국 영국을 이기고 싶은 자존심과 명예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도움으로 미국이 독립하면 대서양 무역의 주도권을 프랑스가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루이 16세는 7년 전쟁보다 더 많은 10억 리브르 이상의 빚을 져가면서 미국 독립을 지원했다.


영국은 미국 독립으로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영국은 해외에서 가장 큰 식민지를 잃었으며 2억 파운드 이상의 전쟁 부채를 지게 됐다. 프랑스는 전쟁 중간에 끼어들었고 많은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비용은 영국의 절반이었다. 전쟁의 승패와 비용의 차이에도 양국은 예상과 다른 길로 가게 된다. 


패전한 영국은 상처를 회복하고 번성했고 승리한 프랑스는 오히려 혁명을 겪게 된다. 양국의 차이는 재정조달 능력에 있었다. 영국은 패전에도 3%대의 금리로 자금을 조달했다. 금융시장에서 신뢰가 높았기 때문이다. 국가부도가 빈번하던 프랑스는 이보다 두 배 높은 이자를 지불했다. 부채는 영국이 2배 더 많았지만 양국 모두 재정수입의 절반 이상을 이자비용으로 지출했다. 이후 영국은 재정 개혁으로 부채를 갚아 나갔지만 프랑스는 매년 새로운 부채를 발행하여 적자가 늘어났다.


대서양 무역의 주도권을 차지하려던 프랑스의 희망은 절망으로 돌아왔다. 영국은 금융과 무역의 힘으로 전쟁 부채를 갚았다. 영국 해군은 해상 교역로를 지속해서 순찰했으며 상인은 미국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수출했다. 영국은 1789년 전쟁 이전 수준으로 대서양 무역을 회복했으나 프랑스는 재정 개혁에 실패하고 국가부채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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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귀족과 성직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세금을 납부하는 불공평한 조세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과도한 세금은 조세 폭동을 빈번하게 불러왔다. 대표적으로 나쁜 세금으로 토지 및 재산에 부과되는 타유(Taille)라는 직접세가 있었다. 타유는 프랑스 조세수입의 80%를 차지했고 영국과 백년전쟁에서 재원을 조달한 세금이었다. 


타유가 모든 토지 및 재산에 공평하게 부과된다면 좋은 세금이나 성직자와 귀족은 면제됐다. 기사의 검과 성직자의 기도는 국가를 위해 이미 자기 희생을 했다는 이유였다. 일부 지방은 낮은 세율의 타유가 적용되거나 면제됐다. 타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농민들만의 세금이 됐고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프랑스 농민은 타유(Taille)뿐 아니라 수확의 9%에 이르는 십일조를 교회에 납부해야 했다. 흉작이 들거나 생필품 가격이 오르면 이는 치명적이었다. 조세부담이 과도하면 농민들은 토지를 귀족에게 넘기고 그 땅을 경작하는 소작농을 선택했다. 귀족은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지만 소작농에게 영주세와 소작세를 징수했다. 


세금을 면제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귀족의 신분을 사거나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엄청난 특권이고 좋은 투자처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기업을 창업한 듀폰(Pierre Samuel Dupont)은 “부자는 (돈으로) 귀족이 될 수 있다. 귀족은 세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 세금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부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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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간접세를 통해 재정수입 대부분을 징수했다. 간접세는 관리하기 편하기 때문에 국가가 선호하지만 가난한 농부가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한다. 프랑스는 직접세 타유의 불공평에 더하여 농부에게 가혹한 간접세 부담을 지웠다. 


일부 학자는 이러한 정책을 옹호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은 잡초와 같아서 많이 깎을수록 더 강해진다 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조세부담을 늘리면 생존을 위해 노력하여 사회전체의 생산성이 높아진다 했다. 따라서 빈자 과세는 빈곤을 해결하는 좋은 정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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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민간인 조세농부에게 세금 징수를 위탁했다. 조세농부는 관세, 담배, 소금, 와인 등에서 세금을 징수했다. 조세농부는 세금 징수를 위해 개인 사생활을 침해했고 폭력을 상습적으로 사용했다. 당시 조세농부의 수는 20~30만 명이었으며 이는 프랑스 전체 인구의 2% 이상이었다. 인구의 2%가 세리라면 현재 3만 명 정도인 우리나라 국세청과 관세청 직원은 백만 명 이상으로 늘어나야 한다. 세리의 숫자가 많으면 시민들은 매일 세리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국경에서 관세를 징수하기 어려웠다. 출입을 통제할 육지 국경과 해안선이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는 도시 외곽에 담장을 쌓고 출입구에서 관세를 징수했다. 이러한 국내 세관은 불어로 옥트로이(Octroi)라 불린다. 프랑스 세리는 베를린 장벽같은 벽을 도시 외곽에 설치하고 출입하는 사람의 짐을 일일이 검사하고 과세했다. 


공식 설명에 의하면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은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라 한다. 하지만 실제 시민들은 저주하고 가장 먼저 방화한 장소는 프랑스 세관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789년 7월 12일 폭도들은 프랑스 세관(Octroi)을 습격하였다. 폭도들은 왜 프랑스 세관을 가장 먼저 습격했을까?


파리 세관은 반입되는 모든 물건과 출입하는 사람 모두를 철저히 검사했다. 세관 업무는 29개 세관 출입구에 453명의 직원이 수행했다. 엄청난 숫자이다. 관세는 식품, 음료, 건축 자재 등 모든 물건에 부과되었지만 권력자에게는 낮은 세율이 적용됐다. 사생활을 침해하고 권력자에게 특혜를 주는 파리의 옥트로이는 시민들의 증오 대상이었다. 


더 큰 문제는 파리 주변이 개발되고 도시가 커지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50년의 세월이 지나 담장 주변에 많은 주택이 생기자 담장을 넘어 다니는 밀수가 성행하였다. 조세농부 주식회사는 이를 막기 위해 신규주택을 포함하는 새로운 담장이 필요했다. 거대한 담장 건설사업은 6년 동안 계속됐다. 유명 디자이너가 설계한 세관 현대화 사업에서 세관은 45개로 늘었고 1789년 7월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세관이 가장 먼저 불탄 이유는 일상 생활을 억압하는 불공평한 세금에 대한 시민들의 저주였다. 당시 한 작가는 “악마가 프랑스를 망하게 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면 악마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이 현재의 조세 제도를 그대로 가져가면 될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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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재정수입을 위해 작위와 공직까지 판매했다. 관직을 파는 것은 16~17세기 유럽에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시민의 입장에서 관직을 구매하는 것은 일종의 투자였다. 관직의 가격은 관직이 주는 사회적 지위와 기대 수입에 의해 결정됐다. 부자는 관직을 사서 명예를 얻고 실제 업무는 다른 사람에게 위임했다. 관직은 양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관직 가격이 오르면 별도의 투자 수입도 가능했다. 부자들이 당시 관직에 투자하는 것은 일종의 장기 연금에 투자한 것과 같았다.


황제는 관직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팔았다. 황제 주변에서 변기 시중을 드는 자리도 관직으로 판매됐다. 브리트니 지방에는 양을 키워 가죽을 생산하는 사람이 많았다. 왕은 ‘가죽검사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팔고 법으로 모든 양가죽을 검사하도록 했다. 명분은 가죽의 품질 향상이지만 숨은 의도는 검사 수수료이다. 수수료는 가죽검사관에게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준다. 그는 현지에 대리인을 고용하고 파리 시내를 벗어날 이유가 없었다. 패자는 양치기 목동과 소비자이다. 가죽의 품질 검사는 실질적인 가치가 없었고 가죽 생산자에게 부과한 새로운 조세일 뿐이었다.


신흥 부자는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작위와 공직은 낮은 출신을 감출 수 있는 수단이었다. 부자는 자기 아들을 미래가 보장되는 관료 또는 조세농부로 키우고자 했다. 왕은 작위와 공직을 판매하여 지금 당장 수입을 만들고 미래의 수입을 포기했다. 16세기 황제는 관직을 이중 삼중으로 판매했다. 관직을 산 관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세 사람이 돌아가면서 자리를 맡기도 했다. 프랑스는 종교전쟁 당시 재정수입의 30~40%를 관직 판매에서 조달했다. 이후 황제는 관직을 가진 사람에게 매년 관직 가격의 1/16을 납부하도록 했고 관직은 일종의 재산권처럼 행사되고 상속됐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루이 14세의 말은 허풍이었다. 그는 세금이 너무 많다는 불평에 대해 “국가는 모두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세금은 단순히 나의 것을 도로 가져오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태양왕 루이 14세도 세금에 항거하는 민심을 두려워했다. 프랑스에서 세금을 올릴 것이라는 소문이 있으면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왕은 세금을 올릴 거라는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을 사형에 처했고 높은 관리를 보내 그런 계획이 없다고 무마하기도 했다. 강력한 절대 왕조도 세금을 이유로 하는 폭동에는 절대 약한 허풍이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조세 개혁을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다. 이들 노력은 기득권에 막혀 번번이 실패했다. 루이 14세 시절 재무장관인 콜베르(Colbert)는 타유(Taille)가 면제되는 브르타뉴(Brittany) 및 보드도(Bordeaux) 지방에 간접세를 부과하려 했지만 폭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를 철회했다. 브르타뉴 지방의 폭동은 심각하여 황제는 값비싼 스위스 용병을 구입하여 투입해야 했다. 새로운 재무장관 보방(Vauban)은 타유 개혁 대신 10%의 소득 세를 도입하려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보방은 프랑스에 17가지 유형의 면세 규정이 있으며 하나의 면세 특권에는 하나의 특권 세력이 자리잡고 있다 했다. 보방은 황제의 조세정책을 비판하다 해고됐다.


루이 15세 또한 조세 개혁을 추진했다. 루이 15세는 성직자, 귀족, 특정 지방의 면세 특권을 폐지하고자 했지만 암살을 모면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그는 개혁을 철회하고 개혁을 추진하던 재무장관을 파면했다. 


루이 16세가 집권할 즈음 지식인들의 조세 개혁 요구는 거세졌다.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는 조세 제도의 불공정을 부각하는 서적을 발간했다. 볼테르는 “조세 문제에 있어서 모든 특권은 불공정하다.” 했다. 루소는 “겨우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금을 납부하면 안된다. 잉여를 가진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 과세할 수 있다. 부자는 그의 지위로 인해 가난한 사람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 할 수 있지만 귀족도 가난한 사람과 같이 두 개의 다리와 하나의 배를 가지고 있다.” 했다.


루이 16세는 파산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았다. 조세수입을 획기적으로 늘리지 못하면 파산이 불가피했다. 면세 특권을 폐지하고자 하는 그의 1789년 개혁은 법원에 의해 좌절됐다. 법원 또한 귀족 편이었다. 법원은 삼부회(Estates General)만이 조세 개혁을 승인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법원은 삼부회에서 성직자 1부와 귀족 1부가 힘을 합해 평민 1부를 쉽게 누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는 조세개혁을 위해 지난 150년 간 소집된 일이 없던 삼부회를 소집하면서 잔꾀를 부렸다. 그는 평민회 대표 수를 2배로 늘려 이들을 통해 성직자와 귀족 세력을 누르자 했다. 그러나 평민 대표 일부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주장하며 평등사상으로 정국을 주도하려 했고 일부는 예측 불가능한 혁명과 내전에서 안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급진주의자들은 “테러는 오늘의 질서이다.” 하면서 분위기를 주도했고 결국 왕과 그의 가족 그리고 동료 혁명가들을 처형했다. 폭도들은 파리 세관과 정치범 수용소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불태웠다. 세금을 위탁 징수하던 조세농부 주식회사 임원 40명 중 32명을 단두대에서 처형했다. 세금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글은 "세금이 공정하다는 착각" 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참고 문헌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Paul Kennedy, Frist Vintage Edition 1989), The Winning of Wars, page 121-139, The Financial Revolution, page 84-85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Public Revenue, page 6 

American Taxation American Slavery(Robin L. Einhor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6),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page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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