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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May 01. 2023

밀수꾼의 독립운동

미국 독립운동은 왜 일어났을까? 알기 어려운 수수께끼이다. 당시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땅이었다. 넓은 토지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고 출신 성분이 아니라 노력으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소득 수준은 영국보다 월등히 높았고 삶은 풍요로웠다. 미국은 영국의 보호를 받았으며 영국인과 같은 권리가 보장됐다. 지방정부와 의회도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 보통법과 배심원제도에 의해 권리를 보호받았다. 미국 청년은 영국과 달리 먼 이국에서의 전쟁에 강제 징집되지 않았다. 미국이 영국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인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라며 조세혁명이 일어났다면 이는 더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영국이 미국에서 거두고자 한 세금은 영국군 주둔 비용이었다. 이는 지극히 적은 세금이다. 혁명을 촉발시킨 차에 대한 관세 3펜스는 차 가격의 10% 정도로 적은 금액이었다. 이 금액 때문에 목숨과 재산을 걸고 최강국 영국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는 없어 보인다. 


보스턴 항에 차를 버린 사건은 세금에 저항하는 애국지사의 의거가 아니었다. 다수의 미국인은 이를 신성불가침한 사유재산을 파괴한 패륜아의 미친 짓이라고 비난했다. 오히려 미국인은 독립 이후 신설된 정부에 영국이 요구한 세금보다 몇 배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된다. 세금의 문제라면 독립전쟁을 왜 했는지 알 수 없다.


***

북미에서는 1750년 이후 영국과 프랑스 정착민간 충돌이 빈번했다. 양국은 무력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북미에서 갈등은 영국이 7년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763년 마무리됐다. 영국은 전쟁 비용으로 1억 6천만 파운드를 사용했고 6천만 파운드 이상을 빌렸다. 


영국은 이 비용을 식민지 미국에 일부 부담시키고 싶었다. 전쟁의 최대 수혜자인 미국이 최소한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공평했다. 미국은 전쟁의 최대 수혜자이면서 영국보다 소득 수준이 높았고 영국이 누리는 모든 권리를 누리면서 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본국에서 파견된 관료의 급여를 포함하여 더 많은 비용을 미국이 납부하기를 원했다. 영국은 인디언, 잔존 프랑스 세력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므로 최소한 이 비용을 미국이 납부할 것은 당연했다. 법적으로도 영국 의회는 식민지를 과세할 권리가 있었다.


반면 미국인은 왕실 헌장을 들어 정착민은 왕의 주민이고 주민들이 영국 의회에 대표권이 없으므로 의회의 과세대상이 아니라 했다. 과세권은 영국 의회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 지방의회가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인들은 세금을 내지 않더라도 영국 시민의 모든 권리가 자신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된다 믿었다. 재산권 보장과 참정권은 당연한 권리였다. 


영국군이 미국에 주둔하면서 정착민들은 이를 점령군으로 의심했으며 식민지 주권이 침해됐다고 생각했다.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미국을 동등한 파트너가 아닌 열등한 식민지로 취급하는 것과 같았다. 여기에 더하여 영국이 군대 주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직접 세금을 걷겠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반면 영국 입장에서 손익계산은 명백했다. 영국은 미국에서 세관을 유지하기 위해 7,000~8,000파운드를 지출했다. 밀수와 탈세로 관세는 1,000~2,000파운드밖에 징수하지 못했다. 애덤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영국 의회가 미국에서 적정한 세금을 징수하지 못한다고 했다. 영국은 부자인 미국이 최소한의 역할을 다 해주기를 기대했다. 이러한 영국의 계산은 자국이 누리는 중상주의 무역 이익을 제외한 편협한 판단이었다. 재정수입만을 계산하는 영국의 소탐대실 계산법은 미국의 반란과 독립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

영국의 중상주의 입법은 미국의 자유로운 상거래를 제한했다. 정착민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와 직거래할 수 없었다. 모든 수출입 물품은 영국을 경유하여야 했다. 해상운송 또한 영국과 미국의 선박을 이용하여야 했다. 


중상주의 정책은 미국에서 관세를 징수하기보다는 다른 나라의 경쟁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됐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미국에서 관세수입에서 손해를 보고 있었지만 독점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 밀수는 영국의 재정수입보다 무역 이익을 더 크게 침해했다. 당시 영국은 미국에 매년 200만 파운드를 수출하고 있었고 미국에서 공업 생산을 억제하여 못 하나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궁핍화정책을 취했다.


대표적 중상주의 입법인 당밀법(Molasses Act, 1733년)은 프랑스가 서인도제도에서 생산한 당밀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높은 관세를 부과했다. 당밀은 원산지 표시가 어렵고 쉽게 밀수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밀수가 만연했다. 영국은 밀수를 해결하기 위해 설탕법(Sugar Act, 1764년)을 만들었다. 설탕법은 당밀에 부과하는 관세를 갤런당 6펜스에서 3펜스로 낮추어 관세를 제대로 징수하려 했고 밀수 단속과 처벌을 강화했다.


미국인들은 관세가 낮아져도 프랑스산 당밀을 계속 밀수했고 럼주를 만들어 인디언에게 팔았다. 당연히 관세는 납부하지 않았다. 영국은 미국인이 밀수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난했다. 미국인은 자신이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마음대로 거래할 때까지 밀수하고 불평할 것이며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고충이며 노예의 징표라고 한다고 비난했다.


***

7년전쟁은 영국의 부채를 7천 2백 만 파운드에서 1억 3천만 파운드로 두 배 늘렸다. 파탄 지경인 영국은 1763년 영국에서 사과술(Cider Tax)을 과세하려 했다. 사과술은 당시 가난한 사람이 마시던 술이었다. 이 세금은 폭동을 불러와 세리가 습격당했고 이를 추진한 뷰트(Bute) 수상은 사임했다. 


새로운 조세수입이 가능한 유일한 곳은 식민지였다. 당시 미국에는 약 1만 명의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영국 수상은 의회에서 “과도한 세금으로 우리가 겪는 어려움을 완화하기 위해 식민지가 적은 돈을 기부하도록 한다면 식민지는 이를 거절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의회에서는 아무런 반대 의견이 없었다.


미국에서 인지세(Stamp tax)는 1765년 도입됐다. 인지세는 당시 유럽에서 보편적인 세금으로 신문, 공식 서류, 사업 허가, 졸업장 등에 부과됐다. 이 세금은 과도하지 않았고 북미에 주둔한 영국군의 지원 비용으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영국은 인지세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관세와 달리 영국에서 관리를 파견하지 않았다. 대신 미국인에게 인지를 발행하고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벤자민 프랭클린도 인지세의 판매를 신청했다. 


인지세는 흩어져 단합한 일이 없었던 미국 식민지 13개 주를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영국 상품 불매운동과 폭동이 일어났다. 인지세 판매를 신청한 미국 사람들은 안전을 우려하여 판매권을 모두 반납했다. 영국에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 한 인지세는 사실상 징수가 불가 능하게 됐다.


영국 의회는 까칠한 식민지에 교훈을 주고 싶어 했다. 세금은 의회의 고유 권한이었고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면 영국의 재정적자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영국 상인들은 미국의 불매운동으로 수출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이 때문에 인지세의 철회를 요구했다. 영국 상인들은 ‘인지세 6만 파운드를 걷기 위해 수출 200만 파운드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며 정부를 비난했다. 지방 의회는 왕에게 인지세 철회를 청원했으며 미국도 대표를 파견하여 인지세의 부당함을 청원했다. 미국은 1766년 인지세에 항의하는 의회(Stamp act of Congress)를 개최했고 현실을 인식한 영국 의회는 다음 해 인지세를 폐지했다.


인지세가 무산되자 영국은 1767년 톤젠드법(Townshend Acts)을 제정했다. 이는 차, 유리, 종이 등에 관세를 부과하는 법이나 징수 예상 금액은 4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이 금액은 영국이 식민지 유지에 드는 비용의 1/10 수준으로 사실상 영국 재정에 도움이 안 되는 조치였다. 


그래서 영국은 주둔군 비용부담법(Quartering Act)을 제정해 식민지에 군대 주둔 비용을 부담하도록 했다. 보스턴에서는 이에 대한 반감으로 1770년 3월 군중들이 눈 뭉치를 영국 군인들에게 던졌다. 여기에 영국군이 발포했고 시민 5명이 희생됐다. 이 사건이 보스턴 학살사건이다.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영국은 차를 제외한 모든 물품에 대한 관세를 폐지했고 민심은 잠시 안정됐다.


영국은 미국이 독립하기 전 50년 동안 미국에 재정을 분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차에 매긴 세금은 파운드당 3펜스로 실질적인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영국은 식민지를 상대로 의회가 과세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선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차에 대한 과세를 유지했다. 미국은 과세권은 영국 의회가 아니라 미 의회가 가지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정착민이 원하지 않는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비용을 분담하라는 영국의 요구는 미국을 식민지로 생각하는 독재였다. 영국 의회는 미국에 끈질기게 세금을 부과하려 했고 미국은 이를 줄기차게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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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세 갈등에도 불구하고 미국 독립운동의 기폭제인 보스턴 차사건의 원인은 세금이 아니었다. 톤젠드법으로 관세가 부과됐지만 밀수로 아무런 불편 없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사추세츠 총독 허친슨 (Thomas Hutchinson)은 미국이 매년 6.5백만 파운드의 차를 소비한다고 추산했다. 이는 1인당 2.5파운드이다. 관세는 10% 정도로 낮게 부과되었지만 미국 상인은 차를 밀수했고 실제 소비되는 차의 5% 정도만 세관에 신고됐다. 차에 대한 10%의 관세도 내지 않는 미국인에게 세금은 전혀 고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보스턴 차사건은 왜 일어났을까?


보스턴 차사건은 1773년 초 재정난에 처한 동인도 주식회사가 영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며 시작된다. 동인도 주식회사는 영국 왕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였다. 영국은 이 회사를 돕기 위해 일석삼조(一石三鳥)인 차 법(Tea Act)을 제정했다. 차 법으로 동인도회사는 미국 식민지에 차를 직접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회사의 과도한 차 재고를 줄여준다. 파운드 당 3펜스의 낮은 관세는 영국 차의 판매를 촉진한다. 정치적으로도 영국이 식민지에 과세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더하여 당시 미국에서 밀수로 20실링에 판매되던 차를 직거래하여 10실링으로 낮추면 밀수를 일삼는 미국 상인을 실직자로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차법은 동인도회사가 차를 미국으로 직접 수입할 수 있도록 허용한 법이다. 이는 결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한 법이 아니었다. 이 법은 차의 가격을 절반으로 낮출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 소비자에게는 엄청난 이익이었다. 그렇다면 영국에서 차를 더 싸게 공급하겠다고 했는데 왜 혁명이 일어났을까?


차법으로 실직의 위기에 몰린 밀수꾼과 도매상인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정식으로 수입된 차가 밀수된 차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경쟁으로 밀수꾼들은 실직과 파산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동인도회사가 차뿐만 아니라 다른 물품까지 직거래를 확대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떠돌았다. 밀수꾼은 생존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칭 애국지사들은 영국의 ‘불공정한 해외경쟁’에 폭력으로 항거했다. 미국 소비자가 저렴한 가격으로 혜택을 누린다는 사실은 무시하고 세금과 국익이라는 보호무역 언어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했다.


1773년 11월 동인도회사 선박 3척이 직거래된 차를 싣고 보스턴 항에 입항했다. 새뮤얼 애덤스로 추정되는 밀수꾼과 상인들은 인디언으로 가장하고 수입 차 342박스를 바다에 던졌다. 폭도들은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파티가 끝나고 갑판을 청소했고 개인적으로 차를 빼돌리거나 착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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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된 애국자’라는 사설은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미국인의 정직한 삶과 이익을 위협한다 했다. 다른 사설은 군중의 무지를 이용하여 “대표 없이 과세 없다.”라는 문구를 인용하거나 영국이 미국을 탈취하려 한다고 했다. 


일부 사설은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동인도회사의 새로운 판매방식이 차를 취급하는 개인의 이익을 침해하기 때문’이라 했다. 하버드 대학의 역사학자 슐레진저(Arthur M. Schlesinger)는 보스턴 차사건을 ‘동인도회사에 대한 반란’이라고 한다. 이는 국제경쟁에서 집단 이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일종의 ‘반세계화 시위’였고, 반란을 주도한 사람은 실직 위기에 처한 밀수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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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파티는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곤란한 문제를 제기했다. 사유재산이 절대가치이던 당시 타인의 재산을 무분별하게 파괴한 도발이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다른 주에서는 사유재산을 무시한 폭도들을 비난했고 보스턴은 불순한 도발자의 온상이 됐다. 식민지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들조차 경악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를 ‘부당한 폭력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차 소유자에게 완전한 배상이 즉시 이루어져야 한다 했다.


영국에서는 강경파의 입장이 강화됐다. 영국 왕은 동인도 주식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반역이었다. 영국은 유실된 차에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법을 어기는 식민지 주민은 본국으로 소환하여 재판하겠다고 선언했다. 영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완전한 배상과 관세 납부를 요구했다. 영국은 말 그대로 식민지를 침공했다.


영국의 강경 조치는 오히려 미국인의 감정을 자극했다. 밀수꾼의 폭력을 독립 혁명의 시발점으로 만든 것은 영국의 강력한 보복이었다. 영국은 종주국의 체면과 과세할 권리를 앞세우다 최고의 식민지를 잃었다. 영국은 이 실패를 교훈 삼아 1769년 재정수입을 목적으로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다는 법을 만들고 선언했다. 영국이 잘못된 세금으로 미국이 독립하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후 영국은 이 선언을 잘 준수했고 이후 영연방국가에서 추가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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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행정부 시절 한미 방위비분담 협상을 보면 미국은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미국 독립운동은 영국의 주둔군 비용 분담 요구 때문에 발생했다. 7년전쟁에서 패한 프랑스가 철수하면서 미국은 영국군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영국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방위비 분담을 요구했다. 당시 영국은 재정적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나 이는 현재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주한 미군은 중국을 견제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에 엄청난 비용 분담을 압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영국처럼 눈앞에 이익 때문에 동맹의 신뢰를 잃을 수 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반미정서가 크다 할 수 없지만 미국은 영국처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 글은 도서 "세금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참고 문헌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Paul Kennedy, Frist Vintage Edition 1989), The Winning of Wars, page 111-115

The Sex of a Hippopotamus (Jay Starkman, Twinser Inc 2008), Salt Taxes page 110-114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Tax Revolt in the Colonies, page 301-312, 

The March of Folly (Barbara W. Tuchman, 2014 Ramdom House Trade Paperback Edition), The British Lose America page 137-247 

Those Dirty Rotten Taxes (Charles Adams, Simon & Schuster 1998), The Roots of the American Revolution, page 12-13, Vandalism with a Patriotic Fever, page 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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