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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May 08. 2023

노예에 관심 없던 링컨의 관세전쟁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미국 남북전쟁은 노예를 해방하기 위한 고귀한 전쟁이었다. 이는 위대한 대통령 링컨의 인간 승리 신화이다. 불굴의 지도자 링컨은 흑인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전쟁을 불사했다. 링컨은 전쟁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했고 노예제도를 폐지하여 4백만 흑인의 인 권 발전에 기여한 훌륭한 대통령이다. 이 설명이 사실일까?


최근 새로운 해석에 의하면 이는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링컨 대통령의 신화는 승자가 꾸며낸 허구이며 전쟁의 진짜 이유는 ‘관세’였다.


***

노예의 인권을 보장하는 입법은 영국에서 시작됐다. 영국은 1807년 노예의 국제거래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노예 거래는 영국 상인과 선주들이 많은 돈을 벌던 사업이었다. 영국이 이를 포기하고 노예의 국제 거래를 금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說)은 산업혁명으로 부의 원천이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부의 중심이 노예가 필요한 농업에서 노동자가 필요한 제조업으로 변해 노예의 경제적 가치가 낮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노예의 인권을 주장하는 인권 운동가와 노예의 조직적 저항도 노예의 국제거래 금지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 법은 노예의 국내거래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노예의 국제거래 금지로 농업이 주력인 후진국 프랑스를 견제할 명분도 생겼다.


영국은 자기 혼자 노예의 국제거래를 금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외교적 압력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도 이러한 입법을 강제했다. 영국은 노예의 국제거래를 단속하기 위해 해군 함정을 아프리카에 파견하고 다른 나라 선박에도 영국 해군이 승선하여 이를 단속할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노예의 불법거래에 대한 벌금 최고액은 노예 1인당 100파운드였다. 영리한 선주들은 영국의 단속이 어려운 나라로 선박 국적을 변경하여 노예 거래를 계속했다. 해군이 노예 운반 선박에 접근하면 선장은 노예를 바다에 던지기도 했다. 영국 해군은 1808년부터 약 50년 동안 노예 운반선 1,600척을 적발했고 15만 명의 노예를 석방했다.


미국은 1808년 노예의 국제거래 금지에 동참했다. 1820년에는 해적법을 제정하여 노예 밀수를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또한 해군을 파견하여 노예 거래를 단속했으며 세관 감시정이 해안선을 순찰했다. 강력한 법과 달리 실제 미국은 노예의 국제거래를 단속하고 처벌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1859년 한 해에만 뉴욕에서 85척의 선박이 3만 명 이상의 노예를 밀수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위법에도 뉴욕 법원은 10년 동안 노예 밀수로 단 한 명만을 처벌했고 대법원은 이 사건마저 기각했다.


1858년 발생한 흑인노예 밀수 사건은 당시 분위기를 잘 이야기해 준다. 해군은 쿠바 해안에서 400명의 흑인을 밀수하려던 선박을 검거했다. 이 선박은 찰스턴 항으로 예인됐고 선원들은 해적 혐의로 기소됐다. 찰스턴은 노예제도를 지지하고 남북 분리 운동을 이끄는 중심지였다. 변호인은 선원을 기소하는 것은 공화당의 음모라고 비난하면서 잘못된 법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배심원들은 선원들을 석방하는 결정을 내렸다.


미국 남부는 처음부터 노예의 국제거래금지에 반대했다. 대규모 농장에 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부 언론은 노예의 국제거래를 금지하는 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데보우(James Debow)는 흑인들이 미국으로 납치되면 기독교와 서구 문명을 경험하게 됨으로 이들에게 엄청난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노예 거래의 금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노예가 만들어낸 노동의 결과는 즐기면서 노예의 비참한 상황에 경악하는 병약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

남북의 관세 갈등은 영국과 미국의 1812년 전쟁에서 시작됐다. 나폴레옹 전쟁 중 영국의 해상봉쇄로 미국의 무역 거래는 90%까지 감소했다. 전쟁이 끝나고 양국 간 적대관계가 완화되자 영국 상인들은 그동안 쌓여 있던 재고를 미국에 헐값으로 수출했다. 영국 상품은 싸고 질이 좋았기 때문에 덤핑은 미국의 산업화를 막을 수 있는 중상주의 정책이기도 했다. 


미국은 영국의 약탈적 덤핑행위를 예방하고 전쟁 부채를 갚기 위해 높은 관세율을 선택했다. 1816년 이전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5% 정도였으나 관세율은 25%까지 높아졌다. 남부는 영국의 약탈적 중상주의를 견제하고 국내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명분과 애국심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높은 관세에 찬성했다. 


남부는 북부의 질 낮은 공산품을 비싼 가격에 사야 했지만 당시 면화 가격이 높아서 이를 감당할 경제력도 있었다. 또한 높은 관세는 일시적 보호조치라고 했기 때문에 남부는 이를 적극 지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면화 가격이 급락하자 생활 수준이 떨어진 남부는 낮은 관세를 원했다. 그러나 애초에 3년 동안만 부과하겠다고 약속한 높은 관세가 수십 년 동안 계속되자 남부의 불만은 높아졌다.


남부 농장주는 관세 문제로 속이 쓰렸다. 관세는 남부에서 사용하는 수입물품의 가격을 비싸게 한다. 북부 공장주는 높은 관세로 영국 공산품과 경쟁할 수 있었으며 열악한 제품을 생산하여 남부에 비싸게 팔 수 있었다. 반면 남부는 비싼 가격으로 질 낮은 북부 제품을 구입해야 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남부에서 북부 공장주의 이윤과 노동자의 임금을 보조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더하여 징수한 관세는 주로 북부에 투자됐다. 북부에는 새로운 운하와 도로가 건설됐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늘어났다. 이들 농산물은 남부의 농산물과 경쟁했다. 남부 농장주들은 면화 가격이 낮아지면서 생계를 걱정해야 했고 노예의 국제거래가 금지됐기 때문에 불법 노예를 더 비싼 가격에 구입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잭슨 대통령은 1828년 ‘가증스러운 관세법(Tariff of Abominations)’을 시행했다. 남부의 반대에도 북부 제조업을 보호하기 위해 평균 관세율을 38%로 높인 것이다. 남부는 특히 노예들이 입는 저질 옷에 관세를 대폭 올린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남부의 관세에 대한 불만은 이 법으로 극에 달했다. 


남부의 선동가들은 40개 묶음 이론으로 관세를 비판했다. 이 논리는 수입 의류에 40%의 관세를 부과하면 남부의 생활 수준을 40% 감소시킨다고 했다. 이는 북부의 제조업자가 남부의 창고에 침입하여 수확한 면화 묶음 100개 중 40개를 약탈해 가는 것과 같다. 북부는 자신이 생산한 공산품을 독점 판매하는 이익과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이익을 두 번 누린다 했다. 


반대로 남부는 높은 가격을 주고 공산품을 사야 하는 손해와 보호무역 때문에 해외시장을 잃는 두 개의 손해를 본다 했다. 잭슨은 남부의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공산품에 대한 관세를 일부 낮추는 법을 1832년 개정했다. 잭슨은 이를 통해 남부를 달래려 했지만 수입 의류 특히 노예의 옷에 부과한 50%의 관세가 유지되어 남부의 불만은 계속됐다.


남부의 분노는 1832년 정점에 달했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정부에 도전했다. 주 정부는 연방법의 위헌 무효를 주장했다. 주의회는 연방정부의 관세는 무효라고 선언했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관세 징수를 금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연방정부가 자신의 주에서 관세를 징수한다면 연방을 탈퇴하겠다고 했다. 관세를 무효로 하는 1832년 정치 투쟁은 사실상 조세 반란이었다. 


공산품에 높은 관세는 제조업을 보호하나 높은 가격으로 농민들을 처벌한다. 높은 관세는 남부를 차별하는 위헌이다. 남부의 관세 반대운동은 북부 제조업자를 보호하는 나쁜 정책에 대한 정의로운 항거였다.


북부의 다수 의견은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정부의 관세 징수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기껏해야 법을 위반하는 밀수를 활성화하는 정도의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잭슨 대통령은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정신 이상 상태에 있다고 선언하고 전광석화같이 대응했다. 


그는 해군 함대를 찰스턴에 파견하고 해군의 평화유지 활동을 방해한다면 주지사를 체포할 것이라고 했다. 의회는 해군과 연방군을 동원하여 관세를 징수할 수 있도록 하는 강제법(Force Bill)을 도입했다. 다행히 1833년 3월 양측은 과도한 관세율을 점진적으로 낮추어 20%까지 내리는 타협안을 채택했고 이로써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됐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만약 이때 전쟁이 일어났다면 남부가 승리할 가능성이 더 컸다. 당시 남 부의 경제력이 북부에 비하여 월등하게 높았기 때문이다. 북부는 관세율을 낮추겠다는 약속을 무시하고 높은 관세율을 계속 유지하려 했다. 이에 항의하여 28년이 지난 1861년 사우스캐롤라이나가 다시 투쟁을 외쳤을 때 분위기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경제력과 군사력의 우위가 북부로 기울어져 이제는 남부가 이기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모릴 관세법(Morrill Tariff)은 링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통과됐다. 이 법은 평균관세율이 47%에 이르게 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관세율이었다. 링컨은 이 법에 서명하여 공화당과 자신을 지지한 북부 기업을 보상했지만 남부와 타협은 요원하게 됐다. 링컨은 노예 문제에 있어 남부에 모두 양보했지만 관세 문제에 있어서는 한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링컨은 취임 연설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남부에서 관세를 징수할 것이며 이 외에는 남부에 무력을 사용하거나 침공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를 뒤집어 해석하면 링컨은 노예 문제는 남부에서 알아서 하고 조공을 바치는 한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남부는 미국이 영국에서 분리 독립했듯이 연방에서 탈퇴하여 독립할 수 있다 믿었다. 이는 연방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권리였다. 남부는 합법적인 강도인 조공을 북부에 납부할 이유가 없었다. 남부에서 바치는 관세가 없었더라면 북부는 발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관세가 없다면 남부는 더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국가의 원칙은 도덕이 아닌 돈이라 했다. 


남부가 독립하여 자유무역을 채택하면 무역의 중심이 북부에서 남부로 이전하게 된다. 북부 뉴욕과 보스턴의 상거래가 쇠퇴하고 남부 뉴올리언스와 찰스턴이 무역항으로 발전하게 된다. 북부는 관세 수입을 잃을 뿐 아니라 북부에서 생산한 공산품의 판로까지 잃어버리게 된다. 무역 및 금융의 중심지로 뉴욕은 가치를 상실하고 가난해진 북부는 관세가 면제되는 남부를 통한 밀수를 막기 위해 국경에 많은 세관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는 노예제도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경제의 문제이다.


따라서 남부의 분리독립은 노예 제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다. 노예 제도는 당시 당연히 보장되던 권리였다. 분리 독립은 착취적인 조세 및 경제 시스템을 바로잡기 위한 운동이었다. 남부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자 뉴욕 상인은 눈앞에 이익을 우선 생각했다. 


그들은 남부의 탈퇴 권리를 인정하고 남부와 연대를 강화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뉴욕 주의 전폭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남부는 뉴욕의 은행, 무역상, 선사 등이 가지고 있던 부채의 지급을 거부했다. 전쟁 돌발을 앞두고 남부 연방주의자인 볼드윈(John Baldwin)은 링컨에게 화해를 제안했다. 찰스턴 항에서 연방군을 철수하면 남부를 분리하는 회의 개최를 연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링컨은 “내 관세는 어떻게 되는데?”라고 되물었다.


링컨 대통령은 최근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다. 아담스 Charles Adams는 《인간사의 진행 과정 When in the Course of Human Events》에서 링컨을 독재자로 재 조명했다. 링컨은 인권과 해방의 대통령이 아니고 영악한 독재자라는 것이다. 


링컨은 우선 전쟁 명분을 만들기 위해 남부가 섬터 요새(Fort Sumpter)를 먼저 포격하도록 유도했다. 섬터 요새는 찰스톤 항 입구에서 관세 징수를 지원하기 위해 연방 군대가 주둔한 장소였다. 링컨은 보급품을 공급한다는 명분으로 해군 함정을 파견하여 남부를 자극했다. 


남부는 섬터 요새에 군사력이 강화되는 것을 우려하여 경고 사격했다. 남부의 포격으로 다치거나 사망한 군인은 하나도 없었지만 링컨은 이를 협상이 아닌 전쟁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즉시 75,000명의 지원병을 할당하고 모집했다. 링컨은 이 과정에서 헌법을 무시했다. 그는 의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전쟁을 시작했으며 전쟁이 개시되고 6개월 동안 의도적으로 의회의 소집을 지연시켰다. 전쟁 중 소집된 의회는 대통령의 전시 조치를 모두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링컨은 비상 상황에서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전쟁에 반대하는 만 명 이상의 시민을 영장없이 구속하고 군사법원에서 재판했으며 사형까지 집행했다. 1864년 민주당 의원선거 후보자는 유세과정에서 전시 소득세를 비판했다. “피정복민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세법을 통해 공화당은 나라의 모든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화가 난 링컨은 후보자를 체포하고 반역죄로 군사재판을 받도록 했다. 링컨은 그를 추방하는 명령에 서명했지만 검찰총장은 개인의 헌법적 권리를 박탈한다고 반대했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링컨은 권력남용 탄핵대상이다.


노예해방은 남북전쟁이 개시되고 2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링컨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상황이 최악으로 변했다. 우리는 계획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마지막 카드까지 썼지만 우리는 전략을 바꾸지 않으면 게임을 잃을 수밖에 없다. 나는 노예해방을 추진할 것이다.” 했다. 


링컨은 처음부터 노예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다. 하지만 노예해방 선언은 전쟁의 명분을 새롭게 설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의 전쟁 명분은 북부의 번영을 위해 연방을 사수하는 경제 전쟁이었다. 노예해방 선언은 관세 전쟁을 자유와 인권을 위한 고상한 전쟁으로 바꾸었다. 전쟁을 아름답게 승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전쟁에서 고귀한 목적과 명분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지만 경제적 이익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 국가는 커다란 대의명분을 만들어 국민에게 전쟁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링컨은 사실여부를 떠나 노예 해방이라는 인류의 고귀한 가치를 내세움으로써 역사의 전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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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전의 승패는 군사전략보다는 자본과 노동, 시장에 의해 결정된다. 전쟁 이전 남부는 생산한 면화의 80%를 영국에 수출했다. 남부는 면화를 팔아 영국에서 총, 탄약과 제복을 구입해야 했다. 북부의 해상봉쇄는 무역에 의존하는 남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산업시설이 없는 남부는 전쟁물자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남부는 금융산업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해외 채권발행도 어려웠다. 남부는 화폐 발행으로 전비를 조달했고 인플레이션은 필연적이었다.


남부는 세계적인 면화 생산기지였다. 남부는 전쟁으로 면화(King Cotton)의 국제거래가 중단되면 영국과 프랑스가 면화를 수입하기 위해 자신을 도울 거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 남부는 면화의 수출을 금지하기도 했다. 면화가 사라지면 북부의 섬유 공장에서도 대규모 실업이 일어나 북부가 타협을 추진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남부의 희망은 유럽 제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희망으로 끝나고 현실화되지 않았다. 


북부는 기존의 관세 수입에 더하여 소득세를 신설하여 재정수입을 확보했다. 발달한 금융산업 덕분에 채권 발행도 용이했다. 북부의 산업생산은 전쟁 수요로 급증했다. 전쟁은 자금조달과 물자생산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남부는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통화 증발과 부채 발행으로 전비를 조달했다. 남부는 재정 부족과 경제규모의 열세로 패배를 막을 수는 없었다. 


패배가 임박하자 남부는 30만 명의 노예를 군인으로 징집하는 계획을 세웠다. 노예가 남부를 위해 군인으로 복무하면 자유를 주겠다는 것이다. 노예 소유주들은 패 전의 위기에서 노예제도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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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용사는 부상을 당했음도 아무런 보상이 없었다. 해방된 노예의 처우는 더 열악했다. 남북전쟁이 노예의 인권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해방된 노예가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하나도 없었다. 


비슷한 시기 노예를 해방한 러시아도 노예의 자립을 돕기 위해 일정한 토지를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러시아는 더 많은 토지를 원하는 노예에게는 장기 융자로 토지를 구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러시아는 노예 소유자와 토지를 빼앗긴 지주까지 보상했다. 자립할 기회가 없었던 미국의 흑인 노예는 농노와 같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남북전쟁은 흑인 노예 4백만 명을 해방하기 위해 백만 명의 백인이 사망 또는 부상이라는 희생을 치른 전쟁이다. 하지만 해방은 쓸모없는 가짜 동전이었다. 이는 당시 백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편견 때문이다. 계몽주의자 몽테스키외도 흑인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법의 정신》에서 현명한 신이 검고 추악한 몸에 제대로 된 영혼을 부 여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했다. 흑인은 해방되었음에도 자립할 수 없었고 교육, 경제, 사회 제도 안에서 차별받았다. 흑인은 항상 2등 시민이었다. 흑인에 대한 편견은 편견을 강화하여 이들은 지금까지 2등 시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미국은 전쟁 이후 더 높은 보호관세를 통해 유치산업을 육성하면서 재정수입을 확보했다. 수입물품에 대한 관세는 의류, 기계와 다른 소비 물품의 가격을 최대 50%까지 올려놓았다. 보호관세가 없었더라면 미국 경제는 더 늦게 성장했을 것이다. 미국 경제가 성숙하게 되면서 농부, 노동자, 소상공인은 낮은 관세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913년 미국에서 소득세를 도입하기 전 관세는 재정수입의 90%를 차지할 정도였다. 정부도 산업을 보호하는 것만큼이나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불합리한 관세를 낮추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서 재정수입을 확보해야 한다. 소득세가 탄생한 배경이다. 소득세는 다른 장에서 설명하 기로 한다.



이 내용은 "세금이 공정하다는 착각"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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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Tax Wars (Steven R. Weisman, Simson & Schuster 2004), Every Man’s duty to contribute, page 52, There is No tax more equal, page 76

The Great Tax Wars (Steven R. Weisman, Simson & Schuster 2004), Chase has no money, page 45, page 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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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Tax Wars (Steven R. Weisman, Simson & Schuster 2004), Every Man’s duty to contribute, page 54-73, 

Tariffs, Blockades, and Inflation (Mark Thornton and Robert B. Ekelund, SR Books, 2004), Southern Trade, King cotton, and the Confederate Embargo, page 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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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Was it Taxes, rather than Slavery, that caused the Civil War? Page 329-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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