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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May 10. 2023

조세반란으로 퇴락한 제국 스페인

스페인은 세계적 패권을 이룩한 최초의 국가이다. 스페인은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미주,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방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은 영국에 앞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다. 스페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해군과 육군을 보유하고 유럽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미국 신대륙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지던 부강한 나라였다. 최강 스페인이 거대한 외부 충격이 없었음에도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은 스페인 무적함대(Armada)를 영국이 격파하여 스페인이 몰락했다고 믿는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무적함대의 2/3는 스페인으로 무사히 귀환했으며 함대의 손실은 영국과 전투가 아닌 대부분 폭풍으로 파손됐기 때문이다. 영국의 자랑과 달리 스페인은 과도한 전쟁 비용으로 스스로 무너졌다.


넓은 영토를 가진 스페인은 감당하기 어려운 적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미주,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끊임없이 전쟁했다. 전세계에서 동시 다발적인 전쟁을 치른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에서 회복할 휴식 시간이 간간히 있었지만 스페인은 회복할 여유가 없었다. 스페인 찰스 5세는 국채 발행을 통해 전쟁 비용을 조달해야 했다. 발행 금리는 지속해서 높아졌다. 찰스 5세는 퇴위할 때 2천만 더컷(Ducat)의 부채를 필립 2세에게 물려주었다. 필립 2세는 이 부채뿐 아니라 프랑스와의 전쟁까지 이어받았다. 필립 2세는 전쟁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1557년 국가부도를 선언했다. 이 부도로 금융 재벌인 포거스(Foggers)도 파산했으며 프랑스도 같은 해에 파산을 선언했다. 


국가의 파산 선언은 이자 비용을 급증시킨다. 재정수입의 대부분을 이자를 갚는 데 사용하던 스페인에게 높은 이자는 치명적이다. 파산한 스페인과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평화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는 휴식을 취했지만 스페인은 지중해에서 오스만과 20년 동안 전쟁을 계속했다. 80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필립 2세는 국가부도를 4번이나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 2세가 사망할 때 스페인의 부채는 1억 더컷으로 증가했다. 국가 재정수입의 2/3가 이자 지급에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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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국가는 부자의 재산을 쉽게 몰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 부도는 어려운 일이었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면 과거 부채는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국가의 파산 선언은 부채 탕감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장경제가 지배하는 유럽에서 국가부도는 채무 탕감보다는 금융기관과 채무조정 협상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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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세금이다. 스페인 찰스 5세는 재임 기간에 조세수입을 3배 늘렸고, 필립 2세는 이를 다시 2배 늘렸다. 납부하는 세금이 6배 늘어나면 민심은 동요할 수밖에 없으며 폭동이 일어나기 좋은 환경이 된다. 


대표적 세금은 알카발라(Alcabala)라는 판매세였다. 이 세금은 모든 자산과 물품의 거래마다 10%를 부과했기 때문에 많은 조세수입을 가져왔지만 상거래를 위축시켰다. 밀수 또한 급증했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다른 나라는 자신을 방어하는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방어 비용과 침략전쟁 비용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러한 이유로 스페인은 전쟁 비용 대부분을 스페인 내부에서 조달해야 했다. 찰스 5세는 자신의 영토인 카스티야(Castile)에 손을 내밀고 많은 조세를 징수했지만 곧 반란이 일어났다. 


그는 조세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강압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뿌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카스티야 폭도들은 증세에 동의한 자신의 대표(Cortes)를 살해했다. 찰스 5세가 동의를 구하기 위해 대표에게 연금, 공직 제공의 특혜를 주었기 때문이다. 자기 대표가 왕과 맺은 은밀한 거래를 알게 된 폭도들은 마지막 성례도 허용하지 않고 대표를 살해했다. 찰스 5세는 많은 돈과 병력을 투입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카스티야 지방에 새로운 조세를 도입할 수 없었다.


찰스 5세는 대신 기존에 있던 세금에 대한 징수를 강화했다. 그는 세율을 최대한 올려 재정수입을 3배까지 늘릴 수 있었다. 그는 비협조적인 납세자를 나사못처럼 조이라고 했다. 이는 이단 심문을 통해 재산을 빼앗는 것을 말했다. 스페인 세리는 조세 분쟁을 직접 판결하고 집행했기 때문에 납세자의 권리는 무시됐고 법과 제도는 조세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해 운영됐다.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세금을 납부하지 않았다. 스페인 법에 의한 납세 거부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초법적으로 대항했다. 그들은 반란(Fight)하거나, 탈세(Fraud)하거나, 나라를 버리고 도주(Flight)했다. 이들은 세금이 없는 기회의 땅 미주로 많이 이주했다. 해외로 떠나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의 꿈은 세금이 면제되는 공무원이었다. 이들은 돈으로 공직을 매수하여 40명이 일할 자리를 1,000명이 넘는 공무원이 차지하기도 했다. 돈 있는 사람은 귀족의 지위(Hidalgos)를 매수했고 돈 없는 농부들은 집시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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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속적인 조세 분담 요구에 시달렸다. 종교 문제는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민심이 악화된 상태에서 종교 분쟁이 일어나자 스페인은 이를 조세 징수의 기회로 삼았다. 스페인의 알바 공작은 2만 군대로 질서를 회복하고 스페인식 알카발라(Alcabala)를 네덜란드에 도입하려 했다. 


알카발라를 영구적으로 납부할 의사가 없던 네덜란드는 대신 1%의 자본세를 거두어 2백만 겔더(Gelders)를 2년 동안 납부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스페인은 알카발라를 통해 네덜란드 주둔군의 군비를 영구히 해결하려 했다. 알카발라는 스페인의 고집대로 도입됐지만 네덜란드는 독립운동으로 화답했다.


네덜란드 주둔 군인들은 필립 2세로부터 급료를 지급받지 못하자 밀린 급료를 스스로 해결했다. 이들은 1576년 벨기에 앤트워프(Antwerp)를 약탈했다. 당시 최고의 항구 도시 앤트워프는 약탈에서 회복하지 못했고 이후 상업의 중심은 암스테르담으로 넘어갔다. 필립 2세는 군인들의 예상대로 파산했고 그는 1577년 네덜란드에서 철군했다. 


그는 이후 6년 동안 포르투갈을 합병하고 오스만 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재정의 안정을 찾았다. 승리를 확신한 필립 2세는 1583년 네덜란드와 전쟁을 다시 시작했다.


스페인은 부채 발행으로 전비를 조달했다. 부채의 보증은 미래의 조세 수입과 남미 은광에서 나올 수입이었다. 어렵게 조달한 군비는 영국해협을 통해 운송했다. 전비로 운송되는 금은보화는 적국인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영국 해적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을 장려했을 뿐 아니라 해적을 피해 영국 항구로 피신한 스페인 선박의 재물까지 강 탈했다. 스페인이 항의했지만 엘리자베스는 금은보화가 이탈리아 금융가의 자산이라면서 이를 되돌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스페인에 저항하는 네덜란드와 프랑스에 군대를 보내 지원하기도 했다. 유럽대륙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스페인이 유럽을 통합하면 다음 순서는 영국 정복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새로운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었지만 1588년 골치 아픈 영국을 제거하기 위해 무적함대를 출동시켰다. 무적함대는 실패했지만 파산 직전의 스페인은 전쟁을 계속할 돈이 없었다.


퇴락하는 스페인 제국에 마지막 타격을 가한 것은 내부의 조세 반란이었다. 스페인 카탈로니아 지방은 1640년 반란을 일으켰다. 카탈로니아는 반란을 일으키기 전 과도한 주둔군 비용 부담을 중지해 달라고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주민들은 지방 총독을 살해하고 군대를 습격했다. 이 반란은 10년 동안 지속됐고 스페인은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와 싸워야 할 돈과 군대를 조세 반란을 진압하는 데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에 알카발라 5%를 과세하려 하자 포르투갈이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다. 시실리와 나폴리에서도 식품에 판매세를 부과하려 하자 반란이 일어났다. 재정 상황이 한계에 이른 스페인은 스스로 붕괴했고 이후 스페인 식민지는 다른 나라의 사냥감이 됐다. 영국은 자메이카 등을 차지하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등을 점령했으며 미국은 필리핀, 쿠바를 가져갔다.


스페인 제국은 140년 전쟁 동안 평민에 대한 세금은 지속해서 늘렸지만 귀족은 면세했다. 상거래마다 과세하여 거래를 위축시키는 알카발라는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조세수입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조세수입을 늘릴 수 없게 되자 스페인은 각종 특권과 독점권, 공직 및 귀족 작위를 판매했다. 적자 재정은 부채를 통해 운영됐고 스페인 은화를 동으로 교체하는 평가절하가 이루어졌다. 정부는 하루살이 식으로 운영되어 찰스 5세는 재정수입의 65%를 이자로 지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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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재정수입의 2~3배에 이르는 군비를 지속해서 사용하다 망한 나라이다. 스페인이 쇠락하기 전 많은 사람들이 조세 개혁을 주장했다. 이는 미국 대륙을 발견한 때부터 시작됐다. 이들의 주장과 노력은 무위로 돌아갔으며 스페인의 쇠락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던 곤살레스(Gonzales de Cellorigo)는 1600경, “할 수 있는 사람은 뜻이 없고, 뜻이 있는 사람은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글은 "세금이 공정하다는 착각" 책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참고 문헌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Paul Kennedy, First Vintage Edition 1989), Strengths and Weakness of the Habsburg Bloc, page 45-49,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The Collapse of the Hercules of Europe, page 191-192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Queen Elizabeth I, page 246-248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Paul Kennedy, First Vintage Edition 1989), Strengths and Weakness of the Habsburg Bloc, page 52-55,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The Collapse of the Hercules of Europe, page 192-201, 

Fight Flight Fraud (Charles Adams, Euro-Dutch Publishers, 1982), The Collapse of the Hercules of Europe, page 14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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