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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May 25. 2023

작은 금, 소금세

소금 밀수를 단속하는 특별수사대가 정보를 입수하고 현장에 잠복하고 있었다. 불법 거래를 덮치려는 순간 성당에서 땡! 땡! 하고 종이 울렸다. 밀수 일당은 종소리에 도주했고 수사대는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분개한 수사 대장은 마을 행정관에게 책임자를 찾아 문책하라고 요구했다. 위세에 눌린 행정관은 책임자 처벌을 약속했지만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소금세를 증오하는 민심이 컸기 때문에 관련자를 처벌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 민심을 잘 알고 있는 마을 행정관은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다음날 그는 교회 종을 포박하여 끌어내린 뒤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채찍질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했다. 중세 프랑스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여기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소금을 밀수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소금 밀수를 단속하고 처벌하는 특별수사대가 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


소금은 인류 생존에 필수품이다. 소금은 체내 혈액량 유지, 혈압 조절 외에도 소화 흡수 작용에 필요하며 생명 유지에 없어서는 안되는 물품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소금은 고기와 생선을 보존하고 가죽을 가공하는 공정에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성경은 기독교인을 “너희들은 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다.” 했다. 소금은 귀중품이기 때문에 로마 시절 군인의 보수로 지급되기도 했다. 


이는 라틴어로 “salarium‘sal’은 소금”이며 여기에서 영어의 봉급Salary이란 말이 시작됐다. 샐러드(Salade)도 채소를 먹기 쉽게 소금에 절인 말에서 출발했다. 동양에서는 소금이라는 말 자체가 작은 금, 즉 귀하다는 뜻이었다. 세금은 걷기 쉬운 곳에 부과된다. 국가는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소금을 과세했고 사람들은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국가는 소금이 생산되는 광산과 염전 몇 개만 관리하면 탈세를 쉽게 방지할 수 있었다. 국가는 손쉬운 소금에 많은 세금을 부과했고 그 결과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


소금세는 프랑스에서 세금보다 전매 제도에 가까웠다. 프랑스 왕은 낮은 가격으로 소금을 사서 10배가 넘는 폭리를 취하고 전매했다. 돈이 필요한 전시에는 20배 이상의 높은 가격으로 판매했고 구입가격의 100배 이상으로 판매하여 폭리를 취한 때도 있었다.


높은 가격은 소비를 위축시키고 밀수를 확대시켰다. 국가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가족 수와 재산 정도에 따라 매년 구입량을 할당했다. 가령 8세 이상의 사람은 매년 7kg의 소금을 강제로 구입해야 했다.


할당된 소금을 다시 판매하는 것은 당연히 금지됐다. 이를 위반하면 노동자 1년 연봉에 해당하는 300~5000 리브르의 벌금을 물렸다. 다시 위반하면 위반자의 볼이나 등에 백합 문양의 화인을 찍었다. 또다시 적발되면 갤리선에서 죽을 때까지 노를 저어야 했다. 아껴서 남은 소금을 이웃에 판매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국가가 억압적인 처벌을 한 이유는 소금이 재정 수입에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소금세를 6개 구역으로 나누어 징수했으며 각기 다른 세율을 적용했다. 일부 지방에서는 소금세가 면제됐기 때문에 가격 차이로 밀수가 흥행했고 국가는 무거운 처벌로 대응했다. 밀수로 처음 걸리면 갤리선에서 3~9년 노를 젓는 처벌을 받았다. 두 번째로 걸리면 단두대 또는 마차 바퀴 고문 사형이었다. 


어민들이 바닷물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됐다. 이를 위반하면 밀수와 같이 처벌됐다. 프랑스는 1784년 23,000명의 세리를 불법 거래 단속에 동원하였으며, 1년 동안 4,000 가구에서 위법 소금 압수와 도로에서 10,500건의 위반자를 체포하는 성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단속 결과로 매년 3,000명을 갤리선으로 보내거나 처형당했다. 


소금세는 대표적인 ‘봉건 악제’였으며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이다. 농부들은 비싼 소금세에 저항하여 소금을 암거래했고 국가는 이를 잔인하게 처벌했다. 국가는 소금세를 징수하고 강제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였다. 당시 프랑스에는 20~30만 명의 세리가 있었다. 프랑스 왕은 단속비용 때문에 소금세 징수액의 40%만을 수입으로 가질 수 있었다. 


소금세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마을에는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추적 감시하는 자생 조직이 생겨났다. 이들의 감시 대상은 세리였으며 세리로 판명되면 집단으로 폭행했다. 선량한 사람들도 때때로 세리로 오인받아 희생됐다.


악명이 높았던 소금세는 프랑스 혁명 중인 1790년 폐지됐지만 나폴레옹은 군비 마련을 위해 1805년 이를 부활시켰다. 프랑스에서 소금세가 최종적으로 폐지된 것은 1946년이다. 미국도 전쟁 때문에 소금세를 2번 부과했다. 1797년에는 프랑스와 전쟁 준비를 위해 소금에 관세를 부과했고 1812년에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소금세를 부과했다. 미국은 전쟁이 끝나면 소금세를 폐지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오랜 기간 지켜지지 않았다.


***


소금을 중과세 한 나라는 프랑스만이 아니었다. 영국은 1822년 소금세를 폐지할 때까지 150년 동안 소금세를 거두었다. 영국은 노동자의 분노가 아니라 자본가의 필요에 의해 소금세를 폐지했다. 산업혁명으로 소금의 역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소금은 섬유, 염색, 비누, 유리, 요업, 철강, 제지, 양조 산업의 중요 원료이다. 산업 자본가들은 정부에 소금세를 폐지할 것을 요청했고 가난한 사람들이 염원하던 소금세는 영국에서 사라졌다.


영국은 자국에서 소금세를 폐지했지만 식민지에서는 이를 강화했다. 재정수입에 도움이 되는 세금은 특별한 이유없이 사라지지 않는다. 영국은 인도에서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했다. 허가없는 소금 생산이나 판매는 불법행위였다. 바닷가에서 자연 증발된 소금을 채취하는 것조차 위법이었다. 


인도는 채식의 식단을 가지고 있었고 더운 날씨로 염분 손실이 많기 때문에 소금 섭취는 매우 중요했다. 인도 사람들은 소금 살 돈이 없어 염분 부족으로 사망했지만 소금의 불법적인 생산과 밀수에 대한 처벌은 계속됐다.


동인도 주식회사는 전체 수입의 20%를 인도에서 얻었다. 소금세는 인도에서 거두는 수익의 절반을 차지했다. 소금세 징수는 조세농부에게 위탁됐으며 소금 가격은 치솟았다. 영국이 자국에서 소금세를 폐지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1923년 인도의 소금세는 오히려 두 배 올랐다. 


1930년 61세의 간디(Mahatma Gandhi)는 소금세에 저항하는 도보 투쟁에 나선다. 영국이 소금세를 다시 올렸기 때문이다. 간디는 악화된 건강에도 400km를 걷는 투쟁을 시작했다. 도보 투쟁은 78명으로 시작했으나 25일이 지나 끝날 때에는 수천 명이 함께 했다. 


간디는 소금세에 저항하기 위해 바다로 걸어가 자연적으로 굳은 작은 소금 조각을 집었다. 머나먼 길을 걸어 소금 조각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이는 간디는 조국 독립을 상징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를 따라했으며 몇 주일이 지나서 모든 감옥이 만원이 됐고 영국은 결국 소금세를 인하했다. 그럼에도 영국은 소금세를 폐지할 수 없었다.


간디는 작은 공국(公國) 총리의 아들로 영국 유학을 경험했다. 간디는 평화롭고, 절제하며, 비협조하는 방식으로 인도의 다양한 정치세력을 결집하려 했다. 하지만 종교적 갈등, 귀족과 노동자의 갈등, 지역간 갈등으로 간디의 평화적 비협조 운동은 한계가 분명했다.


영국에 세금을 납부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으나 간디는 독립운동 초기 영국에 납세를 거부하는 비협조 운동을 반대했다. 영국에 세금납부를 거부하면 당시 농민들이 인도 지배층에 납부하던 토지세(zamindars)도 같이 거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간디도 지배층이었다. 반대로 영국은 인도 지배층이 농민에게 받는 토지세를 인정하여 식민 지배를 쉽게 했다. 간디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을 지지하여 많은 인도 청년을 전쟁으로 보냈다.


***


동양에서도 소금은 세금을 부과하기 좋은 품목이었다. 중국은 소금과 철을 국가 전매산업으로 규제했다. 소금은 재정수입을 확보하는데 중요했고, 철은 전략물자로 수출이 금지됐다. 국가가 소금을 전매하고 소금 값을 올리면 소금 밀매가 횡행하게 된다. 밀매업자들은 국가가 판매하는 관염(官鹽)보다 질 좋은 소금을 반값에 판매했다.


국가는 한 섬 이상 소금을 밀거래 한 자는 사형, 한 말 이상은 태형으로 처벌했지만 밀매는 계속됐다. 국가가 소금밀매상을 중형으로 처벌하면서 악순환은 시작됐다. 밀매 상의 입장에서 보면 순순히 잡혀 100% 사형당하는 것보다 세리와 맞서 싸우는 것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소금 밀매조직은 중무장했다. 소금 밀매는 수익이 높았기 때문에 비용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농민들도 소금을 싸게 공급하는 밀매조직 편이었다.


당나라 말기 황소(黃巢)의 난은 소금 밀매 상인이 일으킨 난이다. 황소는 관리가 되고자 했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자 소금 밀매를 시작했다. 그는 875년 다른 소금 밀매상 왕선지(王仙芝)가 일으킨 반란에 호응해 군사를 일으켰다. 황소가 일시적이나마 성공한 이유는 무장한 밀매 조직과 막강한 자금 그리고 민심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다. 황소는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당나라는 황소의 난을 계기로 무너졌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평양감사보다 소금 장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소금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소금은 국가의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었고 착취 수단이었다. 고려 충선왕 때 각염법이 대표적이다. 당시 정부는 선불로 포를 받아놓고 소금을 제때 주지 못했다. 유통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데다 양반들이 소금을 우선 차지한 탓이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선금을 지급하고 10년 동안이나 소금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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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같은 물건에 대한 과세는 가난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된다. 하지만 과거 지도자들은 반대로 생각했다. 영국 수상 월폴(Robert Walpole)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세금 중 소금에 부과되는 세금보다 더 일반적이고 납세자가 고통을 덜 느끼는 세금은 없다 했다. 


“모든 시민은 세금을 납부해야 하며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세금을 내면 된다. 부자는 하인을 두고 사치스럽게 살기 때문에 더 많은 소금세를 납부한다. 소금세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부담이 적은 세금으로 공평하게 부담된다. 따라서 소금세는 민심을 상하게 하지 않고 반란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했다.




이 글은 "세금이 공정하다는 착각" 책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참고 문헌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Many Revolts –One revolution, page 232

The Sex of a Hippopotamus (Jay Starkman, Twinser Inc 2008), Salt Taxes page 110-114, 

A People’s history of the World (Howard Zinn, Verso 2017), Revolt in the Colonial World, page 453-455,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The Devil’s Tax system, page 221-237, 

Fight Flight Fraud (Charles Adams, Euro-Dutch Publishers,1982), The Tax that beat Napoleon, page 239, 

The Birth of Plenty (William J. Bernstain, The McGraw-Hill Companies, 2004), Runners-Up, page 237-239

American Taxation American Slavery(Robin L. Einhor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6),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page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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