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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Jun 20. 2023

병역의무는 세금이다

“귀족은 의무를 진다.”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인용되는 말이다. 부와 권력은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에 프랑스 귀족들은 외적이 쳐들어오면 모든 일을 제치고 나서 싸웠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한국에서 사회 지도층의 병역의무를 강조하기 위해 널리 쓰이고 있으나 실제 프랑스 귀족들은 지위에 걸맞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공정의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 귀족들의 사기극이다. 프랑스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대우받는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국가 방위라는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때문에 세금을 면제받아야 한다 했다. 국가를 위해 전쟁에 나선다는 것은 일종의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세금을 면제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직자도 같은 논리로 자신은 사람의 영혼을 지키는 고귀한 일을 하기 때문에 세금을 면제받는다고 했다. 


국가를 방어할 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귀족들의 위선이 한번 더 드러난다. 귀족들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쟁에서 지면 잃을 것이 많다. 가진 것이 없는 농노에 비해 당연히 싸우고 지킬 게 많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리품을 챙길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과 달리 귀족에게 전쟁은 자신의 부를 지키거나 새로운 부를 획득하는 수단이었다. 


귀족들이 항시 전쟁에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목숨이 아까운 귀족들은 병역의무를 회피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돈으로 다른 사람을 사서 대리 복무 시키거나 아예 병역 면제세를 납부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병역면 제세금(Scutage)을 비겁세(cowardice tax)라고 불렀다. 귀족들은 탈세를 합리화해 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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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하는 데 있다. 복지국가 이전에 국가 예산의 대부분은 방위비였으며 국가는 병역이라는 노무를 별도의 세금으로 부과하기도 했다. 징병은 국가가 남성에 부과한 현물세금이다. 남북 대치상황에 있는 우리는 징병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모병제가 대세였다.


국가가 누구(보편적 농민 또는 특정 귀족)를 징병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병력을 충원(자발적 모병 또는 강제 징병)하는지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국가가 병력을 동원하는 방식은 국가의 정치체제 및 사회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민을 보편적으로 징병하는 국가는 민주적인 정치체계를 가지게 된다. 그리스와 로마 초기 공화정은 시민들로 구성된 보병이 군의 중심인 구조 덕분에 민주주의가 가능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시민을 징병하면 국가는 이들에게 민주적인 체계로 보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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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했다. 진나라는 농민 징병제였으나 후한 광무제는 기원후 31년 보편적 징병을 폐지하고 직업군인제를 채택했다. 이후 한나라는 4천만 명의 백성에게서 징수한 세금으로 수십 만의 병력과 십만 이상의 관료조직을 유지했다. 


비슷한 시기 로마 내전을 수습한 아우구스투스 황제도 징병을 포기하고 모병제로 전환했다. 로마 제국은 전성기 1억 명의 주민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했다. 로마는 조세수 입으로 50만 명의 병력과 고속 도로망, 원형경기장을 건설했다. 동양과 서양에서 비슷한 시기 직업군인제를 채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전을 겪은 동서양 황제들은 내전의 원인이 보편적 징병에 있다고 생각했다. 국가는 농민군에게 대가를 준 적이 없고 충성과 희생만을 강요했다. 현장을 지휘하는 장군은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 했을 뿐 아니라 승리하면 전리품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농민군은 황제보다 자신을 지휘하는 장군의 말을 더 잘 들었고 성공한 장군은 전리품으로 병사들의 마음을 사서 쉽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황제는 모병제로 병사의 보수를 직접 지급하여 군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고 충성을 유도했다. 말을 듣지 않는 의심스러운 장군에 대해서는 군비 지급을 중단하는 방식으로 이들을 통제했다. 재정을 통해 군을 관리하는 문민 통제를 선택한 것이다. 전쟁 기술의 변화에 따른 전략적인 이유도 있었다. 전투에서 기병의 역할이 중요해지면서 농사를 짓던 보병은 화살받이 이외에는 쓸모가 없었다. 전쟁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보병보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술을 가진 전문 직업군인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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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에서 개발된 등자(橙子, stirrup)는 유라시아의 군사와 정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등자는 혼자서 말을 타고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했다. 등자의 지지없이 말 위에서 칼이나 창을 휘두르면 균형을 잃고 떨어질 위험이 크다. 활을 사용하는 것도 자세가 안정되지 않는다. 등자 이전의 군대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그 역할이 제한적이었다. 군대는 보병 중심의 전투 편재를 가지게 되고 이는 계급 구분과 신분 차이를 최소화했다.


등자의 보급으로 기병의 전투력이 커지자 전쟁은 기병 중심으로 재편 됐다.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보병의 가치는 떨어지고 말을 부리고 유지할 능력이 있는 귀족이 우대됐다. 당시 기병을 갑옷으로 무장하기 위해서는 소 10마리의 값이 필요했다. 등자는 돈 많은 귀족의 역할을 부각했고 결과적으로 사회계층 간 차별을 강화했다.


유럽에서 시민 민주주의가 몰락하고 기사와 봉건주의가 번성한 이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에서 “기병이 적합한 토양에서는 극소수 독재정치가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이 환경에서는 국방에 기병이 필요하고 부자만이 말을 유지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경무장 보병과 해군은 시민들로부터 징발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가깝다.” 했다.


기병 중심의 전투에서 평소 말 타고 활 쏘면서 사냥하던 유목민은 최고의 병사였다. 호미로 농사짓던 농민군은 화살받이 외에는 별 쓸모가 없다. 보병 중심의 로마는 훈족 등 유목 민족의 침입에 시달렸다. 중국에서도 북방 유목 민족이 전투에서 우위를 점했다. 


대부분의 중국 왕조가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에 시달리고 조공을 바친 이유이다. 로마와 중국은 유목민을 용병으로 고용하거나 이들을 동화시켜 기병으로 활용했다. 기병 전쟁의 백미는 몽골이다. 몽골 기병은 말린 고기와 말 젖을 식량으로 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유럽을 놀라게 만든 몽골의 기동력은 여기에서 나왔다.


반면 보병은 자기 발로 행군해 전쟁터로 이동해야 한다. 식량은 현지에서 약탈하거나 후방에서 장거리 운송이 필요했다. 원정군은 보급의 어려움 때문에 병력 규모를 최소화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군대는 뱃심으로 행군한다.” 했다. 나폴레옹은 뱃심을 채우기 위해 진격할 시간에 현지에서 식량을 약탈하거나 후방의 느릿느릿한 보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보급의 어려움은 명나라 기록에서 잘 나타난다. 1422년 명나라 영락제는 몽골 잔당을 소탕하기 위한 제3차 원정에서 23만 대군을 파병했다. 이들을 지원하는 보급 부대는 규모가 더 컸다. 영락제는 2만 톤의 곡물을 수송하기 위해 마부 23만 명, 당나귀 34만 마리, 12만 대의 수레를 동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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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자라는 기술로 세상을 평정한 기병은 새롭게 등장한 기술에 무너진다. 새롭게 등장한 기술은 총과 대포이다. 몽골은 1241년 헝가리를 공격하면서 중국이 개발한 대포와 공성 기술을 사용했다. 이때 총포 기술이 유럽으로 전파됐다. 기병 전술로 성공한 몽골이 기병을 무력화하는 총포 기술을 유럽에 전파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총포 기술은 유럽의 기사와 봉건제도도 무너뜨렸다. 막스(Karl Marx)는 이에 대해 “화약이 기사 계급을 날려버렸다.”했다. 총포 기술은 전쟁에서 효율적이나 엄청난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직화된 국가만이 재정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 도시 규모의 봉건 영주가 무너지고 국가 규모의 절대 왕조가 등장한 배 경에는 총포가 있다.


헝가리는 1444년 대포를 사용해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저지했다. 이후 대포 기술은 유럽에서 경쟁적으로 발전했다. 대포의 가치를 알게 된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대포 기술자를 영입했다. 오스만은 거대한 대포를 이용하 여 1455년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최초로 허물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잘 설계된 성벽과 최고의 방어 시스템 덕분에 1500년 동안 난공불락이었지만 대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공포에 질린 시민들은 성 소피아 성당 (Hagia Sophia Mosque)으로 몰려들었다. 성 소피아 성당은 지상의 천국이자 두 번째 하늘이며 천사의 도구이자 영광의 왕좌였다. 사람들은 이교도가 성당을 공격하면 천사들이 칼을 들고 내려와 로마를 부활시킬 것이라 믿었 다. 하지만 천사들은 오지 않았고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됐다.


총포를 사용하기 시작한 16세기에는 기병과 보병이 서로 승리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총포 기술이 발전한 17세기 이후에는 총포로 무장한 보병이 기병을 압도했다. 전쟁의 중심이 기병에서 다시 보병으로 재편하면서 정치 체계도 같이 변하게 됐다. 보병이 전쟁의 중심이 되면서 유럽 각국은 일반 시민을 징발했고 정치 체계도 시민민주주의 사회로 복귀하게 된다. 


귀족 또는 평민 누가 전쟁의 중심이 되는가에 따라 정치 체계가 변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평등을 유별나게 강조하는 우리의 정치 문화도 보편적 징병의 결과이다. 우리나라가 정치적 민주화를 쉽게 이룰 수 있었던 힘도 보편적 징병을 경험한 시민의 힘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민주주의가 징병이라는 시민 희생을 바탕으로 건설됐다면 민주사회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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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대규모 징집의 시작으로 프랑스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나폴레옹이 전 국민을 징집함으로써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규모의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키브(Kenneth Scheve)와 스사타비지(Daved Stasavage)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규모 징집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시작됐다 한다. 프랑스혁명 전 루이 14세는 36만 병력을 동원했다. 이는 프랑스 인구의 1.9%였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할 때에는 80만 병력을 동원했다. 이는 프랑스 인구의 2.7%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정점에서 프랑스는 전체 인구의 16%인 530만 병력을 동원했다. 대규모 징집은 새로운 기술 때문에 가능하게 됐다. 이 기술은 군사기술이 아니라 보급을 가능하게 하는 철도 기술이었다. 철도는 군대를 먼 곳으로 파병하는 것과 물자보급을 가능하게 했다.


전쟁에서 보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철도는 나폴레옹 사후 발전했다. 철도는 전보와 함께 서구의 경제, 군사,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철도의 대중화는 병력과 물자의 운송을 원활하게 하여 전쟁 규모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1600년대~1900년 보병이 전투의 중심이 되면서 군대의 규모는 조금씩 늘어났으나 철도가 대중화된 20세기 군대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보급 문제를 해결한 국가는 경쟁적으로 병력규모를 늘렸다. 늘어난 병력은 일반 시민의 징집을 통해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대규모 징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신분 차별을 완화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20세기 도입된 보편적 인권과 투표권의 확대가 바로 그것이다.


보편적 인권은 보편적 징병이 시작된 이후 선언됐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시민에게 희생을 강요하기 위해 국가는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야 했다. 민주적 동기와 자율성을 보장하면 시민들은 산업현장과 전쟁에서 높은 생산성을 발휘한다. 대리복무제도는 공정한 제도 운영을 위해 폐지됐다. 


보편적 교육도 이때 시작됐다. 징병된 군인이 문자를 모르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초등 교육이 징병과 함께 활성화됐다. 산업현장에서도 노동자들이 문자를 모르면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초등교육을 받는 것은 국민의 권리가 아닌 의무로 강제됐다. 교육은 과거 국가가 필요로 하는 표준 인재를 만들기 위해 국민에게 강제된 의무였다. 지금도 교육은 국민의 4대 의무이다.


유권자는 반드시 납세자여야 한다는 원칙 또한 보편적 징병을 도입하면서 바뀌었다. 징병도 세금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납세자가 아닌 시민은 투표할 수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입법을 통해 부자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사람은 누가 세금을 얼마 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대표를 선출할 자격이 없다. 정부의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 간섭할 자격도 없다 했다. 


이러한 생각은 보편적 징병을 도입하면서 바뀌었다. 일정한 연령에 도달한 남성은 징병이라는 세금을 내기 때문에 투표할 수 있게 됐다. 여성의 지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남성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동안 여성은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전쟁에서 여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국가는 이때부터 여성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했다.


1918년 윌슨 대통령은 여성의 투표권을 지지했다. 그는 의회 연설에서 “여성의 복무가 없었더라면 미국뿐 아니라 다른 모든 교전국들이 제1 차 세계대전을 치를 수 없었다. 여성에게 완전한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신을 받을 것이며 불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했다. 


세계대전의 명분 또한 투표권의 확대에 기여했다. 세계대전은 민주주의와 전제주의의 대결로 포장됐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연합국은 투표권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시민을 징집하는 전쟁에서 사람의 가 치가 중요해졌고 병역에 대한 보상으로 투표권이 확대됐다. 민주주의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고 보편적 징집에 대한 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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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돈으로 병역을 면제받거나 사람을 사서 병역의무를 대신하도록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18~19세기 유럽은 자발적 모병과 대리 복무가 가능한 징병제도였다. 


평등을 강조한 프랑스혁명에서도 부자에게 유리한 징병제도를 운영했다. 프랑스는 보편적 징병제를 도입했지만 추첨을 통해 복무대상자를 결정했다. 복무대상자로 낙점된 사람은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다른 사람이 대리 복무하도록 할 수 있었다. 부자들이 병역의무를 회피하는 이러한 제도에 대해 당시에도 반대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다수 의견은 두 사람 사이에 자발적인 계약을 정부가 제한할 수 없다면서 대리 복무를 지지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도 부자는 병역 특권을 누렸다. 남부는 노예들이 도주하거나 반란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노예 20명당 지주 1명을 병역 면제했다. ‘노예 20명 법(Twenty negroes law)’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병역 의무를 지는 농민들의 불만 대상이었다.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병역을 면제받는 사람은 500달러를 납부하도록 했다. 남부에서 병역면제는 부와 신분의 상징이었다. 


북부에서도 다른 사람을 대리 복무시키거나 현금 300달러를 내면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300달러는 미숙련 노동자의 1년치 임금이었다. 북부 재무장관이던 체이스(Salmon P. Chase)가 딸에게 준 선물이 돈으로 병역을 사는 문제를 제기했다. 체이스는 당시 카네기와 견줄 정도로 부자였지만 선물 가격이 문제가 됐다. 고급 백화점에서 산 3,000달러짜리 숄을 야당에서는 ‘10명의 목숨값이다.’라고 비난했다.


보편적 징병을 도입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공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징병제도는 병역을 면제할 이유가 있으며 부자가 혜택 받을 가능성이 크다. 병역은 신성한 의무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세금처럼 이를 피하고 싶어 한다. 정당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는 전쟁에서 병역 회피는 다른 방식의 애국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병역을 회피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법이 허용하는 양심적 병역기피를 주장하거나, 대학생 신분을 이용하여 징집을 연기하거나, 질병이 있다고 과장된 진단서를 제출하거나, 동성애자라고 주장하거나,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 등 여러 방법이 있다. 위법이지만 인맥을 활용하여 면제받거나 뇌물을 주고 허위서류를 만들어 제출하는 방법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는 72,000명이 양심적 병역기피를 신청했지만 대부분 거절됐다. 전쟁 명분이 약하던 베트남 전쟁에서는 무려 57만 명이 병역 위반자로 분류됐고 21만 명이 정식 기소됐다. 물론 처벌을 받은 사람은 8,750명이었고 이중 3,250명만이 수감생활을 했다.


징병제에서 고령은 병역 면제의 기준이 되며 나이는 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국가는 전쟁에서 재산이 없는 젊은 남성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 또한 동등하게 희생해야 한다. 부자들의 희생은 소득과 재산이다. 전쟁에서 젊은 남성을 징병하면 논리적으로나 형평성의 관점에서 부(富)도 당연히 징발해야 한다. 


스프레이그(Oliver Sprague)의 ‘부의 징발’ 이론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국가를 위해 동등하게 희생하자는 주장이고 부자 과세 이론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여성도 병역의무와 다른 형태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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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징병을 통해 병력과 화력을 집중시키는 제1·2차 세계대전의 군사전략은 새로운 기술로 무력화됐다. 새로운 기술은 지구 반대편에 모여 있는 적의 위치를 인공위성으로 파악하고 미사일로 정밀 타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폭발물을 원거리에 투하하는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대규모 군대는 종말이 예고되고 있다. 


현대전에서는 병력을 한 곳으로 모아 적을 공격하는 것은 오히려 상대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다. 한 곳에 모인 병력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날아올지 모르는 폭발물 세례를 당하게 된다. 1991년 걸프 전쟁은 첨단 무기가 동원된 ‘디지털 전쟁’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었다. 현대전의 첨단 무기들은 전쟁을 ‘전자오락’처럼 할 수 있고 이를 안방에 생중계할 수 있다.


새롭게 바뀐 21세기 전쟁에서 군대는 소수정예의 잘 훈련된 전문가가 필요하다. 다양한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 특수 병력과 복잡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전문가가 더 중요하게 됐다. 앞으로는 조종사가 필요 없는 드론과 컴퓨터 웜이 20세기 대규모 군대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소모품으로써 일반 병사의 가치는 더 떨어졌다. 경험 많은 장군의 독자적인 판단 영역이었던 전쟁의 의사 결정도 컴퓨터 알고리즘이 더 정확하게 할 수 있다. 이는 제1·2차 세계대전에서 있었던 대량 징집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21세기 첨단기술의 발전으로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시민 병사의 역할과 가치가 사라졌다.


보편적 징병이 사라지면 민주주의의 정치기반에도 영향이 있을 수 있다. 전쟁에서 동등하게 희생해야 한다는 부자 과세 논리도 사라지게 된다. 20세기에는 부자의 소득에 대해 90%까지 과세할 수 있었지만 보편적 징병이 사라지면 이러한 과세 논리도 근거가 없게 된다. 극단적인 부자 과세는 총력전의 상황에서 부자도 동등하게 희생해야 한다는 이유로 가능했다. 기술 발전으로 대규모 징병이 필요하지 않다면 부의 징발 이론도 약해질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 체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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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전은 기술발전에 따라 결국 직업군인이 주도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전쟁은 전문 군인을 사용하는 모병이 기본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현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보편적 징병이 사라지면 사람의 가치도 함께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를 회복하는 방법으로 아테네의 전례와 같은 제도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한다. 


그리스의 전례(Liturgy) 제도는 자발적 사회 기여 프로그램이다. 그리스 부자들이 도로 건설, 축제, 군함 건조 등 공공의 필요가 있을 때 자발적으로 기여하는 제도이다. 이를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사회적 평판과 명망이었고 공권력은 동원되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노무를 제공했다. 부자들은 자신의 책임으로 도로를 건설하고 군함을 건조하여 기증했기 때문에 조세 징수, 공사감리 같은 별도의 행정조직이 필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바람직한 병역제도는 무엇일까? 젊은이들은 모병제를 선호하겠지만 아테네의 전례처럼 공공분야에서 1년 정도를 자발적으로 봉사하도록 한다면 어떨까? 이는 병역을 포함한 모든 공공분야에서 남녀 구별 없이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자발적 봉사는 사람의 가치를 높이는 고귀한 일이 될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이를 통해 공동체의 가치를 배우고 자신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보람찬 기간이 될 수 있다. 만약 여성들이 보육원 같은 곳에서 일한다면 육아 문제를 공동체가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고 향후 자신의 경력과 사회 활동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봉사가 싫은 사람은 대신 세금을 1~2% 정도 더 내도록 할 수 있다. 효과 가 같은 말이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사회봉사를 포기한 사람에게 세금을 1~2% 가산하는 것은 처벌로 보인다. 결과는 동일하지만 사회를 위해 봉사한 사람에게 세금을 1~2% 감해준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고 받아들이기 쉽다. 사회 봉사 활동에 소득세, 상속세, 양도소득세 등 모든 세금을 1~2% 감면해 준다면, 현재의 병역의무와 달리 재벌 3세들이 앞장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글은 "세금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참고 문헌

Taxing the Rich (Kenneth Scheve & David Stasavage, Princeton University, 2016), Treating Citizens as Equals, page 37-38, Three Historical examples, page 171-172

Taxing the Rich (Kenneth Scheve & David Stasavage, Princeton University, 2016), Treating Citizens as Equals, page 37-38, Three Historical examples, page 171-172

Taxing the Rich (Kenneth Scheve & David Stasavage, Princeton University, 2016), Three Historical Examples, page 174-175, 

Sapiens (Yuval Noah Harari, HarperCollins Publishers, 2015), Building Pyramids, page 103

Taxing the Rich (Kenneth Scheve & David Stasavage, Princeton University, 2016), Three Historical Examples, page 172, page 173-175

The Pursuit of Power (William H. McNeill,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Market Mobilization beyond China’s borders, page 58-61, 

Why the West Rules – for Now (Ian Morris, First Picador Edition, 2011), Different Rivers, page 401-404

Taxing the Rich (Kenneth Scheve & David Stasavage, Princeton University, 2016), The Railroad and the Modern Mass Army, page 175-176, page 179-180

Taxing the Rich (Kenneth Scheve & David Stasavage, Princeton University, 2016), The Railroad and the Modern Mass Army, page 180

The Great Tax Wars (Steven R. Weisman, Simson & Schuster 2004), Every Man’s duty to contribute, page 64, There is No tax more equal, page 80

Taxing the Rich (Kenneth Scheve & David Stasavage, Princeton University, 2016), Treating Citizens as Equals, page 20, The demise of the Mass Army page 181-184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Public Revenue, page 6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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