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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Mar 27. 2023

백성, 백가지 성이 만들어진 이유

1849년 스페인 총독은 필리핀 사람에게 성(姓)을 가지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당시 필리핀 사람들은 가족을 구별할 수 있는 개인 성(姓)을 사용하지 않았다. 가장 보편적인 이름은 성자(聖子)의 이름을 딴 세례명이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많아 개인을 특정하기 어려웠고 혼란스러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페인 총독은 영구히 사용되고 상속되는 성씨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새로 만들어진 필리핀 성씨는 개인의 이름뿐 아니라 식물, 동물, 광물, 지명을 활용했다.


스페인 총독은 성(姓)씨가 법의 집행, 금융, 공공질서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포고령의 숨은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포고령 서문에는 성씨를 만들면 국가의 기본인 인구를 파악하기 쉽고, 조세 징수를 활성화하며 부역을 기록할 수 있다고 했다. 모든 필리핀 사람에게 성씨를 만들기 위해서는 2만 페소가 들 것으로 예상했고, 매년 20만 페소의 수입이 있을 것이라 보았다. 결국 필리핀 납세자 목록을 일목요연하게 만들어 스페인이 세금을 더 거두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포고령은 개인 정보를 8개의 항목으로 기록하도록 했다. 8개 항목은 성, 이름, 나이, 결혼 여부, 직업, 면제 특권, 납세 의무, 노역 의무였다. 마지막 9번째 칼럼은 상황 변경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공란으로 남겨두었다. 총독은 청원, 신청서, 유언장에 성이 없으면 이를 처리하지 말라고 지시했으며 성이 없는 서류는 무효로 했다. 학교에서는 성으로 학생 이름을 불러야 했으며 이를 거부하면 처벌했다.


예상과 달리 총독의 투자는 결실을 보지 못했다. 필리핀에서 성씨 사용을 강제할 행정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다수의 필리핀 사람들은 이를 무시했고 지방관리들은 이 목록을 본부에 제출하지 않거나 일부만 작성하여 제출했다. 가장 큰 실수는 8개의 항목에 있었다. 새로운 인명부에는 과거 납세자가 쓰던 이름 란이 없었다. 과거의 재산과 납세 기록을 현재와 연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총독은 새로운 기록을 만들면서 과거의 체납을 사면해 주는 특혜를 베푼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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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를 사용하면 국가가 다수 개개인을 확인해 정체성(ID)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국가는 개인을 특정하기 위해 두 번째 이름인 성씨를 강요했으며 강제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성씨는 조세와 십일조 납부, 징병, 노역, 인구조사, 결혼 증명, 토지 상속 같은 일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영구적인 성은 국가재정 시스템을 건전한 기반에 올려 두기 위한 노력이었다.


중국은 유럽에 비해 성씨를 일찍 사용했다. 진나라는 기원전 4세기 조세부과, 강제노역 및 징병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성씨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때 만든 백 가지 성이 ‘백성((百姓)’의 어원이다. 


진나라 이전에는 지배 층만이 성을 사용했다. 진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을 만들어 사용하게 하고 가부장제도를 통해 조세, 병역 및 노무를 관리했다. 가부장을 통해 백성을 관리하면 국가의 행정이 편해진다. 대신 국가는 가부장에 아내, 아이, 동생 등 가족 구성원의 통솔권을 주었다.


유럽에서는 의외로 14세기 이전까지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는 성씨 제도가 없었다. 만약 개인 간 구별이 필요한 경우 직업(Smith, Baker 등), 집의 위치(Hill, Edgewood 등), 아버지의 이름 또는 개인적 특성(Short, Strong 등) 같은 두 번째 이름이 사용됐다. 두 번째 이름은 성씨와 다르다. 빵 가게 아들이 빵 가게를 이어받지 않는 한 물려받지 않기 때문이다. 성씨는 귀족만이 가지고 있었다. 성씨는 재산을 물려주고 싶은 귀족과 가계도를 자랑하고 싶은 명문가만이 가질 이유가 있었다.


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인구 대장에 올리는 것을 싫어했다. 인구 대장에 등재되어 세금을 내는 것보다 익명으로 숨어서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뇌물을 써서라도 인구 대장에서 빠지려 했고 이는 징병과 노역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말한다. 이러한 입장은 세금을 납부하면 바뀌게 된다. 세금을 납부하면 이를 두 번 내는 일이 없도록 자기 이름으로 세금을 납부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1세가 ‘장자 상속권’과 ‘영지 보유권’을 통해 재산 관계를 명확히 하면서 14세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이름을 따르게 됐다. 아버지 성을 이어받으면 법적으로 재산을 상속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로써 세리들의 오랜 소원인 ‘성(姓)’이 현실화됐다. 재산의 대부분이 토지인 과거 상속세는 가장 징수하기 쉬운 세금이었다.


보편적 성(姓)씨를 도입하고 사용하게 된 것은 최근의 현상이다. 성은 수 백만에 이르는 백성 개개인의 재산소유, 상속, 조세 징수, 법원 기록, 경찰, 징병, 질병 통제, 투표 등을 체계적으로 기록하여 국가 업무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한다. 현대 국가는 여기에 더하여 과학기술까지 활용하여 더 정확하게 개인을 확정하고 있다. 현재 국가는 개인의 성과 이름뿐 아니라, 주소, 주민등록 번호, 여권, 사회보장 번호, 신용카드, 사진, 지문, DNA정보, 휴대폰으로 개인을 확정하고 추적할 수 있다.


참고 문헌

Seeing like a State (James C. Scott, Yale University 1998), Creation of Surnames page 64-71, Taxing the Rich (Kenneth Scheve & David Stasavage, Princeton University, 2016), Taxing Inheritance, page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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