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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금만사 Mar 27. 2023

도량형은 세무 공무원이 개발했다?

홍수는 토지의 경계를 다양하게 변화시킨다. 매년 홍수로 변화하는 나일강 유역의 농지를 과세하기 위해 관리들은 경작되는 토지의 면적을 매번 측정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이집트 관리들은 기하학을  발명했다. 경작하고 있는 토지 면적을 쉽게 계산해 세금을 물리는 것, 이것이 기하학의 시작이다.


유클리드가 쓴 기하학 책은 관리들이 개발한 토지 측량 관습에 기초하고 있다. 유클리드는 그리스 사람이지만 이집트에서 살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기하학’ 책을 썼다. 그는 조세를 징수하기 위해 생겨난 이집트 세리의 발명을 조직화하고 체계화했을 뿐이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도 같은 취지의 기록을 남겼다. 그는 “세금을 매기기 위하여 토지를 측량했다. 나일강에 홍수가 나면 범람한 곳을 제외하고 과세했다. 이집트 기하학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됐으며 체계적인 이론은 그 리스 수학자에게 맡겨져 있다.”라고 했다.

***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필수품에는 유척(鍮尺)이라는 자가 있었다. 왕이 암행어사를 임명할 때 하사하는 것은 모두 네 가지로 봉서(封書)와 사목(事目), 마패(馬牌), 유척(鍮尺)이었다. 봉서는 암행어사에 임명됐음을 알리는 문서이고 사목은 암행어사의 직무를 규정한 책이다. 그렇다면 유척은 무엇일까? 유척은 놋쇠로 만든 조선시대 도량형의 표준 자이다. 암행어사는 왜 자를 들고 다녔을까?


지방 수령의 임무는 세금을 거두어 조정으로 보내는 일이었다. 세금은 화폐로 걷었으나 상황에 따라 곡식, 옷감, 지역 특산품 등의 현물로 납세했다. 이때 지방 수령이 사용하는 자는 정확해야 한다. 지방 수령이 자의 눈금을 조작하면 백성의 삶이 고달파진다. 그러니 지방 관청의 도량형을 확인하는 용도로 유척을 하사한 것이다. 뒤집어 보면 암행어사가 표준 자를 휴대해야 할 정도로 지방 관리의 도량형 조작이 심했다는 이야기이다.


측정 방식을 조작하여 더 많은 세금을 거두는 것은 인류의 공통 현상이었다. 중국에서는 30% 정도 차이가 나는 두 개의 되가 사용됐다. 관리들은 세금을 거둘 때 큰 되를 사용하고 곡물을 지출할 때는 작은 되를 사용했다. 유럽 영주도 같은 방식으로 세금과 지대를 거두었다. 제분소에서 받는 곡물 자루는 크게 하고, 제분한 곡물은 작은 자루에 주었다. 임대료를 받는 되는 크게 만들고, 임금을 지불하는 되는 작게 만들었다. 영주는 도량형을 조작해 지대와 임금을 인상하지 않고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증세할 수 있었다. 이는 공식적으로 세율을 올리는 것보다 반발이 적고 편한 방식이다.


‘눈 가리고 아웅’은 제빵사도 활용했다. 유럽에서 제빵사는 주재료인 밀과 귀리 가격이 높아져도 빵 가격을 마음대로 올릴 수 없었다. 빵 한 덩어리는 얼마라는 인식이 시민의 머릿속에 있어서 재료 가격을 반영하면 폭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제빵사는 대신 빵 한 덩어리(Loaf of bread)의 크기를 조작하여 수지타산을 맞추었다.


프랑스혁명 전 브리타니(Brittany) 지방의 농민이 황제에게 올린 청원은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농민들은 우리의 고통을 황제의 발밑에 전할 기회가 없었으나 이제는 황제께서 정의를 실천하여 줄 것을 호소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의 왕, 하나의 법, 하나의 도량형을 원합니다.” 


사람들은 도량형 통일이 해법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프랑스혁명 이전에도 도량형을 통일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번번이 실패했다. 이러한 이유로 혁명 세력은 도량형 통일이야말로 구체제를 타도하고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도량형이 통일된다 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부패는 측정 현장에서 일어났다. 중세 유럽에서는 마모되거나 습기로 부풀어 오른 되 또는 테두리 두께를 조작한 되로 수량을 조작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 지방에서는 표준이 되는 되와 말을 쇠로 제작하여 관공서 또는 교회에 공개 보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문제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곡물을 어깨높이 또는 허리높이에서 쏟는지, 수분은 어느 정도인지, 말과 되를 얼마나 흔드는지 그리고 곡물을 쌓는 방식에 따라서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곡물을 수북하게 담기도록 하고, 어떤 경우에는 절반 정도 수북하게, 어떤 경우에는 수평으로 깎아 낼 수도 있다. 수평으로 깎는 경우에도 둥근 도구로 깎는지 평평한 도구로 깎는지에 따라 차이가 났다.


우리나라도 도량형의 문란함은 다른 나라와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부피를 재는 양기(量器)가 혼란했다. 지역마다 그 크기가 달라서 쌀을 살 때면 자신이 휴대한 되로 다시 측정하기도 했다. 정부조차 흉년에는 녹봉으로 배포하는 쌀의 양을 줄이기 위해 양기를 축소했다. 1899년 황성신문은 “도량형의 무법(無法)함이 우리나라보다 심한 나라는 없다.”라고 개탄하고 “국가의 대정(大政)은 도량형을 같게 함이 첫 번째이다.”라고 했다.


통일된 도량형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도량형에는 농부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가 없다. 예로부터 농지의 면적은 지방마다 내려오는 관습이 더 유용했다. 농부의 입장에서 땅 1만㎡라는 규격은 토지의 생산성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이는 학자가 책 10kg을 구매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전통 사회는 그 지역의 특성에 맞는 방식으로 농지를 계산했다.


우리나라는 농지를 세는 단위로 마지기를 사용했다. 마지기는 씨 한 말을 뿌려 농사를 지을 만한 크기의 농지를 말한다. 농지가 생산성이 높을수록 많은 씨앗을 뿌릴 수 있기 때문에 논 한 마지기는 약 150~300평, 밭 한 마지기는 약 100평 정도이다. 인력이 부족하고 땅이 풍부한 지방에서는 파종하거나 수확하는 데 걸리는 시간 단위에 따라 땅의 면적을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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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국민 편의를 위해 도량형을 통일한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도량형은 국가를 위한 것이다. 도량형은 국가가 세금을 걷고 통치하기 쉽게 돕는다. 중국에서도 진시황(秦始皇) 이전부터 도량형을 통일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예를 들어 제(齊) 환공(桓公)이나 진(秦)의 상앙(商鞅) 변법이 도량형 통일의 원조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실패했다. 강력한 제국을 이룬 진시황만이 도량형의 통일을 이루어냈다. 측정 단위를 통일하면 황제는 한눈에 국가의 주요 통계인 부, 생산, 징수 총액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도량형은 전국에서 세금을 골고루 거두고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강제됐다.


조세 징수에 다른 중요한 요소는 납세자를 파악하는 것이다. 세금은 경작되는 토지의 면적을 기준으로 결정하지만 결국 사람이 납부하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For Good and Evil (Charles Adams, First Madison Books Edition 2001), Ancient Egypt, page 7, Fight Flight Fraud (Charles Adams, Euro-Dutch Publishers,1982), The ingenious Greek, page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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