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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Jul 10. 2023

육화: 살의 철학 5

서언: 육화에 관한 질문 5

살로서 인간의 정의와 더불어 새로운 함축이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된다. 말씀의 육화가 인간의 조건 위에 도래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말씀이 신의 말씀인 한에서 즉각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이 관계가 정신적인 면에서 세워지는 한에서, 즉 그 관계가 '영혼', '심리', '의식'에서 또 그 자체 이성이고 정신인 신으로 향하는 인간의 이성 혹은 정신에서 전개되는 한에서 그와  같은 관계는 생각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실체를 살 안에서 끌어낸다면 그것은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신이 명백히 로고스와 동일한 것일 때 이 살을 가진 인간과 신 사이의 내적 관계의 가능성은 어디에 자리하는가? 요한의 말 한가운데에서 신과 인간(혹은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의 정의로서 정립된 이 이중적인 정의는 헬레니즘 안에서 설립된 '감각적인 것'과 '지적인 것' 사이의 분리와 만나지 않는가?


우리가 이 요한의 말을 더 주의해서 검토한다면 그 어려움은 현기증 날 정도로 점점 커지고, 우리는 신과 인간의 일반적인 관계가 전적으로 새로운 형식 아래에서 말씀과 살 사이의 관계로 제시될 뿐 아니라 이 역설적인 관계는 하나이며 동일한 인물, 즉 그리스도 안에 자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28-29 쪽)

신과 인간의 관계성을 신의 말씀과 인간의 정신과의 관계로 생각한다면 헬라적 전통이나 서구의 정신사적 연계성과 그렇게 모순되는 발상인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서 신적 정신과 인간적 정신의 합일은 플라톤주의의 정점이 아니었는가?


이는 인도적 혹은 중국적 전통과 연관시켜도 그렇게 이질적이지 않다. 범아일여(梵我一如)나 천인합일(天人合一) 나아가 천리(天理)나 본연지성(本然之性)의 일치는 정신이라는 동종의 관계성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앙리의 말대로 살을 중심으로 사유하면 그 관계는 너무 비약적이다. 말씀의 육화는 힌두이즘적 아바타(화신 化身) 사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화신은 엄밀히 말하면 신의 완전성을 그대로 구현한 신적 인간인 반면 육화된 그리스도는 인간의 연약한 살의 속성을 가진 제한적 존재이다.


바울은 약 70회 정도 ‘그리스도 안( in Christ)란 말을 반복해서 쓰고 있다. 어떻게 말씀이 살이 되며, 그 살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우리는 그의 영 안에 있지 않고 살로 온 사람 안에 있는가?

신과 인간의 관계가 그리스도라는 인물 안에서 말씀과 살의 관계가 되는 이 내면화는 바로 그리스도의 존재 그 자체로, 이 관계를 구성하는 두 항의 대면과 그들의 극단적인 대립적 정립을 가지고 그 내적 가능성이 의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신이 살이 되는 말씀의 형식에서, 그것도 하나이며 동일한 인물 안에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이질적인 두 실체가 결합하는 하나의 실존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을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가?


이것은 그 당시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전념해야 할 사유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주요한 모든 공의회의 주제였을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공의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신적이며 인간적인 서로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본성을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의 실존 안에 결합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심대하게 반성했을 것이다.


‘인물 personne'이라는 말 자체는 그 당시 교부들이 그 가능성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실재적인 실존, 즉 자기 안에 두 본성을 결합한 인간이면서 신으로 '하나이며 동일한 자로 머무는 실재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단독적이고 현실적인 실존을 긍정하기 위해 유지한 용어들 중의 하나이다. 이 그리스적 용어 (‘인물 personne'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prosopon'에서 온 말로 라틴어에서 'persona', 즉 우리가 잘 알듯이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지시한다)를 불러오는 것은 이 말이 처음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적 개념화에 대한 의존과 그것을 거쳐서 그리스적 존재론에 대한 의존은 그리스도의 본성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됨에 따라서 중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교부들에게 문제가 됐던 단어인 '인물' 아래 그리스도의 본성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그로부터 그리스도의 본성이 알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실적 실존과 그에 대한 교의적인 긍정을 넘어서 공의회가 지속적으로 노력한 것은 바로 이 실존의 내적 가능성이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그리스 문화의 지평 안에서 그 목적에 이를 수 있는가?(29-30 쪽)

역자는 personne라는 헬라어를 인물로 번역하나 신학적 전통에서는 인격 혹은 위격으로 번역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 인격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살로 살았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그래서 불가사의한 이 그리스도란 실존을 그리스적 사유의 틀에서 사고하면 기이한 교리가 만들어진다.


대표적인 교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양성론이다. 그리스도는 참 신이자 동시에 참 사람이다. 그는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갖추었다. 2000년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이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표준이 아니라 일종의 신비로 선포되었다면 그 많은 이단자의 희생이 없었을 것이다.


황제와 어용 신학자의 권위 하에서 삼위일체와 더불어 양성론은 기독교의 2대 교리가 되었고 인격, 살, 몸과 같은 그리스도의 본질적 특성은 은폐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격과 살과 몸도 영을 실어 나르는 운반책으로 수단화되었다. 불교에서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면, 기독교에서 살은 죄의 덩어리가 되었다.


살 속에서 매 순간 진행되는 환희로운 생명의 비약은 저주받은 육신의 욕망으로 죄악시되었다. 그러므로 살의 해방은 종교의 해체를 요구한다. 포스트모던시대는 살에 대한 감시와 처벌에서 벗어나는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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