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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Jul 06. 2023

지젝의 시차적 관점 7: 손 곁에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 Materialism at the Gates

<데리다>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만약 위대한 고전 철학자를 만난다면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데리다는 즉시 대꾸한다. “그의 성생활에 대하여…“ 아마도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를 보충해야 할 듯하다. 만약 우리가 이 질문을 직접적으로 제기했다면 아마도 일반적인 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 보다 우리가 찾아보아야 할 것은 각각의 철학의 층위에서 구축된 성에 대한 이론이다.


아마도 이때의 궁극적인 철학적 환상은 탁월한 체계적인 이론가인 헤겔이 성에 관한 체계, 기본적 교착 상태로부터 모든 (이성애와 "도착“) 형태를 추론하는 서로를 반박하고 반전시키며 지양하는 성적 행위의 체계를 발전시킨 초고를 발견하는 것이다. 헤겔의 『엔치클로페디』(Encyclopaedia)에 나타난 것과 같이 우리는 우선 주요 “성에 관한 주관적 태도" (동물의 교접, 순수한 과잉적 열망, 인간 사랑의 표현, 형이상학적 열정)에 대한 추론을 얻게 될 것이며, 우리가 헤겔에게서 으레 바라게 되는 대로 일련의 연결된 세 부분으로 조직화된 정식, ”성의 체계"가 이를 뒤따를 것이다.


여기서 출발점은 동물적, 전(前) 주체적 직접성 속에서 일어나는 성행위인 배후위(a tergo) 성교이다. 이제 이에 대한 즉각적인 추상적인 부정으로 넘어가자 그것은 환상을 펼침으로써 단독적인 자기-흥분이 보충되는 자위이다(장 라플랑슈는 환상을 동반한 자위는 동물적 본능에 맞서는 적절한 인간 충동의 초보적인 영 층위의 형태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는 것은 둘의 종합이다. 정상적 체위의 전형적인 성행위에서 얼굴을 마주 보는 접촉은 신체 전신의 접촉(삽입)이 환상에 의해 보충되는 것을 보증한다.


이는 "정상적 “ 인간 성행위가 이중 자위의 구조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각 참여자는 실제 파트너를 가지고 자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교의 가공하지 않은 현실과 그 환상적 보충 사이의 간극은 더 이상 메워질 수 없다. 이어지는 성행위에 관한 모든 변주와 전치들은 둘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다수의 절박한 시도들이다.(31-32 쪽)

지젝은 데리다의 다큐에서 제기된 성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헤겔의 철학강요 초판(초고란 번역은 아마 초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3판이 현재 배포된 정본으로 인정된다)에서 전개된 자연철학의 마지막 부분에서 거론된 성(sex)의 층위를 거론한다.


헤겔의 소위 엔치클로페디는 우리 말로는 철학강요로 번역되었으나 문자적으로는 철학백과 혹은 철학대전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논리학-자연철학-정신철학이라는 3부로 구성된 헤겔 자신의 변증법적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저서이다. 헤겔의 논지는 철저히 개념적인 유동성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지젝이 인용하는 성에 대한 2부 자연철학의 설명은 헤겔의 도식과는 다른 방향으로 즉 ‘성관계는 없다”는 라깡의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물적 생식을 위한 대부분 생명체의 성체위가 후배위란 것이다. 이런 생리적 층에서 인간의 층으로 지양되면 나타나는 성은 자위이다.


지젝은 인간 이외에 정상위를 하는 유기체가 있는지, 자위를 하는 생명체가 있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애당초 그는 성 카운슬러나 성 생리연구가가 아니었다. 그는 생리적 층위에서 진행되는 심리적 현상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데 주된 관심이 있는 것이다.


Il n’y pas de rapport sexuel  성관계는 없다. 프로이트가 이미 설명했듯이 성행위 속에서 접촉하는 타자는 직접적아고 촉감적인 타자가 아니라 자아의 환상 속에 종합적으로 구성된 타자이며, 지젝이나 라깡이 보기엔 사람들은 생리적 결합을 통해 각자의 성적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심리적 자위를 즐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발전"은 우선 얼굴, 성 기관 그리고 다른 신체부위 사이의 관계와 각각의 사용 양식에 대하여 일련의 변화를 겪는다. 중심적 기관은 여전히 팔루스지만 삽입을 위한 개구부(항문, 입)는 변한다. 그렇다면 일종의 부정의 부정 속에서 삽입되는 대상이 변할 뿐만 아니라 파트너인 사람 전체가 그 반대로(동성애) 변하기도 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목적 자체는 더 이상 오르가슴(물신숭배)이 아니다.


손가락 성교는 이러한 순열에 손(도구적 활동, 노동의 기관과 질(신축적인 수동적 생산의 기관)이라는 불가능한 종합을 도입한다. 손가락(목적이 있는 일의 중심이며 우리 신체 중 가장 엄중히 통제되고 훈련된 부분인 손)이 계획이 잘 짜인 도구적 방식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출현하는 형세에 적응하는 사람의 경우와 유사한 관계 속에서 (예를 들어 "이성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시를 구성하는 시인은 시적으로 손가락 성교를 하는 사람이다)


팔루스(그 발기가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왕하므로 특히 우리의 의식적 통제를 벗어나는 기관)를 대체한다. 물론 여기에는 사변적인 추론을 요구하는 더 많은 변주들이 있다. 남성의 자위에서 궁극적인 수동적 기관인 질은 팔루스 자체를 수동화시키는 궁극적인 능동적 기관인 손으로 대체된다.


동물과 하는 것, 기계인형과 하는 것, 여러 파트너들과 하는 것, 사디즘, 마조히즘 요점은 하나의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의 진행 자체가, 모든 성에 관련된 행위를 영원히 자기 소멸적인 "자발적" 파토스와 (규칙들을 따르는) 외부적 의식의 논리 사이에서 동요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성관계의 구조적 불균형(라캉의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종적 결론은 성이 바로 "악무한/거짓된 무한성"(spurious infinity)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 논리를 극단적으로 전개하면 -정자운동속도 경연대회: 한 명의 여성이 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남성을 오르가슴에 도달하게 만들 수 있는가 등-와 같이 무미건조한 과잉을 만들어내게 된다. 진정한 철학자라면 이 세상에는 성보다 더욱 흥미로운 것들이 많을 것이다. (32-33 쪽)

팔루스에서 손으로 그리고 남성/여성이 아닌 다른 형태의 다양한 성적 결합은 실제적 연합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는 헤겔 논리학의 표형대로라면 악무한  惡無限 즉 궁극에 끝없이 접근하려 하지만 끝내 접근하지 못하는 이념의 발전과정을 일컫는다.


적어도 인간에게 성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 1’에서 프로이트를 비판하며, 성욕보다 더 근원적 욕구로서 굶주림, 배고픔을  이야기하며, 자고로 성욕을 충족하지 못해 자살한 사람은 없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는 변증접적 유물론을 제대로 재건한 것이다.


지젝의 외설적 표현에 가까운 성적 담론의 결론은 진정한 철학자라면 성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여성성/여성의 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이 남성 중심의 지배이데올로기 혹은 기독교적 위계질서와 결합되어 여성을 생식과 생산의 수단 혹은 성적 상품, 성소비문화의 대상으로 그 인간성을 소외시켜 왔다면 이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과도 연관된다.


하지만 지젝은 주로 현대 문화 특히 영화 속에 드러난 심층심리적 차원의 욕망과 충족 체제의 층차를 라깡의 이론을 동원해 분석한다. 자칭 좌파 철학자를 칭하는 그가 공산국가에서 자행되는 권력에 의한 여성성의 해방이 살제로는 기치에 불과한 전략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에 지적된 자본과 성의 유착관계에 대한 비판을 계승하는지 여부도 애매하다.


본문에 전개될 그의 파롤과 랑그를 더 지켜보자. 하지만 아직 서언이 남아있다. 서언의 끝에 다가갈수록 본문에 대한 호기심이 떨어지는 것은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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