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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Jun 20. 2023

육화: 살의 철학 4

서언: 육화에 관한 질문 4

그리스적 사유의 이 모든 잔해 혹은  더 오래된 편견은 다양한 영지주의로 기울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은 한순간 다시 단단한 집체로 즉 이교로 재구성된다. 이교는 그것이 쓰고 있는 가면이 무엇이든지 간에 서출로부터 온 것이며 거짓된 구성을 통해서 진리 즉 육화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영지주의가 기독교의 중심 주장을 거부하는 한에서 그것은 이교이다. 영지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말씀이 살이 되었다"는 육화의 정언 명법 안에서 솟아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신의 말씀이 살이 되는 무조건적인 긍정이 지니고 있는 의미만을 불러내야 한다. 요한 1서에서만이 아니라 신약 전체와 경전으로 평가되는 모든 글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근거 짓는 의미만을 상기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은 가능한가? 왜, 어떻게 죽음의 살로 옴이 영원성의 저당일 수 있는가?


이 역설에도 여러 이유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된 함축들이 여기에, 기독교의 '핵'인 본질적인 이 지점에 모인다. 뒤에서 더 자세히 그것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기 전에 여기서 아주 간단히 그 이유들을 열거해 보자.


말씀의 육화는 기독교 안에서 말씀이 인간이 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말해진다. 이것은 분명 최초의 조건, 교부들에 의해 확인되는 것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의 것과 닮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주장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리스도의 살의 실재와 그와 우리의 동일성을 지우고 최소화하고 왜곡하고자 하는 모든 이단에 대한 온갖 종류의 비판의 지반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살을 가지지 않거나 가진다고 해도 우리의 것과 다른 특별한 성질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마르키온과 발렌티누스와 아펠의  후계자들을 버리고, 반대로 터툴리안은 "살을 가짐이 없이는 그리스도는 인간이라고 불릴 수 없으며, 그의 살은 우리의 것과 닮은 살'이며 그 살은 인간의 살과 다른 것으로 구성될 수 없음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다만 말씀의 육화, 우리와 같은 살 안에서 말씀이 살이 된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 인간의 조건 안으로 도래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말씀이 인간의 조건을 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살로서의 인간의 정의에 대한 요한의 그 끝을 알 수 없는 확언으로부터 다른 주장들이 전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의 말은 말씀이 인간의 조건을 취하고 그리고 결국 말씀은 인간의 여러 다른 속성들 중에서 살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요한의 말은 말씀이 "살이 되었다"라고 그리고 진실로 살이 되기 위해 이 살 안에서, 이 살에 의해 말씀은 인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25-27 쪽)

”Καὶ ὁ λόγος σὰρξ ἐγένετο καὶ ἐσκήνωσεν ἐν ἡμῖν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 ‭1‬:‭14‬ )“  제4 복음서로 불리는 요한복음의 서론 격인 1:1-18의 명제들은 하나같이 불가해한 의미의 연결을 이루고 있다.


이 명제들이 그리스적 사유에 던진 폭탄은 이성적이고 논리적 사유, 나아가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해진 헬레니즘의 정수를 폭파했다. 그렇다고 공관복음 기자들의 의도인 다수의 유대인들이 의존하던 구약적 계시와 직접 연관을 갖는 것도 아니었다.


헬라계 기독교인들 중 소위 지적인 전통에 익숙하거나 신비적 전통에 익숙한 이들이 14절의 해석에 도전했다. 그들이 먼저 붙잡은 구절은 1장 1절이었다.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καὶ ὁ λόγος ἦν πρὸς τὸν θεόν καὶ θεὸς ἦν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


태초에 로고스(진리, 법칙, 말씀, 길, 절대이성)가 있었고, 이 로고스는  신의 본질이자 곧 창조의 원리였고 더 나아가 신 그 자체였다. 당시 원시 기독교 시대의 문화적 배경에는 스토아학파의 로고스 사상이 깔려있었다.


그들은 1절과 14절이 가지는 형이상학적 간극을 헬라적 이분법으로 해석했다. 즉 로고스(말씀)와 사르크스(살)는 동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14절의 살은 인간의 살처럼 보인 신비적 가현(假現)살이지 인간의 실제(實際)살이 아니다. 이런 합리적 추론을 통해 영지주의(가현설)가 탄생했고, 첫 번째 이단이 출몰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살은 우리의 이 연약한 살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우리의 살이 겪는 수많은 시간의 고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사도 요한은 특별히 영지주의적 구원론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왜 예수의 살은 우리의 살과 같은 살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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