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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Jun 07. 2023

지젝의 시차적 관점 6: 손 곁에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 Materialism at the Gates

미국의 어느 대형 서점에서나 존 더밴드(John Durband)가 편집하고 배런즈 출판사에서 펴낸 특이한 총서인 ‘알기 쉬운 셰익스피어(Shakespeare Made Easy)’를 살 수 있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의 "2개 국어" 판으로서 왼편에는 원전 영어 고문이 있고 일상적인 현대 영어 번역이 오른편에 있다.


이 총서들의 독서가 제공하는 외설적 만족은 단순히 현대 영어로 번역한다는 취지가 그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원칙적으로 더밴드는 셰익스피어의 은유적인 관용어법에 표현된 생각 (그가 그렇게 간주하는 것)을 일상적 화법을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나타내고자 노력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이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아마도 고전 문학을 알아들을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그 텍스트를 일상의 구어체로 “재번역”하는 이러한 기이한 시도를 받아들이는 것뿐인 듯하다. 우리는 횔덜린(Hölderlin)의 가장 숭고한 시구들을 일상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서 구원 또한 자라난다." (Woaber Gefahr ist, wächst das Rettende auch) "당신에게 큰 문제가 생겼을 때 너무 빨리 낙담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돌아보면 바로 가까운 곳에서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다."


또는 유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의 계보에 관한 하이데거의 주석에 외설적 왜곡을 가미하여 보충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숲길(Holzwege)’에서 하이데거가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에 관하여 Fug(적합), fügen(결합하다)이라는 단어와 Fug(적합)와 Unfug(비행 非行)라는 단어 사이의 긴장, 존재론적 일치와 불일치의 모든 차원들을 살펴볼 때, 우주가 남성적 우주 원칙과 여성적 우주 원칙(음과 양 등)의 원초적 교섭에 의해 탄생했다는 우주에 대한 이단적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f로 시작하는 단어 자체가 어떻게 이러한 우주적 Fug에 근거하는가에 대한 추측에 몰입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래서 하이데거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성교하기(fucking)의 본질은 성교의 존재적 행위 자체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보다 그것은 우주의 구성 자체를 제공하는 조화로운 투쟁적 성교하기에 관련된다.(30-31 쪽)

지젝은 고전을 현대어적 어법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종의 외설적 만족이라 하는데, 그가 예를 든 셰익스피어나 휠더린에 대한 그러한 번역이 어떻게 외설적 만족을 주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의 해석으로 넘어간다.


지젝의 글쓰기는 그의 생각이 그의 손을 너무 앞서있다. 그의 강연에도 사고와 신체는 심하게 분리되어 있는데 자신의 말함을 방해하는 만성 비염에 대한 과도한 코 만지기 그 자체가 지젝의 글쓰기와 닮아있다.


아마 햄릿의 대사나 휠더린의 시구를 프로이트적인 성담론으로 해석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에도 거의 동시에 하이데거 해석의 외설적 왜곡에 대한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기에 두 부분은 그대로 넘어가고 바로 하이데거에게로 직진한다. 왜냐하면 엄숙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외설적으로 뒤집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숲길’이란 책은 현존재라는 인간의 실존을 분석함으로써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고 존재자 인식이 아닌 존재 사유의 기초를 정립하려 했던 ‘존재와 시간’이란 초기 사상과 달리 존재 사유의 지평에서 여러 주제를 기술했던 후기 사상으로 넘어가는 도상에 있는 주요 저서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의 제자로서 만물의 근원인 아르케를 특정 물질로 보지 않고 아페이론(무한자)이라는 추상적이고 무규정적인 근원으로 사유했다. 우주는 이 근원에서 뜨거움과 차가움, 건조함과 습함의 대립물이 생겨나 생성과 변화를 주도한다.


이 사상은 무극(태극)에서 음양이 발생한다는 중국의 태극론과 유사한데 지젝은 이것을 소위 생식을 위한 성적 행위와 달리 우주적 생성을 위한 대립과 조화의 투쟁적 성행위로 해석한다. 대립 요소의 적합과 결합은 동시에 적합과 비적절한 행위라는 표형은 성 자체가 적합한 행위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에 대한 논의 자체가 외설적인 것으로 여겨진, 즉 성에 대한 억압적 왜곡을 동시에 인간 문명이 가지고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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