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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Jun 03. 2023

육화: 살의 철학 3

서언: 육화에 관한 질문 3

살과 신체에 대한, 그들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에 대한 체계적인 명시는 우리에게 탐구의 두 번째 주제인,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육화"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이것의 토대는 요한의 ”말씀이 살이 되었다  le Verbe siest fait chair" (요한복음 1:14)라는 놀라운 진술에서 발견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놀라운 말은 우리가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의 창발 이후에 그것을 사유하고자 했던 모든 이들의 의식을 사로잡는다.


바울의 첫 번째 반성, 복음주의자들의 반성, 전도사들과 그들의 전언, 교부들, 이단자들, 반대자들, 공의회 등등 인류의 역사 안에서 아마도 그것에 버금가는 것이 없는 이 정신적이고 문화적인 전개 전체가 증언하는 것은 바로 이 말이다. 철학과 신학의 얽힘이라는 이 결정적인 국면에서 발생한 수많은 지적 산물들이 고대의 많은 텍스트들처럼 상실되거나 파괴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말의 중요성은 숨길 수 없다.


그 중요성은 육화가 언급되는 이 말이 한편으로 이 말에 접근할 방법이 없음에도 이 말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 철학과 다르지 않은 자신들의 철학이 이 말과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말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 간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불러일으키는 것에서 기인한다.


개종자들, 유대인들, 그리스인들 등등 모든 종류의 이교도들을 포함해서 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것에 그들의 모든 지성을 바치고자 한다. 다른 한편 그들이 그리스인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리스적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요한의 이 신비한 말을 사유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16-17 쪽)

신화시대에 이미 고대인들은 인간 자의식이 발달하면서 평상시 경험하는 꿈의 현상이나 유령의 이야기 혹은 영생을 위한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등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분리될 수 있는 실체로 간주하였다.


특히 소크라테스 이후 주지주의적이고 관념론적 전통이 서구 사상의 기초를 형성하며, 인간의 신체를 위시하여 물질적인 것들은 다 하등 한 것 혹은 정신이라는 우주의 본질이 결여된 것으로 격하되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나 ‘파이돈’과 같은 저서에서 육체(소마 sóma)를 영혼 (프시케 psuchē)의 감옥으로 여기며, 영혼은 단일한 것이기에 분해가 불가능하며, 육체는 복합적인 것이기에 소멸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분법적 인식이 일반화된 헬라문화권에 ”말씀(로고스 λόγος)이 육신(사르크스 σὰρξ)이 되어(기노마이 ἐγένετο) 요한복음 1:14”의 선포는 앙리의 말처럼 그리스인이건 아니건 그 시대에서는 사유할 수 없는 명제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리스의 로고스는 자신의 본질을 감각적인 세계와 그것이 속한 모든 것- 동물성, 타성적인 물질밖에서 전개하며, 이 본질을 지적 세계의 비시간적인 명상 안에서 모두 소진한다. 순수하게 지적인 세계에 대한 명상은 사물들의 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원형을 제공하며, 서양의 사유를 지배하게 될 감각적인 것과 지적인 것의 대립의 기원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그리스의 로고스의 개념과 그것이 가능적으로 가질 수 있는 육화의 이념과의 근본적인 양립 불가능성은 기독교 안에서 이 육화가 그리스인들이 구원에 부여했던 의미를 입자마자 그 절정에 이른다. 이 양립 불가능성은 사실 우리가 기독교의 교리에서 '핵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테제이다.


그리스적 사유는 그럴듯한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앞에 가능한 구원의 왕도를 열었다. 이 사유에 의하면 인간은 로고스를  갖춘 동물이다.  동물성에 의해, 즉 그의 자연적인 신체에 의해 인간은 감각적인 것에 속하며, 그 자체 변화에 종속된 것으로 소멸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 구원을 신체 안에 놓는 기독교가 있다.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관심을 가지고 배려해야 하는 것은 바로 변화의 희생물이며 죄의 자리이며 감각적 성향을 지닌 기관이며 모든 유혹과 모든 우상의 희생물인 물질적이고 부패하는 이 신체이다!


사실 이런 역설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인정한 '기독교인이었던 유대인들‘은 유대적 문명을 가진 다른 모든 이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영혼과 신체의 그리스적 이원론에 공감하지 않는다. 유대교 안에서 인간은 두 실체로 구분되지 않으며 인간이 그것들의 합의 결과로 생기는 것도 아니며 그런 것은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신의 무상의 행위, 그의 전능한 의지만이 그를 섬기는 자들을 죽음의 세계로부터 구해줄 것이라는 희망을 허락한다. 따라서 한 그리스인이 신체의 부활을 믿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한 유대인이 부활을 믿는 것(많은 이가 그것을 믿지 않았다)은 어려웠다. 지상의 진흙으로 빚어진 지상의 피조물은 그의 원죄에 의한 것만큼 그의 기원에서부터 그것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정해진 것처럼 보인다. "네가 먼지라는 것을 기억하라."


유대교와 초기 교회의 결별의 두 번째 동기는 육화와 연관된다. 이스라엘의 저 보이지 않고 한없이 먼 신, 항상 구름 뒤에 혹은 잡목 숲 뒤에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우리가 그의 목소리만을 듣는 신, 영원은 이제 세계 안에 와서 죄인과 노예들에게만 속했던 치욕스러운 죽음의 고통을 따르기 위해 지상의 신체를 짊어진다. 여기에 결국 고대 이교의 사제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의 학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조리가 존재한다. 가장 미천한 인간이 어떻게 신이라고 주장하는가! 바로 여기에 죽음을 선고받을 만한 신성모독이 있다.(18-20 쪽)

기독교의 출현은 그리스적 사유가 지배하는 로마제국의 속주인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교적 배경에서였다. 그리스인이 영육의 이원론을 믿었다면 유대인은 오히려 전인성을 믿었다. 유대교에서 바리새이파와 사두개이파가 부활사상을 두고 대립한 것은 이런 유대적 전통에 기인한다.


그러나 유대교는 신과 인간의 절대적 분리를 믿었기에 신(말씀)이 인간(육신)이 되었다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인정할 수 없었다. 헬레니즘의 사상가들 역시 이런 육체의 부활을 실제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가현설이라는 영지주의를 택했다.


애당초 헬레니즘이나 유대주의에게 신성한 육체 혹은 신성한 살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살은 썩어 소멸될 먼지이거나 정신의 자유를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 지도자나 로마의 정치가들이 예수를 처형하는데 합의를 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똑같이 외쳤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신성한 살이라면 못 박히면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 예수의 옆구리에서는 븕은 피와 물이 나왔고 그는 맥없이 죽었다. 베드로는 그의 피를 보혈로 칭했지만 그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해석의 문제였다.


그 사건 이후 소위 제자들의 죽은 예수의 부활체 목격담이 퍼져나갔고 그들을 핍박하던 사울에게는 환청 같은 예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성서에는 500명의 증인이 있었다고 기록되었지만 그 이후 누구도 부활체를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앙리는 왜 성육신의 명제를 이 시대에 다시 사유하는가? 그리스도의 살과 우리의 살의 일치는 어떤 현대적 의미를 내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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