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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May 30. 2023

육화: 살의 철학 2

서언: 육화에 관한 질문 2

우리가 방금 구분한 두 신체 한편으로는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을 스스로 겪는 우리의 신체, 다른 한편으로는 길가의 돌멩이 혹은 그것을 구성하는 미소한 원자들 사이의 차이가 문제인 우주의 타성적 물체와 같은 신체의 차이를 고유한 용어로 확정한다.


우리는 첫 번째 의미로 신체를 살 chair이라고 부를 것이며, 신체 corps라는 단어의 사용은 두 번째 의미에 한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살은 스스로 자기를 느끼고, 고통을 견디고, 자기를 감내하고, 자기를 짊어지며, 항상 다시 태어나는 인상들을 따라서 자기를 향유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살은 그것밖에 존재하는 다른 신체를 느낄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서만 만져질 수도 있다. 이런 것은 물질적 우주의 타성적 신체에게는 원리상 불가능한 것이다.


이 살의 명시화는 우리 탐구의 최우선적인 주제를 형성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인 인간의, 우리만의 독특한 조건인 '육화된 존재들'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 조건, 즉 '신체를 가진다'는 사실은 육화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육화는 어떤 신체를 소유하는 데에 있지 않으며, 자신을 일종의 '신체적 존재'로서 발견하고, 우주의 부분을 이루고 그것과 같은 성질을 부여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의 이름으로 자신을 제시하는 데에 있지 않다. 육화는 '살을 가진다'는 사실에 더 나아가 '살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육화된 존재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겪지 못하는, 그래서 자기 자신도 다른 사물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타성적인 신체가 아니다. 육화된 존재들은 욕망과 두려움을 거쳐서 고통을 겪는 존재이며, 우리의 살과 연결된 그것의 실체의 구성 요소들인 모든 인상을 느낀다. 따라서 인상적인 실체는 그가 느끼고 견디는 것과 더불어 시작하고 끝난다.(13-14 쪽)

앙리는 우리의 신체를 두 가지 의미 즉 대상적인 물체로서 신체와 삶의 총체로서 살로 구분한다. 위의 사진은 오드리 헵번의 젊은 시절 신체적 이미지와 노년 시절 삶의 흔적이 파인 살로서 인상적 이미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신체가 기능적이고 기관적이며 상품적이라면 살은 존재적이고 현상적이며 인격적이다. 한국어 살과 삶은 살음의 통합이다. 살은 살음의 궤적으로서 삶의 총체이다. 늙은 살의 주름들은 그의 삶을 더 온전하게 표현한다.


늙은 헵번은 연기하지 않고 행동하였다. 신체는 언제든지 연기할 수 있으나 살은 연기하지 않는다. 살은 반응하고 행동하고 때론 절규하거나 황홀에 빠진다. 늙은 헵번의 사진은 노년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고결함을 가진다. 고결함은 쭈그러진 살들의 노화에도 불구하고 그런 대상성을 넘어선다.

타성적 신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의해 정의되는 살은 따라서 이런 신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그것은 말하자면 이런 신체에 정확히 반대된다. 살과 타성적 신체는 느낄 수 있는 것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대립된다. 하나는 자기에 대한 향유로, 다른 하나는 맹목적이고 불투명하고 타성적인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 차이는 아주 근본적이고 표면상 아주 명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차이를 진정으로 사유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어렵고, 다시 말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차이는 두 항 사이에서 세워지고, 그중 하나는 전적으로 우리의 파악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만약 살이 우리를 절대로 떠나지 않으며 고통과 기쁨처럼 쉼 없이 우리를 촉발하는 이 다양한 인상이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밀착되어 있는 한에서 우리의 살이 아주 쉽게 인식될 수 있다면, 그래서 각자는 자신의 살이 무엇인지 절대적이고 쉼 없는 앎에 의해서 잘 안다면 비록 각자가 이 앎을 개념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물질적인 자연의 타성적인 신체들에 대한 인식은 전적으로 전자와 다른 것으로, 이런 인식은 전적인 무지 안에서 길을 잃고 그 안에서 완수된다. (14-15 쪽)

위의 그림은 반 고흐가 그린 농부의 신발이다. 하이데거는 이 그림을 해석하면서 이 예술 작품에서는 근원적인 진리, 즉 은폐된 존재의 진리가 개시된다고 말하였다. 낡은 신발은 농부의 수고와 노력 그리고 대지와 자연의 모든 것을 매개하여 인간 삶의 노정을 남김없이 폭로한다.


앙리의 관점으로 표현하면 이 낡은 신발은 발이라는 신체 기관의 기능이 아니라 육화된 인간의 살이 대지와 접촉한 궤적 즉 얼굴의 주름처럼 농부의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농부의 농부다움이 이 해어진 신발과 살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이처럼 살의 현상학은 도구적 존재이던 아니든 간에 세계 내 존재로서 인간 삶의 본질을 보여주고, 우리가 살아있는 한 살로서 산다는 사실을 명시해 준다. 아마 사람이 호모 파버 즉 도구인으로 사는 한 인간의 모든 도구는 살의 연장(延長 extens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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