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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May 29. 2023

육화:살의 철학 1

서언: 육화에 대한 질문 1

육화는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일련의 문제들의 중심에 자리한다. 육화는 그 말의 첫 번째 의미에서 지상의 모든 생명체와 관여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육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최초의 아주 일반적인 고장은 이미 우리를 아주 어려운 문제 앞에 놓는다. 육화된 존재들을 특징짓는 것은 그들이 ‘신체’를 가진다는 것이다.


다만 우주 전체는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철학자에 의해, 아니 거의 모든 학자에 의해 상식처럼 받아들이는 견해에 의하면 물체들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생명체에 속한 이 신체는 화학과 생물학의 기반으로 사용되는 양자물리학에서의 물체와 동일한가? 우리 시대, 정확히 과학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에도,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어떤 심연에 의해 아주 오래전부터 항상 우주를 덮고 있는 물체들과 인간처럼 '육화된 존재로서의 신체‘가 분리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 심연을 밝히기 위해 우선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들을 우리의 탐구의 장에서 제외하자. 이런 결정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선택하기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을 말하기로 결정하는 방법론적인 선택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왜냐하면 우리들 각각 그 남자, 그 여자는 자기 실존의 매 순간 자신의 고유한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서 고통을 느끼거나 여름에 시원한 음료수에서 쾌감을 느끼거나 얼굴을 스치는 가벼운 바람에 쾌적함을 느낀다. (11-12쪽)

우리가 이번에 읽으려는 육화:살의 철학의 저자 미셀 앙리는 서구 철학계 혹은 현대 철학계에서 그 사유의 독창성만큼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한 철학자이다. 비슷한 주제로 몸을 사유했던 장 뤽 낭시가 여전히 살아서 주목을 받는 한편 앙리의 저서는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이라는 어려운 접목 때문에 그렇게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그것은 현상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유럽 대륙에서 여러 가지 철학으로 변용되면서 원조격인 에드문드 후설 이상의 창조적 사상가들, 예를 들면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그리고 메를로 퐁티와 데리다와 같은 사상가들의 새로운 사유를 위한 징검다리의 역할로 절하되었기 때문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지향성’이라는 특성을 지닌 인간 의식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지향성은 의미를 생성하는 의식활동이다. 여기서 지향성은 세 가지 측면을 가진다. 감각적 질료(의미재료)와 노에마(의미) 그리고 의미작용(의미작용)이 그것들이다.


메를로 퐁티는 우리의 신체가 지각하는 감각적 질료(sensus hyle)의 현상에 주목한다. 앙리는 이 질료에 반응하는 인체의 살의 느낌을 신경생리학적 분석이 아니라 현상학적 분석 혹은 해석으로 이해하려 한다. 아픔의 느낌은 신경세포의 자극이지만 그것이 나의 몸의 고통이 될 때 내 삶과 분리한 객관적 자극 이전에 존재하는 주객미분의 현상이다.

반면에 단세포 생물, 새우, 곤충 등이 자신의 동물적 신체와 가지는 관계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다른 질서에 속한다. 몇몇 사상가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인간과 다른 이 생명체들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일종의 컴퓨터처럼 간주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같은 방식으로 인간의 신체를 좀 더 정교화되고 발전된 '신세대'의 컴퓨터 정도로 파악하는 사유는 지상에 점점 널리 퍼지고 있으나, 이런 사유는 심대한 반대에 직면한다.


심연이 파이는 곳은 바로 여기다. 우리가 물질적 우주 안에서 발견하는 것들과 유사한 타성적인 신체 혹은 우리가 이 물체에서 뽑아낸 물질적 과정을 사용해서 그것들을 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조직하고 조합해서 구성할 수 있는 신체-이런 신체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며 아무것도 겪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를 느끼지도 자기를 겪지도 자기를 사랑하지도 자기를 욕망하지도 않는다. 더 나아가 이것은 자신을 둘러싼 사물들을 느끼지도 겪지도 사랑하지도 욕망하지도 않는다.


하이데거의 표현에 의하면 책상은 그것이 접하고 있는 벽을 '만지지 ‘ 않는다. 우리 신체의 고유성은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옆에 있는 대상들 하나하나를 느낀다. 우리의 신체는 대상들의 성질을 지각하고, 그 색깔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바닥의 단단함을 발로 느끼고, 천의 부드러움을 손으로 감지할 수 있다. 우리의 신체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구성하는 모든 성질을 느끼고, 우리의 신체를 사방에서 짓누르는 세계를 몸으로 겪는 것은 우리의 신체가 우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면서 쏟는 노력과 고통 안에서, 또 물과 바람의 신선함 안에서 느끼는 쾌감의 인상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느끼고 견디기 때문에 가능하다. (12-13 쪽)

우리가 실제로 순간순간 지각하며, 감지하고, 느끼는 세계는 사유에 의해 구성되고 인식된 통일성이 있는 이미지의 총합이 아니다. 내가 지금 만진 장미의 촉감과 향기 그리고 숨겨진 가시로부터 파인 살의 통증은 뇌에서 일반화된 고통의 경도가 아니라 아픔 그 자체이다.


이 아픔은 환원불가능한 찰나이며 동시에 일정기간의 지속적인 통증이며 신체 전체 나아가 삶의 전반적인 질적 의미와 연관된 개별성이다. 정신병리학적으로 가학증이던 피학증의 환자로 분류된 사람의 공통된 점은 육화 된 살을 가졌기에 그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인간에게 신체적 기관 이전에 살이란 무슨 의미를 가진 것일까? 소크라테스가 감옥으로 불렀던 신체 (body) 즉 소마(soma)는 사도 요한이 말한 살(fresh) 즉 사르크스(σαρκὸς)가 아니다. 앙리가 말한 살로서 인간의 몸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철학적 의미를 조망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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