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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May 25. 2023

지젝의 시차적 관점 5: 손 곁에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 Materialism at the Gates

여기서 이러한 데카르트의 다문화주의적 도입과 자신의 입장에 대한 상대화가 단지 전승된 견해들을 포기함으로써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실한 철학적 지식을 획득하게 되기 위한 첫 단계라고 반박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진정한 고향에 이르기 위해 거짓되고 불안정한 고향을 버리는 것이다. 헤겔 자신이 데카르트에 의한 코기토의 발견을 바다에서 오래 동안 표류한 후 마침내 굳은 지면을 발견한 선원에 비유하지 않았던가?  


데카르트의 이러한 고향상실(homelessness)이 기만적인 전략적 수(手)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 결국 발견된 개념의 진정한 고향을 위해 거짓된 전통적 고향을 지양(Aufhebung)하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잃어버린 진정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노발리스의 규정을 긍정적으로 인용한 하이데거가 정당화되지 않았는가?


철학의 구성적 "고향상실"이라는 선상에서 가라타니는 헤겔에 맞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칸트의 “세계-시민-사회"(Weltburgergesellschaft)라는 세계주의적 관념은 단순히 민족국가의 시민권을 국경이 초월된 지구적 국가의 시민권으로 확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전통에서 실현된 자신의 유기적인 민족적 실체와의 동일시 원칙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다른 동일시 원칙으로의 전환을 수반한다. 여기서 가라타니는 개별 - 특수 - 일반이라는 삼자관계에 반하여 들뢰즈의 보편적 특이성이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이 대립은 칸트와 헤겔의 대립이다. (23-25 쪽)

지젝은 데카르트의 회의가 진정한 고향에 이르기 위해 불안정한 고향을 버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근현대의 모든 철학적 작업은 낭만주의 철학자 노발리스가 말한 ‘철학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하고, 그 근원으로 귀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헤겔은 역사를 자유의식의 발전과 실현으로 해석하며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만인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된 기독교 게르만 국가에서 인류의 역사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고진이 보기엔 추상적인  헤겔의 낙관적 서구 중심적 역사관보다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제시한 세계 공화 연맹의 이념을 현실적으로 더 발전시킬 것을 제안한다.


지젝이 보기에 고진의 세계시민주의적 이념은 그가 언급한 들뢰즈의 보편적 특이성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들뢰즈에게 특이성은 "차이로부터 파생되는 새로운 사건이나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특이성은 보편성에 대립되는 특수성이나  개별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넘으려는 들뢰즈 혹은 현대철학자들의 난해한 논리적 전개가 시작된다. 이들의 철학적 담론은 때론 수학적으로 때론 물리학적인 특이점과 비교되나 본질적으로는 철학사적 거대담론의 틀을 전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무와 같은 식물은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꽃 그리고 열매라는 연속성과 차별성 그리고 시작과 결말이라는 에피소드적 구조를 가진다. 하지만 감자와 같은 식물은 시작과 끝이라는 구조를 찾아보기 힘들다. 감자들은 각자 보편적 근원(뿌리)을 찾기 어려운 특이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늘 영속적으로 감자를 보편적으로 산출한다.


플라톤에서 헤겔 혹은 하이데거에 이르는, 혹은 공맹에게서 주자와 퇴계에 이르는 철학적 담론이 수목형적 서사구조를 가졌다면 이제 글로벌 자본주의로 일반화된 세계시장에서 모든 담론들 자체가 차이와 반복 사이에서 소위 리좀적인, 구근식물적인 보편적 특이성을 지닌다.

헤겔에게 "세계-시민-사회“는 특수라는 매개를 결여하며, 충만한 현실의 힘에 의하여 매개되어 있지 않으므로 실제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추상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주체를 실제적으로 포섭하지 않는 추상적 동일성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개인이 보편적 인류애에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유일한 방법은 특정 민족국가와 전적으로 동일시하는 것뿐이다. 나는 오직 독일인, 영국인...으로서 만 인간이다. 반대로 칸트에게 “세계-시민-사회”는 보편적 단일성의 역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단락/합선(short circuit) 속에서 특수라는 매개를 우회하여 직접적으로 보편에 동참하는 단일한 주체에 관한 역설이다. 이러한 보편과의 동일시는 포괄적인 지구적 실체(인류)와의 동일시가 아니라 보편적인 윤리·정치적 원칙과의 동일시이다. 보편적인 종교적 공동체, 과학적인 공동체, 지구적 혁명조직은 모두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접근이 허용된 것이다.


우리는 다수의 시차적 간극들의 비조직적 배치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여기서 나의 목적은 그 안에 있는 세 개의 주요 양식들, 즉 철학적, 과학적, 정치적 양식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러한 다수성에 최소한의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선 바로 현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조건 짓는 궁극적 시차로서의 존재론적 차이 자체가 있다; 그리고 현실의 현상학적 경험과 현실에 대한 과학적 보고/설명 사이의 환원할 수 없는 간극인 과학적 시차가 있다. 이는 우리의 "1인칭" 경험에 대해 신경생물학적 3인칭"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인지주의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시차이다. 이것은 대립하는 작용인들 (먼 옛날 이것은 "계급투쟁"이라고 불렸다) 사이에 어떤 공동기반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존재의 두 가지 주요 양상들(공법과 그것의 초자아적인 외설적 보충 사이의 시차적 간극 사회적 참여로부터 물러나는 "바틀비"적 태도와 집단적인 사회적 행동 사이의 시차적 간극)이 있는데 이 책의 마지막 두 장이 이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 세 가지 양식들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책의 구조를 설명한다. 각각의 부분들 사이에는 간주가 덧붙여져 있는데, 이들은 개념적 구성을 더욱 구체적인 영역(헨리 제임스의 소설; 자본주의와 반유대주의 사이의 관계)에 적용한다. (24-27 쪽)

헤겔이 공언했던 자유의 실현은 대영제국이나 프러시아 제국과 같은 기독교 게르만 국가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질서가 성공적으로 안착한 어떤 서구사회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고전적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내에서는 경제적 불평등뿐만 아니라 자본에 종속된 노동의 소외가 발생한다.


헤겔 좌파 출신인 청년 맑스는 헤겔의 관념변증법을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으로 도치시킴으로써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꿈꾼다. 경과적으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수정자본주의와 노조 그리고 복지제도를 도입하며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반대로 공산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나 중극의 경제적 성장의 실패나 정치적 자유의 억압은 현대의 좌파 혹은 신좌파에게 아니면 인문사회학자들에게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심각한 부작용을 개선할 새로운 사회공학을 위한 담론의 장을 열게 하였다.


지젝은 이를 위해 세 가지 차원의 시차 즉 현대의 양극화된 정치적, 철학적, 과학적 시차를 드러냄으로써 다수성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한다. 즉 보편적인 종교, 과학 공동체 및 지구적 혁명조직에 이런 시차적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지젝이 위에서 인용한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나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자본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사이’에서 드러난 시차는 당시 자본주의 사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지구촌에 만연한 다방면의 간극과 격차 즉 불평등과 부자유 나아가 지구촌 전반의 위기를 보여준다. 과연 지젝은 낡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현대적 문제의 해결책으로써 ‘유물론적 신학’으로 지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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