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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May 20. 2023

지젝의 시차적 관점 4: 손 곁에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 Materialism at the Gates


그리고 마지막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철학 자체의 시차적 위상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발단에서 철학(이오니아의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실제 사회 공동체의 빈틈에서 “시차적 입장”에 매어있으며 어떤 실증적인 사회 정체성과도 전적으로 동일시할 수 없던 사람들의 사유로서 출현하였다.


‘폭정에 관하여 (On Tyranny)’에서 레오 슈트라우스(Leo Strauss)는 철학적 정치학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도시를 만족시킨다는 점에서 볼 때 철학자들은 무신론자가 아니며, 그들은 도시가 신성시하는 모든 것을 모독하지 않으며, 도시가 외경하는 것을 숭배하고, 전복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 간단히 말하여 그들은 무책임한 모험가가 아니며 최고의 시민들이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는 전복적인 철학의 특성을 무마하기 위한 방어적 생존 전략이다.


하이데거의 설명에는 이러한 중요한 차원이 생략되어 있다. 철학적 사유란 것은 어떻게 그가 사랑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에서부터 계속하여, 그것이 "가계" (oikos, 가사의 조직화)가 아니면 폴리스(도시국가)이든 모든 공동체적 정체성에 관하여 전치가 불가능한 입장을 수반하게 되었는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교환이라는 개념과 같이 철학은 다른 공동체들 사이의 간격으로부터,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환과 순환의 불안정한 공간, 어떤 실증적인 정체성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출현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경우 특히 명확하지 않은가. 보편적 회의라는 그의 입장이 근거하는 근본적인 경험은 정확히 우리 자신의 전통이, "기이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전통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보여주는 "다문화적 “ 경험이다. (21-22 쪽)

지젝은 유럽의 철학자답게 통계적 수치나 경험과학의 성과에 기반을 둔 영미권의 학자들과 달리 서양의 지성사적 흐름을 활용하여 대표적인 학자들의 이념들을 자기식으로 인용하고 해석한다. 이런 그의 철학적 담론은 마치 남미의 축구선수의 드리블처럼 현란하다.


지젝은 서언 중간에서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이미 철학자의 입장 자체가 ‘시차적 입장’에 매여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독일계 미국의 정치철학자 레오 슈투라우스가 크세노폰의 소작품인 ‘히에론’에 나타난 시라큐스의 독재자 히에로와의 가상 대담집을 분석한 ‘폭정에 대하여서 ‘란 주제를 도입한다.


크세노폰은 플라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이론가인 플라톤과 달리 군인이면서 동시에 전략가인 철학자이다. 철학자-황제인 아우렐리우스처럼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왕을 위해 그리스 용병의 리더로 페르시아 내전에 참여하기도 했고, 플라톤처럼 정치철학을 근간으로 역사, 경제, 전기를 서술했다.


그는 왕정보다 참주정(tyrannida)을 옹호했던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참주의 폭정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폈다. 오히려 크세노폰은 참주가 시민들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 다른 참주보다 경쟁력을 가질 것이라는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발터 벤야민이 행한 소련 공산당의 폭정에 대한 비판과 유사하다.


지젝은 정치적 전복 자체를 특성으로 하는 철학자들이 실제로는 기득권 세력이자 엘리트 정치를 표방하는 것 자체가 방어적 생존 전략이라고 해석한다. 이어서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의 존재론적 탐구를 회복시키려 했던 하이데거와 같은 현대 철학자는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간과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나 심지어 데카르트의 보편적 회의가 바로 이런 계급이나 전통의 시차적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즉 철학자가 추구하는 공동선은 그 철학자가 속한 전통이나 계급과의 간격에서 가능한 사유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를 설득하는 것은 특정 지식이 아니라 그보다는 관습과 실례들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목소리는 다소 발견하기 어려운 진실들 속의 가치를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진실은 십중팔구 민족보다는 한 사람에 의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이 사람의 견해를 따라야겠다고 생각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 나 스스로 나 자신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중에서


그러므로 가라타니 고진이 코기토의 비현실적인 특성을 강조한 것은 적절하다: "그것은 실증적으로 말해질 수 없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 기능이 사라진다. 코기토는 실체적인 존재자가 아니며 전적으로 구조적인 기능, 빈자리이다. 그렇게 그것은 실체적인 공동체의 체계들 사이의 틈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코기토의 출현과 실체적인 공동체적 정체성의 붕괴와 상실 사이의 연계는 내재적인 것이며 이는 데카르트보다는 스피노자에게서 더욱 적절히 나타난다.


비록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판했지만 그는 그것을 실증적이고 존재론적인 실체로서 비판한 것이다. 그는 속으로는 그것을 "발화된 것들의 자리" 근본적인 자기 회의로부터 말하는 것으로 인정하였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보다 더욱더 유대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닌, 사회적 공간(들)의 틈으로부터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중으로 추방당한 (심지어 서양 문명의 이단아들의 공동체로부터도 추방당한) 자라는 스피노자의 개인적인 입장을 고려할 때 스피노자는 바로 “그러한 철학자“였다. 이것이 우리가 독일인을 수치스러워하며 다소 의심스러운 그의 폴란드 혈통을 자랑스럽게 강조했던 니체에 이르는 모든 다른 위대한 철학자들과 관련하여 유사한 전치, 공동체적 "탈구" (out-of-joint)의 흔적을 발견하게 만드는 패러다임으로서 그를 이용해야 하는 이유이다.


철학자에게 민족적 뿌리, 국가적 정체성 등은 전혀 진리의 범주가 아니다. 즉 엄밀하게 칸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민족적 뿌리를 생각할 때 우리는 불확실하며 독단적인 추측에 구속된 채 이성을 사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성의 보편성이라는 차원에 거주하는 자유로운 인간이 아닌 "미숙한 “ 개인들로서 행동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행동해야만 한다. 그는 자신의 특수한 정체성 (유대인이자 로마 시민)을 자랑스러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절대 진리의 진정한 공간 속에서는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그가 진정 고군분투하던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민족 대 다른 민족이라는 갈등에 비해 ”더욱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논리를 따르는 문제이다. 이는 더 이상 하나의 자기-동일성을 가진 실체적 집단이 다른 집단과 교전하는 논리가 아니며 모든 특정 집단들을 가로지르는 적대의 논리이다. (23-24 쪽)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실체적인 공동체의 체계들 사이의 틈에서 발생한다’라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은 지젝의 시차적 관점의 표적을 관통한다.  데카르트가 한가히 오랫동안 회의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그가 잉여노동의 결과로 노동에서 면제된 계급에 속한 이유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사유가 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아 아니다.


오히려 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계급의식의 틈 즉 탈계급적 사유를 지향하였기에 ‘코기토 에르고 줌’이라는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을 발견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보다 이러한 틈에서 사유함으로써 이중적으로 추방당한 철학자이다.


지젝에 의하면 모든 위대한 철학자에게서 우리는 일종의 공동체적 "탈구" (out-of-joint)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들에게 민족적 뿌리 혹은 국가적 정체성은 진리의 범주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지젝은 바디유의 신보편주의와 입장을 같이한다.


바디유와 지젝 그리고 아감벤이 사도 바울을 정치철학적으로 새롭게 조명하는 이유는 동일하다. 다원적 사회에서 그나마 탈인종적이고 탈민족주의적 연대의 가능성을 로마제국의 전제정치에 맞서서 싸운 바울의 급진적 보편주의에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골로새서‬ ‭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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