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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May 13. 2023

지젝의 시차적 관점 3: 손 곁에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 Materialism at the Gates

문화에 대해 말할 때, 레닌주의자들은 위대한 고전주의 예술을 찬탄했으며,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정치적 보수주의자이거나 심지어는 전형적 파시스트였다는 사실에는 역사적 우연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다. 이것은 이미 프랑스혁명과 독일 관념론의 관계로부터 얻은 교훈이 아닌가?


비록 이들이 동일한 역사적 시간의 양면이긴 했지만 그들은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여 독일 관념론은 오직 정치적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독일이라는 "후진적" 조건에서만 나타날 수 있었다.


줄여 말하자면, 두 일화 모두가 공유하는 바는 극복할 수 없는 시차적 간극의 발생이며,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중립적 공동 기반도 가능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두 관점들에 대면하게 된다.


처음 생각할 때에는 시차적 간극과 같은 개념은 헤겔에 대한 일종의 칸트적 복수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시차"(parallax)란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antinomy)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시차적 간극이라는 개념은 결코 변증법에 되돌릴 수 없는 장애물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그 전복적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를 제시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 역설에 대면한다. (13-14 쪽)

세 사람의 초상이 등장한 이유에 대하여 다수의 독자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왼쪽 상하의 두 서양인은 칸트와 맑스이고, 오른쪽 동양인은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의 인문학자이다.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이란 책에서 칸트와 맑스를 비교하며 소위 지젝에게 시차라는 영감을 제공했다.


그 책의 한국어판에서 고진이 직접 언급하는 칸트와 맑스의 ‘담론적 이동’으로 발생하는 ‘강한 시차’에 대해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조금 길지만 인내를 가지고 읽어보자.


“칸트와 맑스는 끊임없이 '이동'을 반복한다. 그리고 다른 담론 체계로의 이동이야말로 '강한 시차를 가져온다. 망명자 맑스와 관련하여 그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칸트에 관해서도 똑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는 공간적으로는 전혀 이동하지 않았지만, 이동에의 유혹을 거부한 점에서, 그리고 계속해서 코즈모폴리턴이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망명자였다.


일반적으로 칸트는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이'에 있고, 초월론적 비판을 행한 사람이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시령자의 꿈과 같은 기묘하게 자학적인 에세이를 보면, 칸트가 단지 '사이'에서 생각했다는 따위의 말은 할 수 없다. 그도 역시 교조적인 합리주의에 대해 경험주의로 대항하고, 교조적인 경험주의에 대해 합리주의적으로 맞서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와 같은 이동에 칸트의 '비판'이 존재한다.


‘초월론적 비판'은 무언가 안정된 제3의 입장이 아니다. 그것은 횡단적(transversal)이거나 전위적(轉位的, transpositional)인 이동 없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칸트와 맑스의 초월론적(transcendental)인 동시에 전위적인 비판을 '트랜스크리틱'이라 부르기로 했던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 이신철역, 트랜스크리틱, 25쪽)

지젝이 시차라는 개념을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 가져왔다면, 고진은 칸트의 초기 저작 중 ‘형이상학의 꿈으로 해명한 영을 보는 사람의 꿈’이란 난해한 제목의 에세이에서 언급된  ‘시차’의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진의 글을 좀 더 읽어보자.


칸트의 특유한 반성 방식은 초기의 작품인 ‘형이상학의 꿈에 의해 해명된 시령자의 꿈(일본어 번역제목)‘에 나타나 있다.


“이전에 나는 일반적 인간 지성을 단지 나의 지성의 입장에서 고찰했다. 지금 나는 자신을 자신의 것이 아닌 외적인 이성의 위치에서, 자신의 판단을 그것의 가장 은밀한 동기와 함께 타인의 시점에서 고찰한다. 이 두 고찰의 비교는 확실히 강한 시차를 낳기는 하지만, 그것은 광학적 기만을 피해 개념들을 그것들이 인간성의 인식 능력에 관해 서 있는 참된 위치에 두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것은 자신의 시점에서 볼뿐만 아니라 '타인의 시점'에서도 보라고 하는 그러한 흔해빠진 것이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 역이다. 만약 우리의 주관적 시점이 광학적 기만이라면, 타인의 시점이나 객관적 시점도 그렇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반성으로서의 철학의 역사는 그저 광학적 기만'의 역사일 뿐이다. 칸트가 가져온 반성이란 그와 같은 반성이 광학적 기만일 뿐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종류의 반성이다. 반성의 비판으로서의 이러한 반성은 나의 시점과 타인의 시점의 '강한 시차'에서만 발생된다. (고진, 22쪽 참조)

지젝에서 고진으로 또 칸트로 역주행을 멈추고 소위 광학적 기만이라는 ‘시차’에 대하여 천문학적으로 알아보자. 공전하는 지구의 반대 위치에서 같은 별을 바라보면 왼쪽에서 볼 때 천구상에는 그 별이 오른쪽에 위치한 것으로 관측되고 반대편은 역으로 관측된다.


지젝은 칸트와 맑스의 시차적 간극 즉 세계연방공화국의 규제적 이념과 미래 공산주의사회와 같은 필연적 이념 사이의 간극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변증법적 유물론이 역사적으로 출현하기를 기대한다. 이 것은 고진이 칸트로 회귀한 것을 비판적으로 지양하면서 헤겔적 종합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사변성이 헤겔 좌파에 비판을 받았듯이 지젝 역시 고진보다 더 사변적이며 심지어 광학적 기만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도무지 실천적일 수 없는 명제들로 가득 찬 철학자들의 언어들을 착란으로 보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혹 그들은 칸트가 말한 ‘형이상학의 꿈으로 해명한 영을 보는 사람의 꿈’을 다시 꾸는 사람들이 아닐까? 영화 ‘인셉션’에서 보듯이 꿈속의 꿈으로 침잠해 가는 가상의 가상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은 아닐까? 우선 이러저러한 선판단을 중지하고 좀 더 본문을 읽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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