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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규 May 04. 2023

지젝의 시차적 관점 2: 손 곁에 있는 변증법적 유물론

Dialectic Materialism at the Gates

두 번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프랑스로 귀환되어 나치 요원들에게 인계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1940년 스페인 국경 마을에서 자살한 것이 아니다.


그는 스탈린의 스파이들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죽기 몇 달 전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에 대한 짧지만 충격적인 분석인 ‘역사철학테제(Thesi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를 집필했다. 그는 히틀러-스탈린 협정으로 기존의 많은 소비에트 지지자들이 모스크바에 환멸을 느끼던 시기에 죽었다. 이에 대한 대웅으로 사회주의 지식인층로부터 소집된 스탈린주의 요원들로서 암살을 수행하는 "킬러라티" (Killerati) 요원이 그를 죽였다.


그가 살해된 궁극적 이유는 벤야민이 프랑스에서 스페인을 향해 산을 넘어 도피할 때 그가 초안" 테제"를 퇴고하여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집필한 역작을 품 안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초안이 들어있는 서류가방은 피난 중인 동료에게 맡겨졌는데 그 사람은 하필이면 그때 편리하게도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열차에서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간단히 말하여 스탈린은 ‘벤야민의 테제’를 읽었고, 테제에 근거한 새로운 집필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출판을 저지하고자 했다.(11-12쪽)

발터 벤야민(Valter Benjamin)은 독일의 철학자이며, 체제 비판을 포함한 당대의 문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바판하였다. 그의 비판은 주로 다음과 같다.


1. 혁명과 폭력에 대한 비판: 벤야민은 혁명과 폭력의 사용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보다는 새로운 종류의 권력과 억압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주장했다. 왜냐면 이러한 권력과 억압은 이전의 권력과 억압과 동일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 벤야민은 공산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와 동일한 모순과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에서도 계급 간 대립과 억압이 존재하며, 개인의 자유와 창조성이 억압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3. 기술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벤야민은 기술과 자본주의의 발전이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을 억압한다고 보았다. 기술과 자본주의는 인간을 기계적으로 다루고, 인간의 능력과 노동력을 활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4.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 벤야민은 대중문화가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비자들을 양산하는 산업체계의 일환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대중문화는 개인의 창조성과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힘이 있기에 그는 실존주의자들처럼 평균화된 대중문화의 획일성을 비판한다.

이 두 이야기가 공유하는 것은 고급문화(미술과 이론)와 잔인한 저급정치(살인, 고문) 사이의 놀라운 연계뿐만이 아니다. 이 단계에서는 사실 그러한 연계가 표면적으로 인식되는 것만큼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추상예술을 관람하는 일이 (무조음악을 듣는 일과 같이) 고문이라는 것은 가장 비속한 상식적 견해가 아닌가?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쉽게 구금자들이 끊임없이 무조음악에 노출되는 감옥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반면 더욱 "깊이 있는" 상식에 따르면 쇤베르크(Schönberg)는 "그의 음악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대량폭격의 공포를 이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표현했다. 근본적으로 두 이야기가 공유하는 것은 그것들이 구축하는 관계가 구조적인 이유들로 인해 결코 조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단락의 층위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대표하는 것을 "벤야민"과 같은 층위로 이동시키는 것, 즉 스탈린적인 관점에서 벤야민의 테제의 진정한 차원을 간파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이 두 이야기가 기조로 삼고 있는 허상, 즉 두 개의 양립 불가능한 현상을 동일한 차원에 배치하는 허상은 칸트가 "초월론적 가상" (transcendental illusion)이라고 부른 것, 상호 번역이 불가능하며, 어떠한 종합이나 매개도 불가능한 두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일종의 시차적 관점으로만 포착할 수 있는 현상들에 대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가상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두 층위 간에는 어떠한 관계도 성립되지 않으며 어떠한 공유된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일치한다 할지라도 말하자면 그것들은 뫼비우스 띠의 상반된 양면에 있는 셈이다. (레닌이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에서 다다이스트들을 만나는 환상이 예증하는 것과 같은) 레닌의 정치학과 현대미술의 조우는 구조상 발생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 근본적으로, 혁명적 정치학과 혁명적 예술은 상이한 시간성 속에서 움직인다. 비록 그들이 연계된다 하더라도 그들은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들이며, 명백한 양쪽으로서 그들은 결코 대면하지 못한다.(12-13쪽)

역사철학테제는 발터 벤야민이 파리의 수용소에서 갇혀있을 때 역사와 진보에 관한 역사철학적 주제를 ‘역사의 개념에 대해서’란 제목 하에 테제 형식으로 메모한 것이다. 테제 9에서 그는 게르숌 숄렘이란 시인이 그의 29세 생일축하로 보낸 ‘천사의 인사’란 시를 인용하며 자신이 소지한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앙겔레스 노부스)에 대한 단상을 정리한다.


내 날개는 날 준비가 되어 있고 나는 기꺼이 돌아가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평생 머문다 해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기에—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


이 그림에 대해 벤야민은 이렇게 평한다. “이 그림의 천사는 마치 자기가 응시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천사는 눈을 크게 뜨고 있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또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도 바로 이렇게 보일 것임이 틀림없다.”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


이 그림은 소위 칸트가 말한 초월론적 가상(transzendentale schein)의 층위적 간격을 도형적으로도 해석학적으로도 잘 보여준다. 벤야민은 이 작품의 해설에서 천사의 눈과 날개의 간격과 파국과 구원의 간격, 시간과 시점의 간격을 드러내고자 한다.


서양의 역사철학은 어거스틴의 신국론에서 헤겔의 역사철학을 거쳐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고 구원은 다가오는 것으로 사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부자유, 평등과 불평등의 간격이 여전히 벌어져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간격의 원인과 층위의 차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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